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네와 나그네/주종환 비록 그것이 즐겁고 아름답다 해도 누가 군대 연병장에 그네를 매달겠는가 또 누가 그네를 타겠는가 모두에게 그네를 태우고 싶은 마음으로…… 피는 꽃들이여 바람에 흔들리는 꽃들, 나그네 마음으로 타는 하늘 그네들 주종환 시집 <계곡의 발견>에서 어릴 적 애 당산나무 커다란 가지에 매달아놓은 그네는 한여름 동네 아이들의 가장 신명나는 놀이터였다. 사내와 계집애가 따로 없었다. 어른과 아이도 따로 없었다. 그네는 땅에서 하늘로 힘차게 날아오르도록 도와주는 존재이다. 그리고 우리들에게 강력하고 신비로운 몸의 율동에너지를 쏟아부어준 존재이다. 우리는 그 그네를 타면서 생명의 신비로운 세계로 몰입해 들어갈 수가 있었다. 드디어 꽃이 그네가 되어주고 있다. 우리는 황홀하게 피는 꽃을 통해 땅과 하늘을 오가며 육체의 왕성한 생명 리듬을 얻는다. 꽃은 단지 피는 것만으로도 바라보는 사람을 신명이 나게 만든다. 황홀하게 만든다. 꽃은 경직된 질서를 요구하지 않는다. 그 속에서는 꽃의 의미를 깨달을 수도 없다. 자유로운 나그네가 되어야 비로소 완전한 감동의 세계로 진입하는 온전한 생명체가 되는 것이다. /장종권 시인
봄날은 간다/이위발 차지도 덥지도 않은 적당한 두께의 나른함을 덮고 깊지도 얕지도 않은 적당한 술잔에 애틋함을 담아 가랑비가 솔솔 내리듯 여인이 나풀나풀 움직이듯 취중은 장자인지 나비인지 모를 몽롱한 꿈을 꾸듯 사람이 사람에게로 가는 토요일이면 지구를 걷어차고 싶다(시인축구단 글발 공동시집에서) 백설희 가수의 봄날은 간다가 내 애창곡이 된 지 오래다. 실없는 그 기약에 봄날은 간다 노래하면 애간장이 끊어지는 것 같다. 노래의 가사 중 새파란 풀잎이 물에 떠서 흘러가더라는 가사를 가지고 시를 쓴 적도 있다. 새파란 풀잎은 청춘이라고 할 수 있고 강물은 불가항력의 상징으로 새파란 풀잎이 물에 떠간다는 것은 결국 인생의 허망을 시로 쓴 것 같다. 하나 진정한 봄은 자연의 봄이 아니라 인간의 봄이어야 봄이다. 인간의 봄을 조화롭게 하는 것이 자연의 봄이고 자연의 봄과 인간의 봄은 맥락을 같이 하면서 함께 오가야 할 봄인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의 봄이 자연에게 가 견딜 수 없는 봄날이 되듯이 포근한 사람에게 포근한 사람이 가는 것도 봄인 것이다. 그러면서 어김없이 또 봄날은 간다. 봄날이 가므로 가버리는 봄날에 슬프지 않으려고 사람이 사람에게 가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흰죽처럼/김병기 딱딱한 몸이 풀어져 끓는 물에서 팔팔 살아서 그대의 상처 깊은 몸으로 아으, 풀어질 수 있다면 생생한 기억을 가진 지난날을 나를 위하여 추억으로 갖지 않고 그대를 위하여 응어리 하나 없이 으깨어져 착한 영혼이라도 된다면 나 이대로 죽으리라 그대 사는 게 나였거니 나 사는 게 그대였거니 흰죽 한 사발로 그대를 모시리 -김병기 시집 <오랜된 밥상> 시와에세이, 2013 몸뚱어리 으깨어 끓는 물에서 전혀 새로운 모양의 양식(糧食)이 변화되어 병자의 생기를 돕는 것이 흰죽이다. 우리는 누구나 누군가의 으깨어진 희생으로 산다. 또한 누군가를 위해 으깨어져야만 하는 순환 섭리 속에서 생명으로 이어간다. 우리는 이 시에서 내 몸이 풀어져 하얀 죽이 되어 사랑하는 그에게로 들어가 그의 피가 되고 그의 살이 되고 마침내 그의 눈이 되고 삶이 되는 거룩한 죽음의 순환을 본다. 이기적인 시간들이 하얗게 풀어져 한 점 추억도 없이 응어리도 없이 착한 영혼으로 그에게 갈 수 있다면, 그대 사는 게 곧 나 사는 것이라 기뻐하며 흰죽 한 사발로 그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면. 이 시편은 지금 내 시간을 누군가를 위해 풀어줘야 할 시간은 아닌가 자꾸 질문하게…
숫자/고순례 날개를 단 숫자 행방을 모른다. 백지 위에서 맘껏 누려보는 자유로운 날개 벼랑 끝에 떨어져도 아픔을 모르는 그냥 흐르는 대로 흘러 숫자는 숫자일 뿐이다. 우리는 수많은 숫자들 속에서 살아간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들도 숫자이고, 우리의 나이도 숫자이며, 우리가 살고 있는 집들도 숫자로 표현된다. 우리의 이 시간의 제약을 받으며 살아간다. 대개 직장에서는 몇 시 몇 분 몇 초까지 어떤 일을 해야 하며, 시간이 갈수록 늘어나는 우리의 나이도 불편하기 그지없는 것이다. 월급통장과 카드사용명세서에 찍힌 숫자, 주택 평수도 우리를 자유롭지 못하게 한다. 그런데 이 시는 과감하게도 ‘숫자는 숫자일 뿐’이라고 말한다. 우리를 구속하는 숫자들 속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날개’를 펼치라고 권유하는 것이다. 세상의 숫자들이 우리를 괴롭힐 때 ‘숫자는 숫자일 뿐’이라고 외쳐보자. /박병두 시인
렌즈/류인서 해변으로 떠밀려 와 죽어가는 화면 속의 고래 그 고래 물기 그렁한 눈접시에 담기는 배부른 구름 그 구름 몸 풀어 어린 구름에게 젖 물리는 동안 어린 구름 자라 덩치 큰 고래 구름으로 다시 떠가는 동안 죽어가는 고래 둥근 눈접시 둘레에 백 배속 빨리감기 테잎처럼 되감기며 지워지는 머나먼 낯선 별의, 바깥 류인서 시집 <신호대기/문학과 지성, 2013> 시인의 시집 <신호대기>를 읽으며 제목이 왜 신호대기일까 생각해 보았다. 물기 그렁한 고래의 눈접시 가득 배부른 구름이 몸을 풀어 어린 구름에게 젖 물리는 모습에서 시인은 이 낯설고 이상한 별에 가득 찬 신호들을 수집하고 해석하고 몸소 살아있는 모든 것들에게 신호를 타전하고 있는 건 아닐까. 우리는 온갖 신호들 속에서 살고 있다. 서로 겉돌고 있는 신호들 속에서 시인은 어쩌면 방향을 잃고 있는지도 모른다. 죽어가는 고래의 눈접시 속에서 시인은 자신을 불러주는 머나먼 이 이상스런 낯선 별의 바깥인 진정한 내면의 신호를 바라본 것은 아닐까. /조길성 시인
모래성/전윤호 해질녘이면 돌아가야지 엄마가 부르기 전에 신발도 탁 탁 털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돌아가야지 종일 만든 모래성도 사라지겠지 공들였던 몇 개의 탑과 조개껍질로 만든 방도 무너지겠지 집을 팔아야겠어요 대출 이자를 견딜 수 없어요 남는 돈으론 전세도 얻을 수 없네요 아내의 등 뒤로 파도치는 소리가 들린다 엄마가 환하게 웃으며 기다리겠지 그게 뭐 좋다고 진종일 있었니 그래도 재밌었어요 지개를 끓이는 연탄불 아래서 모래투성이 손을 씻는다 곧 곯아떨어질 시간 해질녘이면 돌아가야지 토요일이면 지구를 걷어차고 싶다 (시인축구단 글발 공동시집에서) 결국 우리는 사라질 것을 위하여 우리를 바친다. 하나 그렇더라도 살아가야 하는 것이 삶이고 생이다. 사라질 것을 위하여 땀을 흘릴 때 즐거움이 있고 보람이 있다. 사라질 것을 알면서 매달려 보는 사랑이니 그리움도 매 한가지이다. 모래성인 줄 알면서도 쌓는다. 권력이란 모래성, 부라는 모래성, 청춘이라는 모래성 공든 탑이 무너지랴 하지만 무너지는 것을 수없이 보았으면서도 모래성을 쌓는다. 무너지면 또 쌓으려고 내일을 위한 곤한 잠에 곯아떨어진다. 모래성은 인간의 냄새가 나는 시다. 심금을 가만히 울리는 시다. 모래성
사람으로 붐비는 앎은 슬픔이니/정현종 안다고 우쭐할 것도 없고 알았다고 깔깔거릴 것도 없고 낄낄거릴 것도 없고 너무 배부를 것도 없고, 안다고 알았다고 우주를 제 목소리로 채울 것도 없고 누굴 죽일 궁리를 할 것도 없고 엉엉 울 것도 없다 뭐든지 간에 하여간 사람으로 붐비는 앎은 슬픔이니… 그게 활자의 모습으로 있거나 망막에 어른거리는 그림자거나 풀처럼 흔들리고 있거나 그 어떤 모습이거나 사람으로 붐비는 앎은 슬픔이니… 정현종 시집 <한 꽃송이/문학과 지성, 1992> 사람으로 붐비는 앎이 활자의 모습으로 있거나 망막에 어른거리는 그림자거나 풀처럼 흔들리거나 뭐든지 하여간에 그 모든 붐비는 앎은 끝내는 슬픔이니 우쭐할 것도 없고 그렇다고 청승맞게 울지도 말란다. 그럼 어쩌란 말인가. 시인은 장난처럼 툭툭 내뱉고는 앎으로 붐비는 슬픔 속으로 사라져간다. 그렇다고 받아들이라거나 맞서라거나 하지 않는다. 낄낄거리거나 깔깔거릴 일도 없단다. 어차피 그 붐비는 슬픔 속에 삶의 모든 비밀이 가득하다는 듯이, 나도 붐비는 슬픔 속으로 슬쩍 끼어들어 본다.
수요일 /최문자 진정한 지옥이란 미지근한 물이 너무 오래 흐르는 것 시는 월요일은 모든 것인 듯 화요일엔 모든 것이 아닌 듯 들쥐처럼 멀리 지나가는 월요일 화요일 진정으로 너를 찾아오는 수요일은 꽃말 있는 꽃이 되려는 중 히말라야에서 들었다 뿌리에서 올라오는 꽝꽝 얼린 꽃말 월요일 화요일 보내 놓고 수요일은 히말라야의 꽃말이 필요하다 - 최문자 시집 <사과 사이사이 새>민음사 2012 그래, 내세의 지옥이 유황불처럼 화끈하다면, 현세의 진정한 지옥은 그저 미지근한 삶이 아니겠는가. 한 주간의 생애가 월요일로부터 출발한다고 믿는 이들에게는 월요일이 모든 것이 되리라만, 단 하루의 고단함으로 화요일은 이내 모든 것이 아닌 것처럼 되어 버리지. 아, 그때 찾아오는 수요일은 꽃 한 송이 피울 수 없는 꽝꽝 얼어버린 황량한 지평으로 보일 거야. 동결(凍結)의 땅 저 깊숙한 곳으로부터 올라오는 뿌리의 숨줄기가 보인다면, 그 줄기를 따라 물이 오른다면, 그래서 그 수맥을 따라 피어나는 꽃이 있다면, 40여년 시와 신앙과 선생으로 살며 수요일마다 미지근하거나 아예 얼어붙은 사람들의 가슴을 녹이는 수맥이 되어 살아있음의 꽃말을 퍼 올리고 있는 시인의 모성이 참으로
정신을 차리고 보니/김순천 혼곤한 낮잠에서 깨어 창문을 여니 태양이 서산을 넘는다 잠깐이었건만 세상은 어느새 어둑한 저녁을 맞고 있다 인생도 그러한가 한눈 판 동안 세월은 저만치 물러앉았으니 문득 문득 터 잡지 못한 아쉬움에 가슴 패는 한숨소리 커져 가고 찰나를 살면서도 영원을 노래하는 속절없음에 낯빛만 석양처럼 붉다 우리는 유한하고도 비가역적인 시간 속에 살고 있다. 비가역성은 반응이 한쪽으로만 일어나고 다시 그전 상태로 돌아가지 않는 것을 일컫는데, 우리의 인생은 비가역성을 띠고 있으므로 이전 상태로 되돌릴 수 없는 것이다. 그로 인해 돌아보면 항상 아쉬움이 남게 마련이다. 이러한 성질은 우리를 매우 불만족스럽게 하지만 소중한 교훈을 준다. 찰나의 순간을 소중히 살아야 한다는 일깨움을 주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우리 서로 사랑하며 행복을 만끽하자. 돌아서서 후회 없는 인생을 위해. /박병두 시인
도라지 /윤승천 더러는 묏새 더불어 산맥(山脈)을 노닐다가 더러는 더북풀 쓸쓸히 묏골에 뿌리내리기도 하다가 한恨 많은 피난 벽지(僻地) 인맥(人脈) 되기도 했다가 봄날 천지 묏산에 산에 도라지 꽃 피었다 하늘은 그 길로 피맺히도록 열려 있고 묏새 훨훨 날아 오월이 된다 산마을에 끝없이 달고 뜨거운 마음 이 울어 옐 적막강산에 눈물로 피니 도라지꽃 -토요일이면 지구를 걷어차고 싶다(시인 축구단 글발 공동시집에서) 도라지는 어디서 보던지 반갑다. 자줏빛 도라지를 보면 정갈한 여인의 모습이 생각나고 하얀 도라지는 순결한 처녀의 모습 같아 가슴 두근거리게 한다. 윤승천 시인이 바라보는 도라지는 한이 맺힌 도라지다. 수난사로 얼룩진 이 산하에서 수난이라는 슬픔을 거름기로 하여 자란 도라지이다. 수난의 위로가 되고 수난의 내부 고발자처럼 말없이 자란 것이 도라지다. 하나 도라지 무침이니 도라지 구이니 도라지 술이니 다 구미를 당긴다. 도라지 그 씁쓰레하면서도 단맛은 바로 수난의 맛이 아닌가. 눈물의 맛이 아닌가. 한의 맛이 아닌가. 이 도라지를 한편의 시로 승화시킨 윤승천 시인의 시적 역량이 잘 여문 도라지 뿌리 같이 아울러 느끼게 하는 시다. /김왕노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