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름의 낮잠 /최기순 장맛비가 석 달 열흘 쏟아지고 앞산이 무너져 붉은 흙이 가슴을 덮고 어머니는 장독대가 떠내려간다고 발을 굴렀다 흙탕물 속에서 닭 벼슬 같은 맨드라미가 깜빡거리며 떠내려갔다 저 맨드라미를 건져다가 어머니의 장독대에 심어드려야 하는데 아무리 버둥거려도 발이 땅에 닿질 않았다 최기순 시집 『음표들의 집』/푸른사상 시선 25 올해는 어느 때보다 장마가 길고 지루했다. 끈적거리고 후텁지근한 것은 둘째고 불어난 빗물로 인해 사람 사는 세상엔 갖가지 사연들이 많았다. 산이 절개되고 토사물이 쏟아진다. 집을 덮쳐 무너지고 불어난 물에 사람들이 속수무책 떠내려가기도 한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물과 함께 순식간에 사라지고 평생 가슴에 슬픔을 맞고 살아가기도 한다. 이런 사람들에게 비는 공포다. 비가 올 때마다 쿵쾅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조마조마 안절부절 한다. 비가 어떤 사람들에겐 즐거운 추억이 되지만 어떤 사람들에겐 평생의 트라우마다. 꿈속에서도 끔찍한 장면은 반복되고 ‘아무리 버둥거려도 발이 땅에 닿질 않는’ 꿈의 표의가 등장하는 것이다. /성향숙 시인
부처님 오신 날/박성우 열다섯 가구 사는 마을에 지어놓은 이팝나무 쌀밥이 천 그릇이다 예닐곱 마지기 논두렁에 내온 아카시아 수제비 새참이 천 그릇이다 외딴길 외딴집에 따끔따끔 붙여놓은 탱자나무 밥풀이 천천만만이고 마을 뒤 산사山寺까지 이어 올린 층층나무 층층 고봉밥이 천 그릇이다 -리토피아 여름호에서 그러니 매일매일이 부처님 오신 날이었으면 좋겠다. 부처님은 대단하시기도 한데 어찌하여 일 년 중 하루만 태어나셨을까. 삼백육십오 번을 태어나시면 안 되었던 것일까. 불쌍한 중생들을 생각하셨더라면 그랬으면 오죽이나 좋았겠는가. 매일매일이 부처님 오신 날이었으면 좋겠다. 세상이 아무리 좋아져서 잘 사는 세상이면 무엇 하냐. 아직도 열다섯 사는 마을에는 봄이 오지를 못하고, 예닐곱 마지기 논으로는 먹고 살기도 힘이 들고, 외딴길 외딴집은 세월이 갈수록 더 외로워진다. 부처님은 대단한 분이시니까 지금이라도 일 년 내내 다시 오셨으면 좋겠다. 풍성한 새참에 쌀밥으로 된 고봉밥, 속에는 가슴도 담겨 있고, 미래도 담겨 있고, 꿈도 담겨 있으려니, 이건 분명 꿈일 것이다. /장종권 시인
공손한 기울기 /최서진 - 의자 저녁이 내리는 마을에는 가장 가까운 곳에서 깊어지는 불빛과 가장 멀리서 오는 불빛이 있었지 나는 그 사이에 놓은 의자 모서리마다 긁힌 표정으로 네 다리가 꺾인다 늙은 마술사처럼 무엇을 기다리고 있나 다리사이 별똥별이 떨어진다 자꾸 아래로만 가라앉는 저녁 바람에 나뭇결이 사소하게 어긋난다 안쪽에서부터 천천히 무너져 아픈 방향들 누구도 앉힐 수 없다 나는 생각하는 자세로 기울어진다 기울어진 축만큼 젖은 바람이 분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주저앉아 낮은 자세로 온 몸이 뜨겁다 의자가 지문을 물고 나무처럼 자란다 반 년간 『작가연대』2012년 상반기호(통권 7호) 침울한 사람이 걸어오듯 저녁이 오고 불빛들은 깊어질 때 하루 동안의 상처가 덧날 때가 있다. 어둠 속에서 비로소 생채기를 혀로 핥는 동물적 본성, 모든 생존하는 것들의 비애일 것이다. 쉽게 자리를 뜨지 못하고 자꾸 가라앉는 감정을 자연은 사소하게 어긋나고 가까스로 평형을 유지하던 한 축이 무너져 마음 한 자락 허용할 수 없을 때 아무 표정도 없이 제 몸이나 기울여 슬픔의 포즈를 취할 뿐 눅눅한 바람 속에서 신열이 오르도록, 의자에서 뿌리가 뻗고 잎이 솟아오르도록. /최기순 시
부음 /이도윤 죽음은 이별이 아니라 지구의 멸망이다 한 생명에게 죽음은 결별이 아니라 비장한 폭발이다 한 개의 화산이 하늘과 만나는 일 그의 생애가 활자가 되고 한 순간에 신이 된다 엎드려라 곧 신이 될 사람들아 죽음이란 술 한 잔 비우는 일 건배하라 용암처럼 쩡 소리 솟구치게 오, 하늘 아래 이별은 없다 죽음을 알리는 일, 즉 부음이란 슬픔을 넘어 누군가에겐 땅이 꺼지는 사건이다.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생각에 죽음 이후의 그리움은 한없이 커진다. 그래서 그런가? 사별은 어떤 이별보다 더 큰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한다. 그러나 넓게 생각하면 죽음은 진정한 이별이 아니다. 죽음은 영원히 산 자들과 함께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구심점이 되어 무덤으로, 집으로 모이도록 남은 자들을 조종하고 영향력을 행사한다. 죽은 자들은 이미 ‘신이 되어’ 있다. 그들이 남긴 삶의 이력은 거짓이 없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으면서 믿게 만드는 존재가 바로 신 아닌가? 이청준의 소설이 아니라도 죽음은 진정 축제다. 그러므로 독자들이여, ‘곧 신이 될 인간들이여’. 죽음 앞에서 술 한 잔 기울이며 ‘쩡 소리 솟구치게 건배하라&rsqu
성에꽃 /최두석 새벽 시내버스는 차창에 웬 찬란한 치장을 하고 달린다 엄동 혹한일수록 선연히 피는 성에꽃 어제 이 버스를 탔던 처녀 총각 아이 어른 미용사 외판원 파출부 실업자의 입김과 숨결이 간밤에 은밀히 만나 피워낸 번뜩이는 기막힌 아름다움 나는 무슨 전람회에 온 듯 자리를 옮겨다니며 보고 다시 꽃이파리 하나, 섬세하고도 차가운 아름다움에 취한다 어느 누구의 막막한 한숨이던가 어떤 더운 가슴이 토해낸 정열의 숨결이던가 일없이 정성스레 입김으로 손가락으로 성에꽃 한 잎 지우고 이마를 대고 본다 덜컹거리는 창에 어리는 푸석한 얼굴 오랫동안 함께 길을 걸었으나 지금은 면회가 금지된 친구여. 한겨울의 새벽에 시내버스를 타 본 적이 있는 사람들은 한 번쯤 차창에 낀 성에를 손으로 문지르거나 입김으로 불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최두석 시인은 겨울 새벽 차창에 서리는 뿌연 성에에 꽃이라는 이름을 달아주면서 그 속에 처녀, 총각, 아이, 어른, 미용사, 외판원, 파출부, 실업자의 입김과 숨결이 성에꽃으로 아름답게 형상화했다. 1980년대 아픈 역사의 상흔을 ‘친구’를 통해 드러냄으로써, 시대적인 아픔을 공감하게 한 것이다. ‘엄동 혹한일
질서 /유현아 월요일 그릇 장사 화요일 뻥튀기 장사 수요일 등산복 장사 목요일 돼지족발 장사 금요일 만물 장사 토요일, 일요일 쉼 대성한의원 앞의 질서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는 오묘한 유현아 시집 <아무나 회사원,그밖에 여러분> / 2013년 / 애지 남들 다 알고 있는 얘기라고, 뭐가 새롭냐고, 시는 시일뿐 사회 운동이 아니라고, 윤동주의 ‘서시’는 윤리적이어서 좋은 시라 하기엔 좀 그렇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런데 새로운 것은 없어도 시의 환기력이라는 게 있다. 잊고 있던 것, 늘 지나치기만 했던 것을 다시 들여다보게 만드는 힘. 유현아 시인의 시가 그렇다. 우리 사회의 어둡고 남루한 삶과 그 속의 온기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한다. 이 시처럼 우연히 개입된 자발적 질서보다 더 아름다운 질서가 또 있을까. /박설희 시인
눈동자 그 눈동자 /박이화 이 들면 언제나 저 아득한 우주의 시간 속에서 꿈처럼 사랑하고 죽어 간 어떤 별들의 생애가 나타난다. 사천 년 전 해질 무렵 떠나와 이제사 내 가슴에 닿는 저 푸르고 슬픈 광년 그때도 나는 지금처럼 울먹였겠지 캄캄한 밤하늘에 그렁그렁 고이는 별빛을 바라보며 이제 머잖아 내 생애도 흘러가고 나는 또 끝없는 윤회의 궤도 속으로 별처럼 핑그르 떠돌리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앞으로 이천 년도 내게는 꿈같이 찰나에 그쳐 나는 다시 저 쏟아질 듯 글썽이는 별들의 약속대로 당신을 만나리라는 것도 박이화 시집 <흐드러지다>에서 우주의 정체는 아리송하다. 너무 크고, 너무 멀고, 너무 깊어서, 우주의 얼굴이 어떤 것인지 인류가 멸망하는 날까지 제아무리 연구를 해봐도 결코 알 수는 없을 것이다. 반면에 인간이라는 존재는 너무나 왜소한 존재이다. 너무 작고, 너무 얕아서, 존재라고 하기에도 부끄러울 지경이다. 그러니 크기로 우주와 나를 비교하게 되면 결과는 뻔해진다. 거리와 깊이로 비교해도 마찬가지다. 우주를 이해하려면 외형적이거나 시각적이거나 물리적인 방법에서 떠나야 한다. 우주에서 나는 어떤 존재일까. 역할이라도 과연 있는 것일까. 나에
이별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내가 죽거들랑. 발코니를 열어두오. 아이가 오렌지를 먹고 있네. (내 발코니에서 그게 보이네) 농부가 밀을 베고 있네. (내 발코니에서 그걸 느끼네.) 내가 죽거들랑. 발코니를 열어 두오! 로르카 시 선집(민용태 옮김)/을유문화사 불교 경전에 따르면 인간이 겪는 괴로움 중에 애별리고愛別離苦라는 것이 있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할 수밖에 없어서 겪는 괴로움을 말한다. 미워하는 사람과 살 수밖에 없는 괴로움(원증회고)도 있지만 애별리고는 단장斷腸의 아픔을 느끼는 괴로움이다. 이별의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연인관계를 청산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이별, 부부간 이혼으로, 자식들의 출타나 출가로 인한 이별 등은 다시 만날 어떤 가능성을 남기지만 병이나 천재지변으로 인한 사별은 어떤 여지가 없다. 그러므로 가장 큰 이별의 아픔은 사별이다. 나를 보며 환하게 웃는 그 사람의 얼굴, 가는 손가락으로 오렌지껍질을 까서 입으로 가져가는 손짓들, 같이 아파해주던 울음을 더 이상 볼 수 없다. 그리움으로 사무친다. 그래서 시인은 ‘내가 죽거들랑 발코니를 열어 두라’고 간절하게 부탁한다. /성향숙 시인
찬 비 /고운기 느티나무가 아직은 밝다 용케 제 잎을 거느리고 있다 찬비가 떨어지기 시작한 아침이 조금은 마음 쓰인다 비야 스며들어 내 가슴에 이르러다오 잎을 다 내주고도 이 계절을 견뎌 축축하겠다 비와 더불어 바람이 불어오겠다 고운기 시집, 구름의 이동속도/ 문예중앙/2012 찬비 내린 아침 느티나무의 노란 잎들은 눈 시리다. 갈 사람은 가고 남을 사람은 남아 이미 생의 절반을 살아 넘긴 사람들에게 아직은 밝은 빛으로 잎들을 거느리고 있는 느티나무가 다행스럽고 마음 쓰일 것이다. 열심히 살아온 일이 잃어버리는 일이었다는 당혹스러움, 뭔가 아득히 잊고 있었다는 듯 문득 이마를 짚어보게 되는 계절 축축하게 견디는 대기 속으로 서리 품은 비바람의 예감. /최기순 시인
고향 /정지용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 산꽁이 알을 품고 뻐꾸기 제철에 울건만, 마음은 제 고향 지니지 않고 머언 항구로 떠도는 구름. 오늘도 메끝에 홀로 오르니 흰점 꽃이 인정스레 웃고, 어린 시절에 불던 풀피리 소리 아니 나고 메마른 입술에 쓰디쓰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하늘만이 높푸르구나. 누구에게나 고향이 있고, 고향에 대한 향수가 있다. 하지만 시간은 미래라는 일정한 공간을 향해 이동하므로 그 옛날의 고향은 단지 의식 속에서만 존재할 뿐이다. 정지용의 <고향>에서 알 수 있듯이, 시인이 그리던 고향은 현재의 공간에서는 너무나도 많이 변해 있다. 그러한 안타까움에 시인은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하늘만이 높푸르다고 말한다. 정지용이 이 시를 쓰던 당시에는 민족말살정책과 중일전쟁이 일어났고 자유로운 창작도 하지 못했다. 시인은 바로 이러한 현실에 대해 비관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추억을 회상해 고향을 재현할 수 있다. 삶이 버겁게 느껴질 때 고향의 풍경을 떠올려보자. /박병두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