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스토어 /이원 숲이 된 나무들은 그림자를 쪼개는데 열중한다 새들은 부리가 낀 곳에서 제 소리를 냈다 다른 방향에서 자란 꽃들이 하나의 꽃병에 꽂힌다 늙은 엄마는 심장으로 기어들어가고 의자는 허공을 단련시키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같은 자리에서 신맛과 단맛이 뒤엉킬 때까지 사과는 둥글어졌다 - 시인동네 2013 가을 둥글어지는 사과, 허공을 단련시켜 신맛과 단맛이 어우러져 둥근 사과가 되는, 세상의 엄마는 그렇게 둥글둥글 둥글어진다. 키 낮춰 울퉁불퉁한 온 몸에 둥그런 것 가득 매달로 애면글면 하나라도 떨어질세라 곱게 곱게 키워내는 손맛이 세상을 키우고 어린 것을 키워낸다. 이제는 더 이상 낮아질 수 없을 만큼 작고 둥그렇게, 사과처럼 둥그렇게 말린 몸으로 천천히 지구 밖으로 걸어 나가시는 몸들, 눈빛 아이처럼 맑고 투명하다. 손톱 긴 손마디도 다시 순해진다. 세상에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는 둥글고 둥그런 사과가 되어 우리 심장 속에 깊이 안착하고야 마는, 그 지점에서 다시 꽃으로 환하게 피어나는 모성. 엄마는 둥글둥글한 생명을 또 길러내고 있다. /이명희 시인
벽화 /김민식 아파트 옹벽 틈새 달빛 한 줌 받아 꽃대 세운 한 송이 민들레 홀씨 하나 델꼬 고향가는 날 모질게 아름다운 생 한 줌 응어리 풀어 노오란 벽화 그린다. -동인시집 〈하루, 다 간다〉 (심지, 2013)에서 산에 들에 지천으로 피었던 꽃, 민들레를 도시에서 보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파트 구석진 곳에 달빛을 받으며 민들레 한 송이가 옹색하게 피었습니다. 그때 시인의 상상력은 서둘러 고향으로 달려갑니다. 왜 그랬을까요? 달과 민들레와 고향은 하나의 족속처럼 보입니다. 달은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생리 때문에 불멸을 상징합니다. 수많은 신화 속에서 재생의 화신으로 등장합니다. 민들레도 끈질긴 생명력으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밟아도 밟아도 죽지 않고 오히려 천지사방으로 씨를 틔워 왕성하게 살아남지 않습니까. 고향은 죽지 않는 어머니의 품과 같습니다. 한때 우리는 타향살이의 고단함과 설움을 귀향하여 위로 받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시인은 우리의 삶이 비록 모질지만 언젠가 고난을 딛고 다시 일어서리라 믿기에 아름답다고 하였습니다. 산동네 벽화가 관광자원이 되어 사람들의 이목을 끈다고 합니다. 그처럼 우리 삶의 후미진 벽에 생명의 꽃을 그려 넣었으면 합
시의 씨앗 /서상영 아무래도 씨에서 시가 나온 것 같다 볍씨 콩씨 깨씨 감자씨 그 작은 숨들의 온기가 어른거려 푸른 밀림을 이루고 열매를 맺어갈 때 딱정벌레처럼 몰래 시는 태어난 것 같다 시는 씨에서 나온 것 같다 두식씨 정아씨 순신씨 소월씨 그 의미가 떨어져나간 뒤 찾아드는 고유한 여운이 시가 된 것 같다 아무래도 시는 또 씨로 갈 것 같다 사슴씨 돌씨 소나무씨 도꼬마리씨 바다씨 안녕하세요! 애틋하게 부를 때 달씨 별씨의 비유를 제 몸에 바르며 태양씨의 문법에 따라 시는 무럭무럭 자랄 것 같다 - 서상영, 『눈과 오이디프스』 문학동네 2012 시의 씨앗이라, 땅의 기운을 한 데 모아 힘껏 솟아오르는 뾰족한 것들이 시였구나. 어찌나 연한 빛이 그리도 뾰족하고 거침이 없는 지. 세상에 던진 물음표 같은 것들이 어느새 저렇게 푸른 것으로 세상 속을 꽉 채우고 있는 지 온통 경이로운 것들뿐이다. 씨에서 태어난 시는 그리운 이들의 이름 뒤에 달려 지독하게 고고하고 아름다운 고유명사가 된다. 누군가의 단 하나의 존재로서 꽉 차는 씨는 다시 돌아가 또 사물의 아름다운 씨로 되새김질된다. 땅으로 달빛 속으로 뜨거운 태양 속으로 들어가 윤회하는 아름다운 시, 곱디고운 씨…
絶命詩절명시(제4수) /매천 황현 鳥獸哀鳴海岳嚬(조수애명해악빈) 새 짐승도 슬피 울고 강산도 찡그리네 槿花世界已沈淪(근화세계이침륜) 무궁화 온 세상이 이젠 망해 버렸어라 秋燈掩卷懷千古(추등엄권회천고) 가을 등불 아래 책 덮고 지난 역사 생각하니 難作人間識字人(난작인간식자인)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노릇 참으로 어렵구나 - 매천황현시선 〈평민사〉 염무웅평론집 〈민중시대의 문학/창작과 비평1979〉 등 참고 조선이 오백년을 이어왔으나 나라가 망해도 위로부터 아래까지 책임지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통탄하며 음독자살한 분이다. 나라가 어지럽고 우울하니 옛 책들을 뒤적이게 된다. 이런 글은 되도록 읽지 않는 시대가 와야 하겠다 싶어 깊이 넣어 두었던 책들이 다시 밖으로 나와 얼굴을 내민다. 글 아는 사람 노릇이 참으로 힘들다. 꽃 같은 아이들이 무더기로 갔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잘못된 것인지 도무지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수렁만 보인다. 누가 책임질 것인가 매천선생께 울면서 묻고 싶다. /조길성 시인
소래에서 /강상윤 밀물 앞세우고 어선들이 들어온다. 갯고랑으로 벌거벗었던 골 길을 달려 소래 아낙네 보고 싶어 달려온다. 어물 좌판을 무릎 사이에 둔 그리움이 보고 싶어 달려온다. 해가 지고 달이 떠올라야 풍성해지는 포구, 어느새 정박한 어선들의 용골들이 웅성거리고 아낙네들의 호객 소리도 점점 커진다. 어시장 좌판 사이를 서성이던 나도 어물 몇 점 사고 싶어진다. 부엌에 붙여 놓은 아내의 달력을 떠올리며 갯골로 달려가 본 게 언제인지 서해 밀물이 차오르기를 기다린다. -강상윤 시집 〈만주를 먹자〉에서 좌판을 벌리고 앉은 소래 아낙네의 무릎 사이를 향해 어선들이 달려온다. 무척이나 관능적이다. 어선에 가득 실린 물고기들은 이 아낙네들을 통해 세상에 팔려나갈 것이다. 여성의 본질은 생산이고 창조다. 그들이 세상을 만들어가고 이어가는 존재들이다. 본능적으로 어물 몇 점을 사들고 시인은 아내를 떠올린다. 아내의 밀물을 기다리면서 자신도 어선이 되고 싶다. 몸과 마음을 평화롭게 열어둘 경우에 우리는 쉽게 관능적인 본능의 세계로 진입할 수 있다. 세상에 대한 본질적인 이해가 그곳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장종권 시인
소가죽 구두 /손순미 늙은 소의 발을 굽는다 늙은 아버지의 발을 굽는다 토막 난 아버지의 발을 잡고 아버지의 삶을 다듬기 시작한다 검은 육질에서 기름이 돌기 시작한다 탕약처럼 검고 어두운 터널을 걸어온 아버지 평생의 켤레, 아버지 고통의 부위가 누릿하게 익어간다 나는 아버지의 삶에 지나친 광택을 낸다 아버지 평생의 車, 아버지 구두가 모처럼 호사를 한다 반짝! 아버지의 영광은 짧았다 사람의 발을 한 짐승이, 짐승의 발을 한사람이 아버지를 짓밟았다 그렇게, 칠십 평생 찍어온 아버지의 낙관(落款)은 불발이었다 윤을 낸 구두를 선반 위에 올려둔다 평생 바닥이었던 아버지가 높은 곳에 올라가 계신다 한밤중 구두의 울음이 구성지게 들린다 아버지가 구두를 타러 오신 것일까 - 『현대시학』 2005/11월 가용가치가 가장 높은 것이 아버지다. 의자가 돼 달라면 의자가 되고, 한 그릇 우족 탕이 되어 달라면 우족 탕이 된다. 길이 돼 달라고 하면 굽은 등을 말없이 길로 내놓으신다. 아버지는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해 있다. 킁킁 거리는 기침소리도, 우발적 고함도 허세인 것을 다 안다. 이 시에서는 아버지를 소와 소가죽으로 빗대어, 소가죽 구두로 빗대어 아버지를 절절이 나타내고…
양말을 버리는 즐거움 /조병완 룰루랄라 즐거이 양말을 버린다 걸어다닌 만큼 닳아진 양말 몸의 무게가 실린 만큼 얇아진 두께 뒤꿈치를 비치게 하고 발가락이 나올 구멍을 순순히 허락한다 세상과 만나면서 얇아지고 세상과 부대끼며 탄력이 빠진 양말은 낙관적이다 해진 양말을 쓰레기통에 던지면 훅 번지는 쾌감 양말은 나를 배반하지 않으므로 즐거이 양말을 버린다 그러나 우리 할머니 세대에는 모든 물자들이 부족해 양말 한 짝 버리는 것도 손을 벌벌 떨었을 것이다. 보릿고개라는 배곪음을 연중행사처럼 치르고 가을이 되면 거둬들인 곡식으로 그나마 허기를 면할 수 있는 손바닥 만한 농토가 전부인 그들의 삶…. 우리 할머니가 흐린 전등불 밑에서 필라멘트 끊어진 버릴 전구 끼워 양말을 깁던 풍경이 그려진다. 지금은 물자가 풍부하다. 아니 풍부한 것이 지나쳐 멀쩡한 것들도 그냥 내다 버리는 경우가 다반사다. 할머니세대부터 어머니세대를 거쳐 오는 동안 우리네 삶은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풍족해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고 보니 시인은 우리 부모들의 절약 습관이 남아있는 듯 구멍이 나 발가락이 나올 때까지, ‘얇아지고 탄력이 빠’질 때까지 양말을 신는다.…
절대자 /송기남 사랑에 빠졌어요 난 사랑에 빠졌어요 사랑이 뭔지도 모르는데 말입니다 보고픈 것이 사랑이라면 난 사랑에 빠진 게 틀림없어요 정신없이 그 사람이 보고 싶거든요 모든 것이 아름다워 보이는 것이 사랑이라면 난 사랑에 빠진 것이 맞아요 보이는 게 모두 귀하고 황홀해 보이니까요 작은 것에 감사할 줄 아는 것이 사랑이라면 난 사랑에 빠진 것이 확실합니다 마음에서 이유 없이 감사함이 솟으니까요 - 시집 ‘행복 찾기’ / 시산맥사 사랑이란 무엇일까? 마음속에서 마구 솟구치는 알 수 없는 의욕의 정체가 사랑일까? 누군가 정신없이 보고 싶다면,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아름답고 귀하다면, 이유 없이 감사함이 솟아난다면, 그렇다면 당신은 사랑에 빠진 것이 틀림없다. 사랑의 대상은 참으로 다양하다. 사람에게 느끼는 사랑, 자연에게 느끼는 사랑, 예술과 교감하는 사랑…, 책(독서)과 평생을 함께하는 사랑도 빼놓을 수 없겠다. 사랑은 우리가 살아가는 힘이다. 사랑의 기회가 많을수록 빛나는 삶이 되리라. 아름다운 사랑을 느끼게 해 준 절대자에 대한 감사도 잊지 말자. /이미산 시인
큰 손 /유승도 흙도 씻어낸 향기나는 냉이가 한무더기에 천원이라길래 혼자 먹기엔 많아 오백원어치만 달라고 그랬더니 아주머니는 꾸역꾸역, 오히려 수줍은 몸짓으로 한무더기를 고스란히 봉지에 담아 주신다 자신의 손보다 작게는 나누어주지 못하는 커다란 손 그런 손이 존재한다는 것을 나는 아득히 잊고 살았었다 - 유승도 시집 ‘작은 침묵들을 위하여’ / 창작과 비평사 끊임없는 변화의 삶. 매일 아침 눈 뜨면 달라져 있는 삶의 풍경 속에서도 변화하지 않는 근원과 뿌리가 있다. “인간적”이라는 말이다. 사람의 근원. 근원의 뿌리가 지니고 있는 “나눔”의 미학은 사람이 생태적으로 지니고 있는 유전자이기도 하다. 어떤 이는 자본과 명예를 움켜쥐려고 자신의 손보다 크게 펴 보이는 손이 있는가 하면, 자신의 손보다 “작게는 나누어주지 못하는” 넉넉한 “큰 손”도 있다. 우리는 시시때때 그런 손들을 잊고 사는 건 아닌지 되돌아 볼 일이다. /권오영 시인
갈현동 470-1 골목 /이승희 어둠을 이해하는 건 불빛이다. 그래서 밤새 빛으로 남을 수 있는 거다. 저녁 불빛을 보면 안다. 어떤 사랑도 저보다 아름다운 스밈일 수는 없다. 받아들이면서 비로소 밝아지는 이유를. 불빛이 말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걸 굳이 화해라고, 용서라고 표현할 일이 아니다. 빛 속에서 어둠이 만져지거나, 어둠 속에서 빛이 만져지는 건 다 그런 이유이다. 늙은 불빛 한 점 물처럼 오랜 물길을 흘러 집의 지붕을 적시고 사람의 집은 이제 물방울 같은 불빛 하나하나로 도랑을 이루며 흘러간다. 서둘러 불을 켜는 사람을 보면 눈물 나게 고맙다. - 이승희, 『거짓말처럼 맨드라미가』 문학동네 2012 늦은 귀가를 반겨주는 불빛이 한없이 아늑하다. 버스 정거장에서 내려 고단한 육교계단을 힘겹게 건너며 허기 가득한 하늘을 바라보면 가끔씩 환하게 꽉 찬 빛을 보내주는 달빛도 따뜻하다. 그렇다. 어둠을 이해하는 건 빛이다. 그러니 밤새 곁을 지키고 있는 것이라. 곁에서 스며드는 것이 사랑이리라. 그러면서 서로 더 밝아지는 지점에 이를 수 있는 것이겠지. 아파트 입구에서 반기는 풀벌레 노래 소리는 또 얼마나 눈물겹던지 집의 불빛보다 먼저 발 아래로 쪼르르 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