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의 수사학 /손택수 꽃이 피었다, 도시가 나무에게 반어법을 가르친 것이다 이 도시의 이주민이 된 뒤부터 속마음을 곧이곧대로 드러낸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가를 나도 곧 깨닫게 되었지만 살아있자, 악착같이 들뜬 뿌리라도 내리자 속마음을 감추는 대신 비트는 법을 익히게 된 서른 몇 이후부터 나무는 나의 스승 그가 견딜 수 없는 건 꽃향기 따라 나비와 벌이 붕붕거린다는 것, 내성이 생긴 이파리를 벌레들이 변함없이 아삭아삭 뜯어 먹는다는 것 도로가 시끄러운 가로등 곁에서 허구한 날 신경증과 불면증에 시달리며 피어나는 꽃, 참을 수 없다 나무는, 알고 보면 치욕으로 푸르다 - 손택수 시집, 『나무의 수사학』, 2010, 실천문학사 시인은 나무의 푸르름을 그저 계절의 순환으로만 보지 않는다. 도시의 나무들이 지닌 그들만의 수사(修辭)는 생기(生氣)로 돋는 4월의 새순들에게만 주는 메시지는 더욱 아니다. 도시가 가르쳐 준 반어법의 수사는 뿌리에서부터, 잎과 꽃에 이르기까지 나무의 생존법이 빚어낸 푸르름으로 말해 준다. 누구나 도시인이 되어버린 인생들에게 시인은 제 몸의 수사학을 보여준 나무의 메시지를 대신 전하고 있다. 나무가 뿌리를 곧게 내리지 않고 고통의 뒤틀림이
쓸데없이 /바스코 포파 당신은 쓸데없이 잠을 잤다 그리고 무언가가 된 꿈을 꾸었다 무언가에 불이 붙었다 불꽃들은 그 눈먼 고통 때문에 몸부림쳤다 당신은 쓸데없이 잠에서 깼다 꿈의 불꽃 위에서 당신의 등을 덥혔다 당신은 불꽃의 고통 고통의 그 모든 세계를 보지 못했다 당신의 등은 근시였으므로 불꽃이 꺼졌다 불꽃의 고통은 눈을 되찾았다 그리곤 마찬가지로 기쁨에 겨워 꺼졌다 출처-바스코 포파 시집 <절름발이 늑대에게 경의를> 2006년 문학동네 큰 의미를 부여하며 사는 것이 삶이라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그래도 소중한 나이고 특별한 내 삶인데 허투루 살 수 있겠는가? 그런데 살아보니 어디 그렇던가? 혼자 사는 것이 아닌 공동체의 삶이기에 의미는 상대적일 수도 있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삶이 내 삶에, 아니 내 삶이 다른 사람의 삶에 연동되어 흘러가는 것이다. 그러니 쓸데없이 잠을 자고, 쓸데없이 노래하고, 쓸데없이 사랑하고, 쓸데없이 잠을 깨고, 쓸데없이 꿈도 꾸고, 쓸데없이 지나가는 남자도 흘끔거리는 것이다. 그러면서 ‘눈먼 고통’이 사랑처럼 찾아오고, 기쁨이 되기도 하고, 지독한 슬픔도 된다. 그러므로 삶에 있어 쓸데없는 일이
새 /김수복 저녁을 먹고 어머니의 팔을 껴안고 계단을 내려갔습니다 문을 나서니 어머니의 몸 안에서 새들이 지저귀고 있습니다 저녁노을 속에도 붉게 물든 깃털들이 쏟아져 내렸습니다 시집, 사라진 폭포/ 세계사 시인선/ 2003 시인은 모처럼 늙으신 어머니를 모시고 여행을 갔던 게지요. 민박집에서 저녁을 먹고 어머니 팔을 껴안고 부축하며 계단을 내려서는데 그 기뻐하시는 모습이 몸으로 느껴졌나 봅니다. 말씀은 없으셔도 바라만 봐도 든든하고 대견한 아들이 팔을 껴안고 좋은 곳 구경을 하자는데 얼마나 기쁘셨겠습니까, 어머니의 몸속에서 지저귀는 새소리가 들렸다고 하잖아요. 해 저물도록 홍안으로 번지는 어머니의 미소가 아들은 또 얼마나 기뻤을까요.
까치 /산수(山水) 서춘자 지금까지 전해 준 소식 얼마던가 곰곰이 앉아 생각하는 새 흰 소식 하얗게 울고 검은 소식 까맣게 울어 이제는 한 줌 흑백이 되어버린 새 쌍작보희(雙鵲報喜) 군작보희(群鵲報喜) 버들가지 녹음 속 분주한 적 있었지만 이제는 기쁨도 슬픔도 부질없는 나이 시절 여의어가는 삭정이 찾아 앉아 아침나절 가도록 묵정에 든 새 얼굴 온통 먹물옷 입어 삭정이 도반에게도 성명 감추고 등 돌려 앉아 좌선하는 새 흔히 까치는 우리에게 길조(吉鳥)로 통한다. 기쁜 소식을 전해주는 새로 통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시에 나타난 까치는 사뭇 다르다. 이 시에서 까치는 흰 소식(기쁜 소식)과 검은 소식(슬픈 소식)을 모두 전하는 새다.이 시의 화자는 ‘기쁨도 슬픔도 부질없는 나이’, 인생의 새옹지마를 알 만큼 나이 많은 사람이다. 그리고 어떤 소식에 들떠 하기보다는 좌선할 줄 알 만큼 성숙한 존재이다. 이 시는 ‘쌍작보희(雙鵲報喜) 군작보희(群鵲報喜)’, 동일한 어미인 ‘보희’가 반복되어 시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인생은 돌아볼 때 비로소 보이는 법이다. 사는 동안에는 그 실체를 알 수 없으니, 많
그러니 애인아 /김선우 바람에 출렁이는 밀밭 보면 알 수 있네 한 방향으로 불고 있다고 생각되는 바람이 실은 얼마나 여러 갈래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배가 떠날 때 어떤 이는 수평선을 바라보고 어떤 이는 물을 바라보지 그러니 애인아 울지 말아라 봄처럼 가을꽃도 첫 마음으로 피는 것이니 한 발짝 한 발짝 함부로 딛지나 말아주렴 시집 <내 몸 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문학과 지성 2007> 우리는 얼마나 여러 갈래 마음을 가지고 있을까. 사람들은 스스로에게 물어보지 못할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저녁에 잠들기까지 수많은 갈등 속에서 질문을 생략하기 일쑤다. 일상생활에서 그럴진대 우리들 내면에서는 얼마나 많은 갈등의 싸움이 있을까. 하물며 사랑이라는 이름의 벅찬 무엇이 밀물 썰물처럼 드나들 때 돌아누워 베개를 적셔 본 사람은 알지도 모르겠다. 한 방향으로 부는 바람이 얼마나 여러 갈래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막 흐드러지는 꽃에게도 함부로 말 붙이기 힘든 봄이다.
짝눈 /김승기 세상엔 도다리와 광어 밖에 없더라 아무리 창을 넓게 열어 젖혀도 오로지 두 방향 너무나 섹시하게 얇디얇은 시각 좌측! 우측! 세상은 온통 찢어져 나부끼고 당신은 도다린가? 광어인가? -시와사람 가을호에서 저들이야 세상에는 오로지 도다리와 광어뿐인 줄 알고 있겠으나 어디 그 너른 바다에 도다리와 광어뿐이겠는가. 두 눈 정상적인 어류들이 셀 수도 없이 많다. 좌광우도라고 한다. 비정상적인 눈을 가진 저들이 바다를 온통 지배한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 아닐까. 좌측, 우측으로 삐뚤어져 박혀 일방통행인 눈으로 세상을 얼마나 바로 볼 수 있을까. 좌측이든 우측이든 여지없는 한쪽이다. 저들은 텅 빈 한쪽이 전혀 부끄럽지도 않다. 세상은 굳이 넓게 바라볼 필요가 없다는 족속들인 것이다. 오로지 한쪽만 보고 달려가더라도 충분히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논리라는 것은 만들면 생기는 것이다. 주장하면 옳은 것이 된다. 당신은 광어인가, 도다리인가, 좌인가, 우인가, 가운데 서면 안 되는 것인가.
독수공방 /박병두 내 곁을 떠나시고 붉은 흙으로 차디찬 집을 짓고 독수공방하고 계실 어머니 한 송이 마른 꽃이 되어 떨어지기라도 하고 시들어질 것이나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날들을 캄캄한 어둠 속에 묻어놓고 한 송이 국화와 함께 누워 계실 당신의 이름 어머니 출처- 박병두 시집 『해남 가는 길』2013년 고요아침/열린시학 과부의 삶은 독수공방이라 고독하고 쓸쓸하고 허전하다. 사랑했던 남편이 사무치게 그립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시대가 변해 재혼도 쉽고 타인들과의 활발한 교류로 외로움은 어느 정도 상쇄시키며 산다. 또 가족과 함께 지내는 동안은 죽음도 그렇게 가까이 있지 않다고 생각하며 살지도 모른다. 그래서 남편이나 어머니, 가족의 죽음도 쉽게 잊고 웃음을 회복하며 사는 걸 거다. 나는 왜 그동안 그 생각을 못했을까? 우리 어머니도 무덤에서 오랫동안 독수공방하시며 제대로 흙으로 돌아가지도 못하셨다는 것을. 죽음도 쓸쓸함을 느낀다는 것을. 여기서 시인의 마음씨를 엿볼 수 있는 것이다. 무덤 속 어머니도 썩어가는 허벅지를 바늘로 찔러대며 허전함을 달래고 있을지 모른다는 상상도 첨가해 본다.
빛의 경전 /손병걸 점자책을 펼치니 와르르 쏟아진다 놀란 가슴 쓸어내리며 흩어진 점자를 더듬어 가는데 들려온다, 별들의 이야기 팽팽한 점자처럼 별들도 광활한 우주 속에서 제자리를 지키며 빛나고 있기에 거대한 경전을 읊는 것이라고, 아무도 찾지 않는 어둠 속 비루한 생활의 문을 열고 한 발짝 한 발짝 내딛는 삶이 빛나는 경전을 집필하는 것이라고, 밤새 소곤대는 별들을 따라 걷다보니 짓무른 손가락 끝이 화끈거리고 어깻죽지 목덜미가 뻐근하지만 몸속에 알알이 박힌 별들 탓일까? 창문 너머 별빛 점자를 찍어가는 가파른 새벽 발소리 맨홀 속 은하수, 물소리도 환하다 <출처-손병걸 시집 나는 열 개의 눈동자를 가졌다-2011년 애지> 그는 손가락 끝으로 세상을 읽는다. 지팡이로 톡톡 세상을 두드린다. 소리로써 본다. 소리를 통해서 그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하나씩 열고 들어간다. 이전에는 보였지만 지금은 보이지 않는 세계이다. 손가락 끝으로 ‘점자책을 펼치자’ 별들의 이야기가 와르르 쏟아져 내린다. 별들이 읽는 거대한 우주의 경전을 그도 함께 읽는다. 세상 밖으로 드러난 거대한 환영(幻影)에 가려진 빛나는 경전을, ‘비루한 생&r
서른 다섯 /박경숙 얼마나 꽃다운 나이던가 황홀한 나이던가 흰 치마를 두른 어미의 붉은 울음 가물거리는 희망 세우며 등지고 넘어온 오솔길 얼마나 추웠을까 흔들렸을까 어미 나이에 서서 숨 막히도록 가슴 에이는 일이다 박경숙 시인은 전남 영광출생이다. 한신대에서 시를 전공하였고, 시집 『비금도의 하루』를 출간하면서 문단에 나왔다.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사무국장을 맡고 있는 시인은 남도의 맛과 따스한 사람냄새가 그에게서 짙게 배어난다. 여자는 두 번 태어난다. 한 번은 친정에서 딸로 태어나는 것이고, 또 한 번은 결혼해서 엄마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여자는 엄마가 될 때 가장 아름답다. 새로운 생명을 낳고 그 생명을 아름답게 가꿀 수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이 시는 여자 나이 서른다섯이 이팔청춘 나이보다 꽃답고 황홀하다고 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엄마로 살아간다는 것은 녹록치 않은 일이다. 엄마로 살아가는 동안 ‘숨 막히도록 가슴 에이는’ 고통도 따르기 때문이다. 5월은 가정의 달이다. 어머니에 대한 사무친 그리움과 회한…. 대천에서 불어오는 시인의 외로운 바람이 한 차례 지나간다. /박병두 시인
나를 오른다 /최영규 매일같이 내 속에는 자꾸 山이 생긴다 오르고 싶다고 생각만 하면 금세 山이 또 하나 쑥 솟아오른다 내 안은 그런 山으로 꽉 차 있다 갈곳산, 육백산, 깃대배기봉, 만월산, 운수봉… 그래서 내 안은 비좁다 비좁아져 버린 나를 위해 山을 오른다 나를 오른다 간간이 붙어 있는 표식기를 찾아가며 나의 복숭아뼈에서 터져 나갈 것 같은 장딴지를 거쳐 무릎뼈로 무릎뼈에서 허벅지를 지나 허리로 그리고 어렵게 등뼈를 타고 올라 나의 영혼에까지 더 높고 거친 나를 찾아 오른다 기진맥진 나를 오르고 나면 내 안의 山들은 하나씩 둘씩 작아지며 무너져 버린다 이제 나는 오르고 싶다는 생각을 지울 수 있다 나를 비울 수 있다 부의라는 따뜻한 시로 우리의 사랑을 받고 있는 시인이다. 시인의 집은 양평 덕항산 부근에 있다. 그도 세계의 고산을 장복하고자 하는 생각으로 히말라야니 고산 영봉 곁으로 무수히 다가갔던 시인이다. 오른다는 것은 곧 내려간다는 것이고 내리고 오르든 간에 자신의 무게를 줄여야 물리적이든 정신적이든 자신이 꿈꾸는 지점에 비박의 텐트나 캠프를 설치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시인이 자신 안의 산을 다 등정했다고 하는 순간 또 하나의 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