쾌청한 오후 /김정미 오래 끌었던 연애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 오후, 날은 더웠고 습도는 더 높았다 아라비아 사막의 한낮 같은 도시 한복판에서 더위보다 화끈하게 마침표 찍어준 마음에 감사하며 혹여 한 톨 후회라도 있을까 뒤돌아보았지만 벌써 저 멀리 물러나는 연기 같은 기억들 아스팔트 태우며 오르는 골탄의 땀방울만 몇 군데 남아 있었다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닐 사-랑*을 위해 혼신의 힘으로 보낸 여러 밤들이여 과거는 늘 그렇게 관대해지니 단 한걸음만 뒤로 넘겨두어도 손가락 마디마디 저려왔던 무기력한 고통이 먼지로 날아가는 것 바라볼 수 있었을 텐데, 땀 사이에 묻은 쓰린 고약 딱지 하나하나 뜯어내며 돌아오는 길에 청명한 초가을이 나보다 먼저 내 방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김윤아의 노래 ‘사랑, 지나고 나면 아무 것도 아닐 마음의 사치’에서 변용 계간 <신생> 2012년 겨울호 발표 신인으로 각광 받고 있는 김점미 시인에게 사랑만큼 신나는 것이 없었을 것이다. 사랑은 늘 우리를 흥분시키고 서로를 위해 화장대 앞에 앉거나 머리를 손보게 한다. 생에 가장 큰 올인이 있었다면 사랑에게 올인 한 것이다. 하나 사랑만큼 슬픔이나 고통을 극에
벚꽃지다/방민호 날이 흐리다 어제보다 흐린 오늘 꽃이 떠나고 있다 네 슬픈 눈시울처럼 붉어진 흰 꽃잎 눈보라처럼 흩날리고 나 여기 레테의 강 건너 네 곁으로 왔단다 함께 있는 때만이라도 즐겁기로 했었지 약속을 어긴 건 당신이에요 너는 말하는데 꽃나무는 말이 없다 책을 읽어야겠지 상처 다스리는 법이 페이지마다 씌어 있지 아무도 찾지 않는 방에 들어가 비밀스레 나의 모더니즘을 읽는다 꽃잎처럼 흩어진 시간 끝에 선다 벼랑 끝에 바람이 분다 생은 스러지기 전에 크게 한 번 빛나는 법 꽃잎 떠난 자리에 황토 비 내리겠지 너 떠난 자리에 칠흑이 서겠지 시집, 나는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고/실천문학/2010 마지막 깊은 들숨처럼 솟아올랐다가 흩어지는 벚꽃, 호곡소리도 없이 눈보라처럼 흩날리며 누가 또 한 생을 버리는가 보다. 늘 한쪽이 늦거나 이르거나 어느 한순간만이라도 사랑이 완벽한 적 있었나! 하릴 없이 방으로 들어와 가능한 한 난해한 책을 읽겠지. 곧 비 내리겠다. 황토 빛 물결 굽이치겠다. 철철 흐르겠다. 그 자리 캄캄해지겠다. /최기순 시인
갯벌의 시/권혜창 달과 지구가 점점 가까워지는 때 있지 조수간만의 차 때문이란 싱거운 변명이 있는 모양이지만 썰물 진 바다에 가 봐 마음의 속살이 다 보이잖아 미처 숨기지 못한 어린 게들을 갯벌 속으로 황급히 끌어 당겨 봐도, 이미 늦은 일 감출 수 없는 그런 마음이 있다는 거지 갯벌 위를 걷다 보면 더 잘 알게 되잖아 발자국마다 놓아주지 않으려는 힘 별들의 인력이 얼마나 간곡한지 알게 되지 삶이 시에게, 시가 삶에게 한껏 팔을 뻗는 시간들도 그러하지 거품을 뿜으며 옆으로 걷는 게가 온 몸으로 적어놓은 갯벌 위 문장들도 그러하지 - 계간 <시와시> 2010년 여름호 감출 수 없는 마음, 그걸 시인은 “마음의 속살”이라고 부른다. 어린 게들에서 갯벌의 마음의 속살을 읽어내고, 발자국을 놓아주지 않으려는 힘에서 별들의 간곡한 인력을 읽어내는 게 시안(詩眼)이겠다. “삶이 시에게, 시가 삶에게 / 한껏 팔을 뻗는 시간”에 자연에서 비의를, 갯벌에서 문장을 읽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 여름, 나무의 마음과 바람의 속살 등을 만지작거리며 노닐고 싶다. /박설희 시인
울릉도/채명화 바다는 동쪽으로 열려 있었다 파랗게 짙푸른 조용함으로 맞아 준 바다 조그만 점 하나가 이리도 커다랗게 안겨 오는 건 희망을 노래하는 마음 보이는 모든 것은 아름다움 경이로움 그리고 먹먹함뿐이다 내가 더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더냐 말하고 싶은 것이 더 있었더냐 작아지고 작아지는 나는 없어지고 스러지고 세상에 섞여 울부짖는 것이 부끄러움이다 사치스러움이다 욕망의 잔해이다 침묵 속에 부여잡는 내 가슴이 이리도 쓸데없는 것뿐임을 푸른 물 위에 쏟아내고 다시 찾는 그날에는 가벼운 깃털이 되리라 물새처럼 작은 몸으로 또한 노래하리라 그렇게 섬 하나 내 가슴에서 지우고 손짓하는 안개도 없이 조용히 떠나온 발길 울릉도는 512년(신라 지증왕 13) 신라의 이사부가 독립국인 우산국을 점령한 뒤 우릉도(羽陵島)·무릉도(武陵島) 등으로 불리다가 1915년 현재의 이름으로 바뀌고 경상북도에 편입되었다. 울릉도에는 예부터 도둑·공해·뱀이 없고, 향나무·바람·미인·물·돌이 많다 하여 3무(無) 5다(多)의 섬으로 통했다. 이러한 섬에서 시인은 무엇을 본 것일까? 망망대해 위에 떠있는
조용한 가방/정현옥 뱉지 못한 것들이 입 속에서 엉겨있다 패인 볼에 담아둔 세월을 우물거리지만 말이 되지 않는다 버스는 가득해서 엉덩이들은 무겁다 손잡이가 높아서 더욱 무거운 노구에 대해 운전 중인 기사는 죄가 없다 터질 것 같은 입이나 꼭 다물고 있는 버스나 함부로 문을 열지 않는 침묵의 경지가 흔들린다 이빠진 지퍼같은, 이빨도 없는데 입은 더 무거운 - 정현옥 시집 <띠알로 띠알로> (시와미학사, 2012) 시인은 고단한 인생들을 싣고 달리는 버스의 모양이 마치 지퍼 닫힌 가방처럼 보였나 보다. 가방 속에 담긴 각자의 삶의 무게대로 각자의 표정에 그대로 표시되고 있지만 달리는 버스는 대답해 줄 것이 없다. 그렇지만 덜컹이는 시간 속에 우리들의 가방도 더러는 입을 열고 감춰진 삶의 일부를 보여주기도 한다. 가방을 닮은 버스 안에 작은 가방들이 침묵으로 올라타고, 서로의 가방에 대해서도 역시 침묵으로 응시한다. 소리 없이 말하는 인생들의 가방에서 이 빠진 지퍼 사이로 죄 없는 고단함이 죄의식처럼 부풀어 있다. 이 시를 통해 오늘도 인생의 가방끈에는 희망이라고 쓰고 그 속에는 곤고한 짐을 넣고 다니는 또 다른 나를 바라본다. 시의 제목을 &lsquo
어쩐다 /박철웅 어쩐다, 내일은 당신에게 맡기라는데, 그래도 내일이 걱정되는 걸, 어쩐다, 오늘도 나의 하루는 비둘기 식탁처럼 풍성하고, 깨알 같은 내일은 먹물처럼 덮쳐오는데, 밤이 되면 은밀하게 후려치는데, 어쩐다, 내일은 비, 내일은 먹구름, 아아 당신은 무슨 요일일까, 잃어버린 날들이 일요일처럼 몰려오고, 교회 첨탑에서는 종만 저 홀로 흔들리고 있는데, 어서어서 오라고 울고 있는데, 어쩐다, 허수아비처럼 바람에 나부끼는데, 당신은 희미하고, 어디선가 폭주족의 팡파레 소리 들리는데, 그냥 눈 감을까 생각도 해보는데, 어쩐다, 오늘도 날은 저물고 터벅터벅 돌아오던 아버지 생각 빗물 같은데, 어쩐다, 바라보는 저 마알간 눈, 비둘기처럼 오목한 등이 저무는데, 어쩐다, 어쩐다, 출처-리토피아 2013년 여름호에서 인간이 비극적인 존재라면 그 이유는 아마도 언젠가는 자신에게 반드시 내일이 사라진다는 것이고, 불행하게도 그 사실을 스스로 알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이전에 자신의 내일을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저마다 다르겠지만 미래에 대한 전망은 대부분 낙관적이거나 비관적이다. 그것은 현재를 읽는 시각의 차이에서 생기는 결
소행성을 지나는 늙은 선로공/황병승 하늘은 맑고 시원한 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드는 오후 빛바랜 작업복 차림의 한 늙은 선로공이 보수를 마치고 선로를 따라 걷고 있다 앙상한 그의 어깨 너머로 끝내 만날 수 없는 운명처럼 이어진 은빛 선로 그러나 언제였던가, 아득한 저 멀리로 화살표의 끝처럼 애틋한 키스를 나누던 기억 보수를 마친 한 늙은 선로공이 커다란 공구를 흔들며 선로를 따라 걷고 있다 황병승 시집 <육체쇼와 전집>/문학과 지성사 선로공으로 일생을 소비한 사내는 선로 위에서 밥을 먹고 선로 위에서 키스를 나누고 선로 위에서 배설을 한다. 지루한 생의 마지막은 어쩌면 끝이 보이지 않을 선로처럼 아득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한 사람의 일생은 길고도 짧은 역사다. 지구에서 보면 혹 긴 것 같기도 하지만 우주에서 보면 그저 소행성을 잠깐 지나치는 순간의 역사다. 태풍처럼 잠깐 지나치는 사건이다. 순간 속에 긴긴 노동과 지루한 사랑과 끝나지 않을 슬픔이 꽉꽉 쟁여져 있다. 순간 속에 팔만 칠천 번의 식사와 이만 구천 번의 배변과 긴긴 각각의 이야기를 만들며 누군가 만들어 놓은 트랙을 따라 걷고 있다. /성향숙 시인
춤꾼 이야기/이윤택 슬픈 노래가 너를 천국에 데려다 주지는 않는다 슬픈 노래 흐를 때 슬픈 노래 지긋이 밟고 빙글 멋지게 스테이지 한가운데로 이 세상과 우리 사이 발이 있다 하나님은 발이 없지 막달레나 마리아도 내 발을 닦아 주었다 미스터 J 춤을 추세요 당신의 발 너무 날렵해 날아다니는 것 같애 나는 날지 않았다 스텝을 밟으며 욕심 없이 발자국 지우며 슬픈 노래 가득 찬 세상 손을 내밀었지 한 번 추실까요, 아가씨? 시집 <우리는 지금 제네바로 간다/1988년 문학사상사> 슬픈 노래 가득한 세상과 지긋이 멋지게 빙그르르 돌다보면 세상의 주변에서 중심으로 이동해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고 그의 연극들에서처럼 세상의 온갖 희로애락을 한 판 춤으로 승화시키려는 아름답지만 아픈 춤을 시인은 추고 있다. 욕심 없이 발자국마저 지우며 하나님도 천국도 예수도 우리를 행복하게 해 줄 수는 없다고 그것이 역설로서의 갈망이든 절망이든 눈 지그시 감고 빙그르르 세상 모든 아픔들에게 손을 내어 밀고 있다 살며시 그 손을 잡아줄 일이다. /조길성 시인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김용택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 이 밤 너무 신나고 근사해요 내 마음에도 생전 처음 보는 환한 달이 떠오르고 산 아래 작은 마을이 그려집니다 간절한 이 그리움들을, 사무쳐 오는 이 연정들을 달빛에 실어 당신께 보냅니다 세상에, 강변에 달빛이 곱다고 전화를 다 주시다니요 흐르는 물 어디쯤 눈부시게 부서지는 소리 문득 들려옵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 중에는 ‘사랑을 하면 시인이 된다’는 말이 있다. 세상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이야기는 사랑에 관한 것이다. 그런데 요새 인기 있는 드라마나 노래가사 등에는 서로에 대한 원망과 배신 등이 주로 엿보이고 있으니 안타깝다. 다른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사랑할 때 우리는 비로소 인간다워질 수 있다. 김용택의 시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에는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사랑을 하게 되면 세상 모든 것이 아름답게 보인다 했던가. 달을 보고 아름다움을 느낀 이 시의 화자는 사랑하는 이에게 자신의 느낀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전해주고 싶어 한다. 아름다운 것을 공유하고 싶은 마음, 그것이 사랑이 아닐까. 사랑한, 사랑할 그 여자다. /
애월 혹은/서안나 애월(涯月)에선 취한 밤도 문장이다 팽나무 아래서 당신과 백 년 동안 술잔을 기울이고 싶었다 서쪽을 보는 당신의 먼 눈 울음이라는 것 느리게 걸어보는 것 나는 썩은 귀 당신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애월에서 사랑은 비루해진다 애월이라 처음 소리 내어 부른 사람, 물가에 달을 끌어와 젖은 달빛 건져 올리고 소매가 젖었을 것이다 그가 빛나는 이마를 대던 계절은 높고 환했으리라 달빛과 달빛이 겹쳐지는 어금니같이 아려 오는 검은 문장, 애월 나는 물가에 앉아 짐승처럼 달의 문장을 빠져나가는 중이다 서안나 시집, 립스틱의 발달사/ 천년의 시작/2013 아무 상관도 없던 한 지명(地名)이 선뜻 다가와 한 생을 거기서 나서 사랑하고 늙어죽은 것처럼 사무칠 때가 있다. 시인에게 애월은 어느 날 문득 그렇게 왔을 것, ‘사랑하는 이와 백 년 동안 술잔을 기울이고 싶은’ 그러나 풍경은 살아있는 것이어서 이미 취한 이를 한 정점에 오래 세워두지 않는다. 비로소 ‘당신의 먼 눈 울음이라는 것’ 귀가 무디어지고 ‘사랑은 비루해진다’. 다시 최초의 애월에게로 ‘젖은 달빛 건져 올려 소매가 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