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화羽化 /김윤 배추흰나비 애벌레가 맨 처음 하는 말은 제가 나운 알집을 먹는 거라고 교대 앞 거북곱창집에 앉아 아들아이와 와글와글 소주잔 기울일 때 서로 덴 상처를 헤집고 뒤집어 쇠꼬챙이로 구워낼 때 악악대며 비명 지르며 아이는 제 알집을 나는 내 알집을 아삭아삭 씹는 거라고 그 힘으로 고치 하나 짓는 거라고 배배 꼬여진 날개를 천지에 피는 거라고 곱창에 기름 자글자글 돌고 숯불 희미해져 뻘밭같이 질척질척 자꾸 빠지는 발 밤새 너를 두드리던 말 애끓는 말 병신된 말 녹슨 톱같이 날 안 들어서 쇠심줄같이 질긴 어머니를 내가 오늘 저녁 다 먹은 거라고 -김윤 시집 <전혀 다른 아침>에서 어머니의 숭고함에 대하여 예찬한 말들이 얼마나 많은지는 모두가 아는 일이다. 그런데 시인의 시인다움은 이런 곳에서도 빛을 발한다. 배추흰나비 애벌레는 알을 깨고 나오자마자 맨 먼저 제가 태어난 껍질을 아작아작 먹어대는 것이고, 그래야 평생을 제대로 살 수 있는 에너지를 거기에서 얻는 것이라고 한다. 아들과 가진 술자리에서 아들 입에 아작아작 씹혀지는 자신을 돌아보며 자신도 어머니임을 처절하게 깨닫는 시인은, 아들에게는 무한한 생명의 에너지를 기꺼운 마음으로 내어주고,
다시 십일월 꽃 떨어진 그 텅 빈 대궁에 빗물이 스쳐간다 이제 나를 가릴 수 있는 것은 거센 바람 뿐 詩 한줄 없이 바람 속에 시들어 눈 속에 그대로 매서운 꽃눈 틔우리 박영근 시집, 창작과 비평 (1997) 술 먹다 죽은 시인은 동서고금에 많은데 문득 박영근 시인이 생각나는 건 무슨 일인가 나도 술 먹다 생각을 깊이 해본다. ‘솔아솔아 푸르른 솔아’를 남기고 간 그이, 세상 사람들은 알기나 할까. 詩碑<시비> 하나 세우는데도 고충이 많았다. 시비 제막식에서 사진을 찍는데 동료 시인이 몇 명밖에 보이질 않았다. 세월은 흘러가는 것이고 흘러가면 잊히는 것인가. 지금 술잔을 같이 나누고 있는 벗들의 눈을 들여다보며 다시 생각해 본다. /조길성 시인
여우비 온 날 /최영숙 “똥 퍼” 한통에 칠천 원이란다 “똥 퍼” 한통에 만이천원이란다 된다 안 된다 한바탕 소란 끝난 뒤 “그래도 똥 치우는 값이 제일 싼 거여” 대문 닫히고 텅 빈 골목 여우비 후둑이다 간다 동쪽 하늘부터 맑게 갠다 싱긋 웃는 연초록 포플러 잎새 최영숙 시집 <골목 하나를 사이로, 창작과 비평, 1996> 세상 아픔이란 아픔은 모두 짊어지고 간 사람이다. 전화하면 금방이라도 뛰쳐나올 듯 그 얼굴 생생하다. 목숨이 스러져가면서도 내색하지 않고 시만 쓰다 간 사람이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면 죄가 되는 세상이 되었다. 똥을 맛보고 임금의 건강상태를 가늠했다는 기록이 있다. 하늘같은 똥이다. 아름다움은 겉치장 속으로 숨어들고 우리는 더 이상 숨어들 곳이 없다. 지금이라도 전화를 할 일이다. 우리가 아프게 했던 사람들에게. /조길성 시인
반달 /신영진 마음만큼이나 외롭다 너의 깊던 눈이었던가? 방긋거리던 입이었던가? 동공 속 기억을 더듬으며 먼 산 바라보니 거기, 파란 마음 위에 너의 모습 가슴 시리게 얹혀 있구나 인간을 비롯해 세상 모든 사물은 다면체(多面體) 같다. 평범하게 보이는 것들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전혀 다르게 보이기 때문이다. 이 시의 화자는 반달을 보며 그리운 한 사람을 떠올린다. 반달은 그리운 이의 깊은 눈과 같으며, 방긋거리던 입과 닮았다. 이 시에서 반달은 그리운 이와 함께 나누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매개체이다. 이처럼 세상의 사물들을 자기만의 시선으로 들여다볼 때 한 편의 시가 나올 수 있다. 가까운 시일 내에 반달이 뜨면 우리 밤하늘을 바라다보자. 당신의 마음속에 떠오르는 반달은 세상에 하나뿐인 독특한 달일 것이다. 당신의 마음속에 그런 달이 떠오를 때 시가 당신 마음속에 걸어 들어올 것이다.
강변역 /이상국 강변역 물품보관소 옆 벽에는 밤눈*이라는 시가 걸려 있다 추운 노천역에서 가난한 연인들이 서로의 바깥이 되어주고 싶다는 시다 나는 그 시 때문에 볼일이 없는데도 더러 거기로 갔다 바깥이란 말 때문이었다 내가 어디 있는지 몰라서 그 시의 바깥에 오래 서 있고는 했다 출처 - 이상국, 『창작과비평』2013년 봄호 세상살이에 떠밀려 방향 감각을 잃고 혼란스러울 때 “내가 어디 있는지 몰라서” 일부러 “강변역”을 찾아간다. 그리고 서로의 바깥이 돼 주고 싶어 하는 연인들의 이야기가 담긴 시의 바깥에 선다. 여기에는 시를 따뜻하게 품고자 하는 마음과 시 속의 연인들의 사랑을 고이 품고자 하는 겹의 의미가 담겨 있다. 시의 형태도 행과 행 사이에 여백을 두어 그 여백이 시 한행 한행을 감싸주고 있는 형국이다. 강변역은 「밤눈」이라는 시를 품고, 그 바깥에는 강물이 강변역을 품으며 흐르고, 그 바깥에는…. 이렇게 세상은 무수한 ‘바깥’들로 이루어져 있다. 까도 까도 껍질뿐인 양파처럼. 무수한 바깥들이 삶을, 세상을, 역사를, 만들어 간다.
풍향계 /이덕규 꼬리지느러미가 푸르르 떨린다 그가 열심히 헤엄쳐가는 쪽으로 지상의 모든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 그러나, 그 꼬리 뒤로 빛의 속도보다 더 빠르게 더 멀리 사라져가는 초고속 後爆風의 뒤통수가 보인다 그 배후가 궁금하다 -이덕규 시집 <다국적 구름공장 안을 엿보다/문학동네 2003년> 풍향계는 바람이 불어야 생존을 보장받는다. 눈과 얼음을 녹이며 부는 봄바람도 있을 것이고 모래바람을 몰아오는 황사바람도 있을 것이다. 여름날 시원하게 땀을 식혀주는 바람도 있을 것이나 살을 에는 칼바람도 있을 것이다. 삶에도 끝없이 바람이 분다. 시인은 그 바람의 배후를 의심하고 있다. 방향 잃은 바람이 풍향계를 무용지물로 만든 것일까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바람은 미처 읽기도 전에 빠르게 스쳐 지나가버린다. 시인은 빛보다 빠른 바람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궁금해 할 뿐이다. 우리 모두가 그렇지는 않을까 정말 그 배후가 궁금하다 꼬리지느러미를 푸르르 떨어본다.
무좀 /고선주 세상이 갈수록 가렵다 비누로 씻어내고, 소주와 식촛물에 담가도 발에 견고한 집을 지은 무좀균들은 도무지 방 뺄 생각이 없다 전셋값이 너무 오른 데다 물가와 교육비까지 올라 먹고 살기가 힘들고 삶에서 발을 아예 빼든가, 배짱이다 긁으면 생채기만 남기는 일상의 시시콜콜한 사건들 간지럽다 간지럽다 간지러워서 정말 죽을 맛이다 -고선주 시집 <밥알의 힘>에서 시원스러운 사회를 기다리는 일은 아무래도 요원할 듯하다. 너무 복잡해진데다가 아전인수 격으로 개인 이기주의나 집단 이기주의까지 팽배하여 물고 물리는 사정이 대추나무에 연 걸린 형국이다. 그러니 답답하고 가렵다는 것이다. 가려운 곳을 골라 긁어주면 될 것인데 이것이 긁으면 긁을수록 성을 내는 무좀균이라는 것이 문제다. 가려운 곳을 긁어준다고 시원한 상황이 되지 않는다면 도대체 이 경우를 어찌해야 할까. 무좀균은 결코 쉽사리 물러서지 않는 집요한 존재다. 무좀균을 없애기 위해 발가락을 없앨 수도 없는 노릇이니 답답한 일이다. 무좀균을 가지고 있는 모든 한국 사람들은 오늘도 가렵다. 어제도 가려웠고, 내일도 가려울 것이다. 지독한 무좀균이다. /장종권 시인
나무의 약력 /박연준 원래는 팔이 있었다 어느 날 이유 없이 두 팔이 잘리자 온몸으로 한을 품은 나무의 정수리에서 수십 개의 잔가지들이 뻗어나왔다 팔을 돌려달라고 바람에 흔들리다가 정신없이 위로 뻗대다가 더는 견디지 못하게 됐을 때 붉은 심장을 뱉어내기도 했다 발이 묶인 삼손들이 울부짖고 있다 참을 것이 많은 봄밤이라고 눈먼 나무들이 수런거린다 박연준 시집『아버지는 나를 처제, 하고 불렀다』/문학동네 누구나 자기만의 역사를 만들면서 산다. 좋고 나쁘고를 떠나 삶의 이력이 된다. 살아온 이력을 간단하게 줄인 것이 약력이다. 내세울만한, 아니 드러내지 않아도 드러나는 프로필이 된다. 나무 또한 나이테라는 삶의 이력이 있지만 잘라봐야 인간의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고 시인은 나무의 다른 이력에 주목한다. 팔이 잘린 상처를 갖고 살아가는 나무다. 팔이 잘리면 잘릴수록 오히려 나무 밑둥치는 더 강인하고 튼튼한 바탕이 된다. 굵어진 밑둥으로부터 더 많은 (잔가지)팔들이 다시 무성해져 바람에 손을 흔든다. 거기 눈부시게 아름다운 꽃도 피우고 태양 같은 열매를 매달기도 한다. 어느 하나를 잃으면 다른 한쪽이 채워지는 자연의 섭리를 포착하는 봄밤이다. /성향숙 시인
마당 사계/서순석 어머니의 마당은 철마다 깊어갔다 산철쭉 진달래가 진붉은 봄 마당에 어머니 여윈 그림자 비질만 부지런했다 마당 물든 고추 위로 눈물이 붉었다 가난을 문신처럼 눈꼬리에 달아매고 오남매 새끼 두름에 허리를 졸라맸다 밟아라 밟아봐라 꿈틀이나 하는지 바닥치고 눈만 들면 보이는 건 하늘이지 길바닥 교과서 삼아 아이들은 홀로 컸다 하늘 땅 붙으라고 원망도 했던 날들 이제는 미안해서 주문처럼 외는 말들 사람을 미워말아라 그 칼끝이 날 겨눈다 말없이 웃는 연습에 황혼이 놀다 온다 쭈빗쭈빗 웃으며 게걸음으로 오는 자식들 사계를 추석처럼 살자 마당이 흐붓이 웃는다 세상 모든 어머니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식을 위해 사시는 것 같다. 어머니의 자식사랑은 예나 지금이나 높고 크기만 하다. 이 시에는 ‘마당’이라는 공간적 배경과 ‘사계’라는 시간적 배경이 있는데, 마당과 사계를 통해 자식을 위해 살아가는 어머니의 인생을 고스란히 엿볼 수 있다. 봄이 오면 마당에는 산철쭉과 진달래가 붉게 피어나지만 어머니는 비질만 부지런히 하실 뿐이다. 마당에 고추가 붉게 물들 때에도 없는 살림에 딸린 자식이 많아서 부지런을 멈출…
다듬는다/김광선 넌덜머리나게 구차했던 것들이, 정말이지 이제는 버려야만 했던 것들이 누군가에게 더 비싼 값의 가치로 매겨질 때는 지키려 애썼던 부위 슬그머니 등 뒤로 감추어야 하는 순간들에 노여웠다. 필요 없는 부분이라 내 스스로 떼어내고 잠시 잊었던가 창문 밖 뿌연 흙바람에 꽃잎들이 날린다, 봄꽃이 무더기로 진다. 허리와 허벅지에 붙인 파스를 떼어내고 새 파스를 붙인다, 거실 봄볕을 등지고 앉은 아내의 등이 활처럼 휘었구나. 멸치의 배가 갈라지고 머리가 떨어진다. 떨어지는 꽃잎마다 멸치 비린내가 난다. 출처 - 「다듬는다」부분, 김광선 시집 『붉은 도마』2012년 실천문학사 멸치를 다듬는다. 머리를 떼어내고 배를 갈라 검은 내장을 끄집어낸다. 멸치에게 비싼 값이 매겨지는 건 결국 몸통이지만 ‘과연 그럴까’ 하는 의구심이 머리를 든다. “필요 없는 부분이라 내 스스로 떼어내고 잠시 잊었던” 봄꽃이 바람에 날리며 무더기로 진다. 그 순간 “아내의 등이 활처럼” 휜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아내도 “지키려 애썼던 부위 슬그머니 등 뒤로 감추”고 사느라 등이 휜 걸까. 우린 뭘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