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양 /김충규 거대한 군불을 쬐려고 젖은 새들이 날아간다 아랫도리가 축축한 나무들은 이미 그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매운 연기 한 줌 피어오르지 않는 맑은 군불, 새들은 세상을 떠돌다 날개에 묻혀온 그을음을 탁탁 털어내고 날아간다 깨끗한 몸으로 쬐어야 하는 맑은 군불, 어떤 거대한 흰 혀가 몰래 천국의 밑바닥을 쓱 핥아와 그것을 연료로 지피는 듯한 맑은 군불, 숨 막힐 듯 조여 오는 어둠을 간신히 밀쳐내고 있는 맑은 군불, 그곳으로 가서 새들은 제 탁한 눈알을 소독하고 눈 밝아져 아득한 허공을 질주하면서도 세상 훤히 내려다보는 힘을 얻는다 출처- 『아무 망설임 없이』 / 문학의 전당 2010년 붉게 물든 석양을 군불로 본 시인의 상상력이 재미있다. 지친 것들을 잠시 불러들이는 군불, 젖은 것들을 말려 주는 군불, 어머니 같은 군불, 강물 같은 군불, 사랑방 같은 군불, 탁한 눈알을 소독하고 다시 힘을 충전하는 생성의 시간이다. 공원을 돌던 여자도 강아지도 군불을 바라보고 정면으로 서서 서쪽 하늘을 오래 응시한다. 그러면서도 몇 발짝 자리를 내어주며 손짓하는 열려 있는 시간이다. /박홍점 시인
자장면 /박경희 그대와 헤어지고 걸었던 정읍역 터진 가슴 단풍나무에 걸어놓고 세워둔 자전거 헛바퀴 돌 듯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울었다 전선 위, 우두커니 하늘바라기 하는 비둘기 날아와 쿡, 쿡 흐트러진 물웅덩이 속으로 들어간 그대, 그림자만 흔들렸다 자전거 바퀴살에 갈라지는 햇살을 울먹이는 손으로 자르다가 바라본 수타 자장면 퉁퉁 부은 가로등 밝히며 울고 있는 자장면을 먹었다 이별하고 함께할 수 없을 것 같았던 배고픔이 뚝뚝, 불빛으로 흔들렸다 그대와 걸었던 발자국이 번져 단풍잎으로 남은 곳에서 출처 - 박경희 시집 『벚꽃 문신』- 2012년 실천문학사 어느 소설가의 수필에서 본 기억이 있는 이야기다. 남편과 자식을 거의 동시에 잃고 자신에게 이런 시련과 고통을 주신 신의 의도가 무엇인지 간절히 구하던 중에 응답처럼 배고픔이 찾아왔다. 그렇게 어느덧 찾아드는 배고픔이 신의 뜻이었다고. 그런데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과 고통 속에서 만난 “수타 자장면”이라니. 이 시를 읽으면 인생의 굽이마다 자장면과 함께 했던 개인의 역사가 애달프면서도 해학적으로 눈앞에 펼쳐진다.
수수꽃다리 /서정춘 자기 몸의 암향을 아꼈다가 조금 꽃 벌에 들켜버린 사춘기들아 저년들 생살에 벌을 쏘이면 시집 빨리 간댔더니 왁자지껄 사라지는 여동생들아 서정춘 시집 <물방울은 즐겁다/시작시인선 2010> 서양사람들은 미스김 라일락이라고 부른다지. 영하 십 몇 도를 오르내리는 나날 오월 그 밝은 햇살이 그리워 이름을 불러본다. 수수꽃다리, 그러면 그 암향이 자욱하게 밀려오는 것이다. 까르르 까르르 웃어대며 재잘대며 골목을 온통 점령하고 몰려온다. 나는 눈을 감고 진한 향내를 맡으며 수수꽃다리 그늘 아래를 생각하는 것이다. 주름 자글자글한 노시인이 지그시 웃음 짓는 모습도 떠올리면서
껌을 씹는 동안에 /박홍점 아귀가 아프도록 껌을 씹는다 차창 밖 풍경들이 휙휙 지나간다 꽤나 심각했던 울음이 휙휙 지나간다 늙은 어머니가 불구의 오빠가 질겅질겅 씹힌다 다 알고 있다고 말없이 나를 씹었던 그를 질겅질겅 씹는다 씹어도 씹어도 뼈와 살이 되지 않는 것 나는 쉽게 씹는 일을 멈출 수 없고 생각 없이 의자에 앉아 껌을 씹고 있을 때 중환자실 아버지는 저 세상으로 가고 어린 아들은 똥통에 빠져 허우적거린다 자면서도 걸으면서도 말하면서도 씹을 수 있는 껌 아무 곳에서나 입을 벌리는 단단하지 못한 나의 눈물이 말랑말랑한 내가 다 읽지 못한 페이지들이 부담 없이 넘어가고 이 악물었던 시간이 간단없이 씹히고 살아온 날들을 살아갈 날들이 꼭꼭 씹힌다 그러는 사이 누군가 또 나를 씹는 걸까 귀가 가렵다 시인의 걸어온 숨은 내공들을 읽어내기란 고뇌다. 세월의 강을 건너고 생활 속 현실에서 잠시 멈추지 않고 걸어온 새벽 같은 아픔은 어디에 두었을까. 한 해 고비를 넘기고 다시 세상과 싸우면서 사랑하는 가족의 역사가 여기 파노라마처럼 지나가고 있다. 슬픔도 참기 어려운 일들을 밤낮으로 윤회하는 시간들의 장막에 깊은 고요와 손을 잡고, 탄식한 새벽을 맞이하면서 아무도…
비상을 꿈꾸는 누에섬 /안희두 안산시 누에섬은 뽕잎 바다를 다 먹었나 고치를 짓고 하늘을 날고 싶은가 하늘에 비단을 펼쳐놓고 하루에 두 번 팔을 내뻗으며 육지로 점점 기어가려다 바다에 풍덩 뽕잎에 풍덩 부처님 손바닥에서 재롱을 떤다 안희두 시인이 수원문협회장으로 출발했다. 학교장으로 버거운 삶을 지역문인들을 위해 수고하게 됐다. 축하한다. 시화방조제가 생기면서 안산 누에섬은 섬 아닌 섬이 되었다. 이 섬은 배를 타지 않고도 갈 수 있다. 이 섬에서는 하루에 두 번 모세의 기적이 일어나 육지에서 누에섬까지 걸어갈 수 있다. 그리고 이 섬에는 밤바다를 달리는 배들의 길을 밝혀주는 등대가 있다. 산업화로 인해 섬 아닌 섬이 되어버린 안산 누에섬, 누에섬으로 향하는 갈라진 바닷길 위에 서면 과연 이곳이 바다인지 육지인지 구분이 안 된다. 그래서일까? 이 시에서는 ‘안산시 누에섬은 뽕잎 바다를 다 먹었나’라고 하며 사라진 바다를 회상한다. 시적 화자는 ‘고치를 짓고 하늘을 날고 싶은가’라고 하며 누에섬이 땅과 하나가 되고 더 나아가 비상하려 한다고 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자연의 섭리를 저버리는 법, 누에섬은 &lsquo
오십 세 /맹문재 부치려고 하는데 손 안에 없다 집에 두고 왔는가? 길에 흘렸는가? 돌아가며 찾아보지만 어디에도 없다 안타까워 다시 쓰려는데 바람이 손을 잡는다 -맹문재 시집 <사과를 내밀다>에서 반백의 나이가 되면 꿈보다는 포기가 많다. 꿈은 청춘의 것이고, 그에 필요한 시간과 에너지가 있는 사람들의 것이다. 그러니까 시간도 상대적으로 많이 남지 않고, 에너지도 고갈되거나 고갈되기 전의 상태라면, 새로운 도전과 시도보다는 남은 에너지를 적절히 오랫동안 사용하기 위한 자세를 취하게 마련이다. 그래서 좀 싱거워질 수 있다. 시인은 어떤 편지를 부치려 했을까. 그 나이에 연서는 아니었을 것이다. 연서라도 상관은 없다. 누군가에게 무언가 해주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꼭 이 말만은 해주고 싶어서 편지를 썼던 것인데, 그걸 오는 길에 빠트린 것이다. 다시 쓰려니 부질없어 보인다. 인생은 물처럼 흐르는 것, 흐르는 대로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 진정한 관심이고 애정이 아닐까 생각하는 것이다.
저녁눈 /박용래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말집 호롱불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조랑말 발굽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여물 써는 소리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변두리 빈터만 다니며 붐비다. 출처-박용래 시집 먼 바다-1984년 창작과비평사 눈물의 시인 박용래(1925~1980). 그는 자신만의 독특한 미적 세계를 드물게 개척한 시인이다. 그의 시는 간결하고 담백한 묘사로 단순한 형식미를 보여주고 있지만, 그 안에는 동양적 여백미와 서구 모더니즘 기법이 녹아있다. 「저녁 눈」은 전체가 4행으로, 한 행이 하나의 연으로 구성된 짧은 시다. 모든 연마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붐비다”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시인은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을 시각적인 배경으로 삼으면서, 말집의 호롱불과 조랑말 발굽에 눈발이 “붐빈다”고 했다. 더 나아가 “여물 써는 소리”에도 눈발이 “붐빈다”는 묘사를 얻고 있다. 이렇게 “눈발은~붐비다”의 반복적 사용은 말집에서 변두리 빈터로 확장되다가, 다시 말집의 소박한 풍경으로
목련 /우대식 목련이 날렵하고 부드러운 새를 물고 있다 딱딱한 자신의 몸에서 지상을 향해 희디흰 천 마리 새를 내뿜으려고 호흡을 가다듬는 중이다 숨소리가 들린다 흰 빛깔에 알맞은 햇살 한 줌이면 지상은 온통 새들의 세상이다 새는 사람의 마음을 물고 높이, 멀리 날아간다 비가 오기 전까지 출처 - 우대식 시집 『설산국경』- 2013년 중앙북스 바야흐로 봄이다. 봄꽃나무 아래에 서면 마음이 환해지는 까닭이 무엇인가 했더니 “날렵하고 부드러운 새”를 물고 있기 때문이었구나. 흰 목련은 시심을 동하게 하는 마력이 있는 것 같다. 어떤 시인은 삼베옷을, 또 어떤 이는 어머니를, 사랑하는 이를 떠올리며 시를 썼는데 우대식 시인은 “새는 사람의 마음을 물고” 날아간다고 노래한다. 새가 날아가는 동안 지상의 나날은 견딜 만하다. 새를 내뿜을 때 나무는 상상을 초월하는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일생의 에너지를 끌어 모은다고 한다.
늪에서 빠져나오다 /김훈동 세월의 더께 겹겹이 쌓인 얼굴 겨우내 닫힌 창문 열고 털고 날아가야 할 비바람에도 굽히지 않는 뜸직한 삶이여, 해묵은 응어리 무너져 내린 늪 언저리마다 숱한 이야기 박혀 있고 담대히 인내하고 시작하는 새 삶이여 처음 품은 꿈과 결심 같던 세상사 끌어안고 일탈이 두려워 여밀 틈도 주지 않고 순리를 따르는 삶이여 삶이 무거울 땐 깊은 늪에 빠져 보아라 알몸으로 섰어도 뜨거운 가슴 보듬으며 허물어진 삶 살아 있는 감동으로 함성이듯 다시 일으켜 세우는 삶이여 인생의 의미를 깨닫게 하는 이 시는 수원예총 회장 김훈동 시인의 작품이다. 필자의 고향 해남인 시골집을 부부동반으로 다녀올 때가 있었다. 참신한 기획력, 또 넉넉한 지성, 수원의 큰 인물인데 늘 아쉽다. 모든 꽃이 시들고, 청춘이 나이에 굴복하듯이 삶의 모든 과정과 지혜와 미덕도 제때 피었다 지는 꽃처럼 영원하지 않다. 이는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자연의 섭리다. 하지만 물리적으로 나이가 들더라도 항상 새롭게 꿈꾸려 한다면 우리의 영혼에 젊음을 가져온다. 그래서 이 시의 화자는 ‘담대히 인내하고 시작하는 새 삶이여’라고 말한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등산하는 것과
삼월의 눈발처럼 /전서은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이 혼자 하는 외출 같았으면 좋겠다 저 혼자 피었다 지는 꽃처럼 슬쩍 앉았다 가는 삼월의 눈발처럼 창 밖에 내리는 저녁 빗소리 가만가만 불러내면 헐거워진 삽짝 밀어내듯 아무도 모르게 외출하고 싶다 빗방울 길게 누운 낯선 길에 튀다가 그리운 우산 속으로 얼굴을 들이밀면 못 이기는 척 그의 지친 어깨에 손을 얹고 싶다 취기 어린 선술집 붉은 등 아래 반쯤 남은 술잔에 눈을 맞추며 사랑한다는 말은 내리는 빗소리에 묻어둔 채 돌아와 누운 한잔 술의 고단함에 새순에 얹힌 봄눈처럼 자취도 없이 녹아내리고 싶다 격렬하거나 화사하지 않아도 아름다운 사랑이 있다. 소월(素月)의 산유화처럼 호젓이 “저 혼자 피었다 지는” 그런 꽃 같은 사랑이 있다. 저녁 빗소리 불러내고 “사랑한다는 말은/ 내리는 빗소리에 묻어둔” 고즈넉한 사랑이 있다. “슬쩍 앉았다 가는 삼월의 눈발처럼” 애탐을 초월하여 “자취도 없이 녹아내리고 싶은” 그런 사랑이 있다. 홀로의 사랑이 그리 쓸쓸하지만은 않다. 나도 나이가 들었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