마당 사계 /서순석 어머니의 마당은 철마다 깊어갔다 산철쭉 진달래가 진붉은 봄 마당에 어머니 여윈 그림자 비질만 부지런했다 마당 물든 고추 위로 눈물이 붉었다 가난을 문신처럼 눈꼬리에 달아매고 오남매 새끼 두름에 허리를 졸라맸다 밟아라 밟아봐라 꿈틀이나 하는지 바닥치고 눈만 들면 보이는 건 하늘이지 길바닥 교과서 삼아 아이들은 홀로 컸다 하늘 땅 붙으라고 원망도 했던 날들 이제는 미안해서 주문처럼 외는 말들 사람을 미워말아라 그 칼끝이 날 겨눈다 말없이 웃는 연습에 황혼이 놀다 온다 쭈빗쭈빗 웃으며 게걸음으로 오는 자식들 사계를 추석처럼 살자 마당이 흐붓이 웃는다 세상 모든 어머니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식을 위해 사시는 것 같다. 이 시에는 ‘마당’이라는 공간적 배경과 ‘사계’라는 시간적 배경이 있는데, 마당과 사계를 통해 자식을 위해 살아가는 어머니의 인생을 고스란히 엿볼 수 있다. 봄이 오면 마당에는 산철쭉과 진달래가 붉게 피어나지만 어머니는 비질만 부지런히 하실 뿐이다. 마당에 고추가 붉게 물들 때에도 없는 살림에 딸린 자식이 많아서 부지런을 멈출 수 없다. 어머니는 가난하지만 ‘사람을 미
봄비,낙서 /김재혁 결혼이란 어여쁜 인형을 받고서 그것을 망가뜨려 가는 과정이라며, 어제 봄비가 와 한잔하자고 해서 비에게 한잔 사 줬다. 비에게 결혼 얘기는 안 했다. 비는 팔이 아프다고 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듣고만 있었다, 입 없는 나무처럼…… -김재혁 시집, 『딴 생각』, 민음사 시적 화자는 결혼으로 인한 어떤 불화를 겪은 후 조용히 봄비를 바라보고 있다. 결혼은 선택이다. 스스로 결정한 선택이 자신을 괴롭힐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디 결혼뿐이랴. 어느 구석에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삶의 위험한 파편들. 여기서 비의 말은 화자의 내면을 반영하는 것이리라. 힘들 때는 술 한 잔 하면서 그 시간을 견뎌보라는 것이다. 누구나 자신의 삶의 무게는 무겁다. 아무 말도 하지 말고 비를 바라보는 일, 조용히 낙서를 하듯 견디는 것, 마치 나무가 비의 수다를 묵묵히 들어주는 것처럼. /이미산 시인
숟갈질 /천승세 오늘도 죽기 싫어 밥상을 받는다 숟갈질, 살아라 살아라 어깨 짜며 밥을 뜬다 져 나른다 찰지도록 누르고 눌러 입주리만큼 한 삽 뜨면 미치게 그리운 가슴들은 이렇게 삼키는 것이다 떠 넘겨야 하는 것이다 세 시간 뒤에사 너는 기어코 똥이 됐느냐 네 사랑 내 사랑 묻더라, 사흘 뒤면 잊더라 삽질이더라, 한 삽 두 삽 이 숟갈질. -천승세 시집 〈몸굿/푸른숲〉 시인이 바닥에 떼굴떼굴 굴러다니며 어머니 어머니 찾으며 온몸으로 울어대는 모습을 본 적 있다. 그렇게 맑은 울음을 처음 보았다. 소설가 박화성여사의 아들인 것을 그날 알았다. 시집 후기에 그는 이렇게 썼다. ‘크나큰 업적과 상관없이, 결코 협잡挾雜만큼은 용서될 수 없는 문학에다 목숨을 바치고 싶었다. 그래서 처음 매달린 것이 시詩였다. 협잡성이 통하지 않는 엄절한 문학을 하리, 하고.’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것인가. /조길성시인
황홀한 그늘 /조은길 벽돌을 짊어지고 여름을 건너던 사내들이 물기도 채 가시지 않은 시커먼 콘크리트 바닥에서 낮잠을 자고 있 다 그들이 빨아먹다 밀쳐 둔 갈치찌개 냄비에 쉬파리들 이 새까맣게 대가리를 처박고 있다 갈치 비린내를 따라 온 도둑고양이 한 마리 검은 꼬리를 치켜들고 불덩이 같 은 담을 뛰어내리는 순간 마침내 범람한 태양 팬 위의 비곗덩어리처럼 지글지글 무너져 내리는 아스팔트 놀란 매미들 일제히 비상 사이렌을 울리고 여자들 벗긴 과일 처럼 허벅지를 까고 머리카락을 치켜 올리고 수박 화채 오이냉국을 타고 약 백숙을 달여 몰약처럼 황홀한 그늘 벽을 쌓는다 그 벽에 부딪쳐 코가 납작해진 태양 악동처럼 퉤퉤 소나기를 뱉으며 줄행랑을 친다 -시집 ‘노을이 흐르는 강’ (서정시학, 2007)에서 ‘황홀’은 ‘눈이 부시어 어릿어릿할 정도로 찬란하거나 화려함’을 말합니다. 그런데 시인은 어두운 그늘을 황홀과 어울려 놓았습니다. 사뭇 반어적입니다. 누군가 그늘에 싸여 있다고 말하면 그는 무언가에 몹시 시달리고 억눌려 있다는 뜻이겠지요. 그런데 그 부정적 대상에 대해 더없는 긍정의 말을 가져다 놓았군요.
미루나무 서점 /최범영 외로 꼬인 삶을 데리고 가끔 그곳에 들러 처음 보는 책 가까이 그 녀석을 앉히고 잔술 한잔과 뜨끈한 국물을 시키지 빨리 다가가 너무 들이대면 수줍음 놀랄까봐 눈웃음만 짓고 있지 몇 쪽의 말이 펼쳐져 나와 살맛나게 해줄까 웃을 준비부터 하지 읽을 구절이 바빠서 내일이나 온다 해도 좋아 늘 홀로서도 즐거워 춤추며 사는 저 미루나무 책 열 권 읽은 턱이니 -최범영 시집 <고봉밥 어머니/다시올> 미루나무를 바라보면 기분이 좋아진다. 우선 공중으로 시원하게 뻗은 큰 키가 먼 곳까지 볼 수 있을 것 같다. 초록의 무수한 잎사귀는 바람 없이도 반짝거린다. 보고 있으면 어린 날의 순수로 돌아가 저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꼬이고 힘든 삶을 미루나무에게로 데려가는 상상이 재미있다. 의젓한 미루나무는 지친 삶에게 위로가 되는 말씀을 들려주는 한 권의 책과 같다. 언제나 홀로 서서 언제나 즐겁게 맞이하는 미루나무 서점! 그곳에 가기만 해도 책 열 권 쯤 읽어낸 풍성함을 얻을 것이니. /이미산 시인
눈 흩날리네 -고바야시 잇사 눈 흩날리네 농담도 하지 않는 시나노(信濃) 하늘 雪ちゐやおどけも言へぬ信濃空 -일본 하이쿠선집·오석환 옮김·책세상 계절어는 눈(겨울), 세 살에 어머니를 잃고 고아가 된 시인이 나이 오십 넘어 얻은 딸 사토를 잃고 쓴 시이다. 이해 3월에는 이웃의 소년이 물에 빠져 숨졌고 6월에 사토를 잃는다. 7월에는 잇사가 학질을 앓았으며 12월에는 예정했던 여행을 취소하게 된다. 시인의 다른 시 〈죽은 엄마여/바다를 볼 때마다/볼 때마다〉에서 우리는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하는 애달픈 마음을 읽을 수 있다. 끓어오르는 무엇을 가눌 길 없어 웃다가 울다가 문득 농담 한마디 건네지 않는 무심한 하늘을 바라보는 시인의 모습이 뭉클하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것만큼 더 큰 슬픔이 있을까 아픔으로 사무치는 계절에 바다 건너 옛 시인이 우리를 공감하게 한다. /조길성 시인
우거지다 /최광임 가난한 그와 살고 싶은 내가 봄날 물 빠진 버드나무 군락에 방 한 칸 차렸습니다 겨우내 마른 가지 분질러 딱 한 사람만 누워도 좋을 구들을 들이고 벽지 바르지 못한 사방에서 바람이 새어들 듯도 했는데요 이 시대는 웰빙이잖아요 조각보 같은 여러 겹의 하늘과 벽 오랜 세월 달을 지키는 개밥별같이 저만치 혹은 이만치 그와 나 곧 온 몸 물 먹은 버드나무 봄눈이 싹틀 것입니다 나는 조금 전 강물 위 나직이 날으던 재두루미를 생각합니다 강물 속으로 저와 닮은 두루미 한 마리 거느리고 있었는데요 잘 닦인 수면과 그것을 경계로 나는 두루미 함께 산다는 게 별거겠어요 그와 내가 벽 없는 방에 누워 버드나무 뿌리로 뿌리로 물 길어 숲 짙은 그늘을 이루듯 재두루미 제 그림자 거느리고 가는 구름과 바람과 하늘 한데 어우러져 봄 여름 갈 겨울 계절이 되는 것입니다 강가 높은 산이 자꾸 깊어지는 것도 겨우내 견뎌온 제 마른 몸 추스르며 물질하는 것일 텐데요 우리의 구들에서도 쩌렁쩌렁 신록 우거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시집 <도요새 요리/북인> 사랑을 깔고 누우면 그곳이 바로 천국이다. 사랑과 함께 하면 가난이 가난으로 느껴지지 않는 마법에 걸리게 된다.…
이명 /황정숙 젊은 시숙을 부평 화장터로 들여보냈던 문밖에서 울어대는 조카 셋을 품에 안았던 그날부터였나 내 몸에 집을 짓고 사는지 때론, 불청객으로 뛰쳐나와 삼 일 밤낮을 양철지붕에 빗방울 떨어지듯 딱따구리 나무 속을 파 내려가듯 달팽이관을 두드리고 찌르는 통증 머리칼을 바늘처럼 세우고 턱관절을 깁는다. 이승을 빠져나가지 못한 영혼의 옷자락 소리 -황정숙 시집 <엄마들이 쑥쑥 자라난다/한국문연> 이명을 해독해낼 수 있다면 인간의 무의식의 세계를 조금은 알 수 있겠다. 이명은 자신과의 소통을 열망하는 어떤 외부세계의 개입인지 모른다. 인간이 알아듣지 못하는 영혼의 언어인지 모른다. 젊은 시숙을 먼저 보내고 남겨진 조카 셋을 품에 안는 형수의 심정을 생각해보자. 주검을 슬퍼하기도 전에 도착하는 가족으로서의 의무. 그 막막함 앞에서 어찌 슬픔이 순수한 슬픔일 수만 있을까. 어린 자식을 남기고 죽은 자가 떠나지 못하고 옷자락 소리를 내며 무엇을 말하려하는가. /이미산 시인
草露(초로) /서정춘 나는 이슬방울만 보면 돋보기까지 갖고 싶어진다 나는 이술방울만 보면 돋보기만한 이슬방울이고 이슬방울 속의 살점이고 싶다 나보다 어리 디 어린 이슬방울에게 나의 살점을 보태 버리고 싶다 보태 버릴수록 차고 달디 단 나의 살점이 투명한 돋보기 속의 샘물이고 싶다 나는 샘물이 보일 때까지 돋보기로 이슬방울을 들어올리기도 하고 들어 내리기도 하면서 나는 이슬방울만 보면 타래박까지 갖고 싶어진다 -서정춘 시집 <죽편/동학사> 서정춘 시인을 처음 만난 날이 2004년 이니 십년이라는 세월이 흘러갔다. 그 때만 해도 독기와 결기로 서슬 퍼랬다. 언제부턴가 몸이 안 좋다고 드문드문 술을 자제하고 자리를 피하더니 이젠 아예 술자리엔 끼어 앉지도 않는다. 구석에 비켜 앉아 노는 꼴들을 맑은 눈으로 지켜보다가 슬그머니 자리를 피한다. 한 번은 어른이시라 걱정이 되어 뒤를 밞았더니 웬 아리따운 아주머니와 커피 집에서 만나는 것이었다. 행복해 보였다. 집에 들어오는데 바람이 시원했다. 노년의 시인과 그 맑은 눈빛이 떠올라 혼자 웃었다. /조길성 시인
풍경의 유행 1 /박완호 은행나무 아래 신문지를 뒤집어쓴 사내가 종일 모로 누워있다. 몸을 뒤척일 때마다 신문지의 글자들이 한쪽으로 휩쓸린다. 코골이소리에 넋 나간 글자들이 횡설수설 바닥으로 쏟아져 내린다. 아무렇게나 뒤섞인 글자들의 자음과 모음을 번갈아 건드려가며 햇살이 곤히 잠든 사내의 입과 귀를 가려준다. 은행의 눈빛이 샛노랗게 질려가는 석양녘, 신문지에 덮여 있던 하루가 땅거미처럼 바닥을 기어가려 애쓰고 있다. -박완호 시집 <너무 많은 당신>에서 세상이 참 시끄럽다. 말도 많고, 탈도 많다. 네트워크가 잘 되어 있는 세상이라 더하다. 차라리 아무 것도 듣는 것 없이 평화롭게 살던 옛 시절이 낫다는 생각마저 든다. 이 말 저 말 듣다보면 스트레스도 심각하다. 옳은 정보인지 그른 정보인지도 알 수가 없다. 그냥 요란하다. 신문지를 뒤집어쓰고 종일 낮잠을 자는 어떤 사내의 풍경을 묘사한 시이지만 신문지가 암시하는 요지경 세상만사가 먼저 떠오른다. 그리고 그 세상일들에 찌든 하루가 녹초가 되어 엉금엉금 기어가는 현실이 안타까워진다. /장종권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