튤립 /박은율 나는 본다 구근을 찢고 몸의 심연에서 수직으로 피어오른 튤립 그 입술이 머금은 고요 반만 벌어진 새벽 어스름 인생에 대해 더 조그맣게 나는 입술을 오므린다 알뿌리의 기나긴 겨울 반만 말하자 반은 침묵 -출처- 절반의 침묵/ 민음사 2013년 1988년에 등단한 시인의 첫 시집인 듯하다. 얼른 계산이 안 되어서 계산기를 두드려봤더니 25년이다. 첫 시집을 묶기까지의 시간에 일면식도 없는 시인에게 박수를 보낸다. ‘반만 말하자’는 말의 울림이 크다. 군락으로부터 멀어진 그러나 유독 빨간 목이 긴 튤립이 떠오른다. 지난 여름을 떠올려보니 튤립의 절정은 반만 벌어질 때가 분명하다. 반을 넘기고 나면 곧 바닥이다. 튤립을 만날 때마다 나도 입술을 조그맣게 오므리고 ‘반만 말하자’ 속으로 주문을 외울 것 같다. /박홍점 시인
가족 /서정춘 어미 새 쇠슬쇠슬 어린 새 달고 뜨네 볏논에 떨어진 저녁밥 얻어먹고 서녘 하늘 둥지 속을 기러기 떼 가네 가다 말까 울다 말까 이따금씩 울고 울다가 잠이 와 멀다고 또 우네 어미 새 아비 새 어린 새 달고 가네 -- 서정춘, 『귀』, 시와 시학 2005 토요일에도 붐비는 지하철 4호선을 탄 서울행, 사당을 지나 동작대교를 건너며 보는 한강의 풍경은 언제나 고즈넉하다. 서울 살면서 하루라도 한강을 건너지 않고 살았나 하고 돌아보니 이제는 서울 떠나와 산 시간이 더 길다. 떠나 와 사는 날 중 하루 또다시 한강을 건너 서울 한복판으로 가려는데 멀리 새떼가 화살모양으로 반듯하게 정렬해 날아간다. 대오 앞을 나서서 가는 새는 그 무리의 모든 것을 책임지는 대장일 테고 사선으로 길게 늘어서는 줄에는 바람 맞서 잘 가르는 힘 있는 새부터 나서서 뒤로 어린 새끼들까지 품고 날아가는 대오일터였다. 세상에 가장 아름다운 풍경은 그렇게 제 새끼들을 돌보는 부모 새나 대장 새의 모습일 테지만 지금 그 모습은 자주 오독이 되고 있다. 인간은 본을 가장 못 뜨고 사는 동물 중 하나이지 싶다. /이명희 시인
연접의 방식으로 /정용화 이름이 간절해질 때 꽃들이 피어난다 햇살을 끌어당겨 시든 꽃의 언어를 읽는 시간은 짧다 저무는 것들 속에서 느릿한 리듬하나 꺼내어 놓는다 들리지 않는 소리 하나 내게로 전달되고서야 기다림은 어느 목숨에나 서식한다는 것을 알았다 하나의 비밀도 갖지 못한 사람이 되어 외로운 살을 더듬으면 고여 있던 향기가 묻어난다 저 고요는 어떤 허공을 품고 있는지 네가 오지 않는 공터에는 어떤 꽃들이 피고 있을까 오래 머물지 말라고 길은 인간의 뒤쪽으로만 생겨난다 -정용화 시집 『나선형의 저녁』/애지 어쩌면 인간의 삶은 기다림의 연속일지 모른다. 고도를 기다리듯 절망적일 땐 희망을, 사랑의 결핍일 땐 연인을, 마음이 가려울 땐 그리움을, 그리고 읍내에 있는 엄마를 기다리다 이만큼 성장했다. 한 송이 국화꽃을 봄부터 기다리듯 모든 기다림은 어느 때를 가리키는 언어와 동의어이다. 기다림은 때를 기다리는 것이다. 긴 기다림 끝에 창 넓은 카페에서 애인과 반가운 해후를 하고 기다림으로 꽃은 봄을 장식하고 기다림으로 알은 날개를 달고 아기는 울음으로 탄생하고 기다림으로 천둥번개는 빛과 소리를 낸다. 그러므로 ‘기다림은 어느 목숨에나 서식한다.&rsq
화석의 시간 /박경숙 백악기에 갇혀버린 물고기 유유히 흔들던 꼬리 지느러미 날렵하다 존재의 바다를 헤엄쳐 기원을 거슬러 온 선명한 가슴뼈 골과 골의 무늬를 지나 지층과 지층의 사이 표적을 피해 잠입하듯 말똥한 눈망울 둥굴리며 유전(遺傳)을 꿈꾸는가 닮은꼴의 무리를 찾아 중생대 백악기를 헤엄쳐 온 물고기 한 마리 안주하듯 화석의 해심 유영 중이다 암모나이트와 공룡 등은 오래전에 멸종되어 화석만 남아 있다. 이들 생물은 비록 화석으로만 남게 되었지만 한때 세상을 유영하거나 비상하거나 질주하던 생명들이었다. 그러나 멸종된 생명들은 더 이상 꿈틀거리지 못한다. 우리 인간은 자자손손 생명을 퍼뜨리고 있다. 생명공학자들은 머지않아 인간복제도 가능하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인간은 다른 생명체와는 달리 불멸을 이룰 수 있을 것인가? 몸만 영생한다고 해서 어디 족하겠는가.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있다. 이름을 남긴다는 것은, 의미 있는 존재로 살아가는 것을 뜻한다. 살아 있는 동안 이름을 남겨보자. /박병두 시인·수원영화예술협회장
이미지 /성향숙 아버지 어머니 틀니 빼서 물그릇에 담는다 물그릇 속에서 다정히 손잡고 서로의 입아귀 맞추며 도란도란 이야기 나눈다 물속에 잠긴 아버지 어머니 밤새 달그락거린다 아버지 물결처럼 흔들린다 나란히 덮은 이불 위에 흰 꽃 노란 꽃 피었다 살은 뭉그러지고 뼈는 검게 변색된다 빠진 이 깨진 이빨 드러내고 웃지만 신접살림 둥근 꽃 이불 화려해진다 --성향숙 시집 ‘엄마, 엄마들’ / 푸른사상 부부의 틀니가 함께 물그릇에 담겨있는 모습은 정겹다. 틀니들은 밤새 달그락거릴 것이다. 서로의 입아귀를 맞추며 도란도란 이어지는 이야기는 현실보다 더 현실적이다. 지극한 아름다움이다. 하지만 이것은 홀로 된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이다. 홀로 된 아버지는 늘 물결처럼 흔들리는 기억의 모습이다. 자식의 입장에선 언제나 어머니와 함께 해야 할 아버지다. 여전히 어머니와 나란히 이불을 덮는다. 이불 위에 흰 꽃 노란 꽃을 피운다. 신접살림의 그 동그란 웃음으로 이불이 보다 화려해진다. 행간마다 아버지가 덜 쓸쓸하시기를 바라는 시적화자의 간절함이 보인다.
함박눈 /이병률 행색이 초라한 어르신 게다가 큰 짐까지 든 그 곁을 따라 걷다가 억장이 무너지는 듯하여 식사는 하셨느냐고 물어요 한 끼만 묵어도 되는데 오늘은 두 끼나 묵었으예 날은 추워 마음은 미칠 것 같아 담배나 몇 갑 사드릴까 하고 담배는 피우시냐고 물어요 오늘은 두 끼나 묵어서 안 태워도 되야예 이제부터 낮달과 제비꽃이 배고파 보여도 하나도 그 까닭을 모를라구요 -이병률 시집 ‘눈사람 여관’ / 문학과 지성사 서로가 서로를 보는 순간 사라지는 날이 많다. 서로가 껴안지 않으면 사라지는 겨울, “함박눈”처럼 모두는 “각자”이며, “개인”이다. 눈은 내리고 날은 추운데 “짐”을 들고 가는 초라한 노인의 모습에 “억장”이 무너지는 가슴이 껴안지 못하는 일들이 많아지는 세한이다. “까닭” 모를 아픔들이 줄었으면 좋겠다. 세 끼도 모자라 배가 터져라 먹어대는 음식점의 불빛은 꺼질 줄 모른다. “비대함”은 보편적이 되었다. 보편을 뛰어넘지 못하는 가난한 것들을 우리는 “세상의 나머지
독서의 방법 /고영 동네 헌책방에서 시집 한 권을 얻어왔다 이 時代의 사랑 그 옛날 내 책꽂이 속으로 거침없이 밀고 들어와 주제넘던 문청의 애간장을 몇 말쯤 졸이게 했던 그 도도하고 고혹적인 한 여성시인이 졸지에 버림을 받은 이 時代의 사랑 혹은 이 時代의 당혹 앞에서 나는 폐허를 건너가는 손바닥으로 조심스럽게 책장을 넘겼다 이 時代의 사랑이 청파동을 떠돌 무렵 이 時代의 사랑이 時代의 상실로 읽혀질 무렵 책갈피 사이에서 무언가 작고 얇은 종이가 꽂혀 있는 것을 보았다 소쩍새 한 마리가 그려진 사용하지 않은 구십 원짜리 보통우표였다 이 時代의 상실을 소쩍새의 밝은 눈으로 누군가에게 전하라는 앞선 이의 뜻이었으리라 그래, 헌책을 읽는 후대의 누군가를 위해 위안거리가 될 만한 밑줄 하나라도 남기는 일이 시 한 편 쓰는 것보다 중요한 일임을, 이 時代의 사랑을 읽는 내내 어디선가 소쩍새 맑은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시인세계 2013년 가을호 나도 이 시대의 사랑법이라는 시를 발표한 적이 있다. 그 시가 한성대역 도어스크린에 있다는 소문은 들었다. 이 시대의 사랑법이란 것은 관심, 배려, 사랑을 가지고 상대를 대하고 가까이 다가간다는 것이다. 사랑은 상대편의…
순간의 꽃 /고은 두 사람이 마주 앉아 밥을 먹는다 흔하디 흔한 것 동시에 최고의 것 가로되 사랑이더라 -- 고은, 『순간의 꽃』中, 문학동네 2001 함께 마주 앉아 밥을 먹는 일이 사랑이다. 빈상을 채워 올려진 밥과 반찬을 서로 나누어 먹는 일이 사랑이다. 얼마나 흔하디흔한 일인가. 큰 돈 없어도 설렁탕 한 그릇에 붉은 국물의 깍두기 한 접시 장미꽃처럼 향기롭게 먹을 수 있는 것이 사랑이다. 흔하디흔한 사랑, 당신과 마주하고 앉아서 한 끼 밥을 먹는 일은 이 세상에서 다시는 살 수 없는 가장 행복하고 기쁜 시간이다. 그 순간, 순간이 그렇게 꽃이 되고 기억이 되고 사랑이 된다. 당신의 눈앞에서 오래오래 지지 않는 꽃, 영원의 꽃으로 다시 피어난다. 순간은 꽃으로 매번 다시 태어난다. 새해가 밝았다. 갑오년(甲午年)이다. 청마 해란다. 푸른 기운으로 달려오는 한 해의 활기찬 힘, 밝고 청정(淸淨)한 기운 마음, 몸에 싣고 떠나볼 일이다. /이명희시인
외할머니와 뒤안 툇마루 /서정주 외할머니네 집 뒤안에는 장판지 두 장만큼한 먹오딧빛 툇마루가 깔려 있습니다. 이 툇마루는 외할머니의 손때와 그네 딸들의 손때로 날이날마닥 칠해져 온 것이라 하니 내 어머니의 처녀 때의 손때도 꽤나 많이는 묻어 있을 것입니다마는, 그러나 그것은 하도나 많이 문질러서 인제는 이미 때가 아니라, 한 개의 거울로 번질번질 닦이어져 어린 내 얼굴을 들이비칩니다. 그래, 나는 어머니한테 꾸지람을 되게 들어 따로 어디 갈 곳이 없이 된 날은, 이 외할머니네 때 거울 툇마루를 찾아와, 외할머니가 장독대 옆 뽕나무에서 따다 주는 오디 열매를 약으로 먹어 숨을 바로 합니다. 외할머니의 얼굴과 내 얼굴이 나란히 비치어 있는 이 툇마루에까지는 어머니도 그네 꾸지람을 가지고 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서정주는 노년에 이르러 전통을 소재로 한 시들을 많이 남겼다. 그는 전통적인 신화나 설화 등에서 소재를 차용하였다. 즉 널리 알려졌거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을 시의 소재로 삼아 자신의 정서와 결합시킨 것이다. 이 시 역시 그런 특성을 엿볼 수 있다. <외할머니의 뒤안 툇마루>는 아름다운 우리말이 시어로 사용되어서 읽는 재미도 있다. 또 시인…
詠月(영월) /백승창 睡起推窓看(수기추창간) : 자다 일어나 들창문 열어보니 非冬滿地雪(비동만지설) : 겨울이 아닌데 뜰에 온통 눈 呼童急掃庭(호동급소정) : 아이 불러 급히 마당 쓸라 하니 笑指碧天月(소지벽천월) : 웃으며 손가락으로 하늘의 달 가리키네. -출처 <한시 365일/이병한 엮음 도서출판 궁리 2007>외 참고 자다 일어나 방바닥에 웬 복사지가 떨어져 있나 해서 만져보았더니 네모난 창문을 통해 비쳐든 달빛이었다. 일어나 앉아 빈방에서 한참을 소리 없이 웃었던 기억이 있다. 그림이 그려진다. 달빛을 눈인 줄 알고 마당을 쓸라 하는 시인과 눈이 아니라며 달을 가리키는 아이의 모습이 달빛 아래 서늘하다. 이런 마당이 그립다. /조길성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