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역국 끓는 소리 /문성해 방에 누워 부엌에서 미역국 끓는 소리를 듣는다 비릿한 미역줄기들이 커튼처럼 우리 집 창틀에 매달리는 걸 본다 그 속에 미역줄기 같은 머리를 감고 죽은 앵두집 아이도 보인다 그 아이의 심하게 접힌 다리가 이상하게도 펴져 있었다 저수지에 빠져 죽은 그 아이 그곳에선 앉은뱅이 다리가 쉽게 풀리더라고 부러진 의자들도 수초처럼 물결에 흔들리며 서 있다고 그곳에선 모든 것이 펄펄 끓는 춤이더라고 방안에서 듣는 미역국 끓는 소리는 다급하게 누군가 우리 집 지붕을 열려고 들썩거리는 소리 같다 장롱 속 이불들이 들썩거리고 옷장 속 개어진 옷들이 천천히 일어서고 저수지 아래 가라앉은 내 노래가 서서히 비등점을 향해 끓어오를 때 출처-시집 자라/2005년 창비 누군가 세상에 첫 울음 소리를 들여놓은 날을 기억하기 위해 미역국 끓이는 아침. 시인은 기억 속의 ‘저수지’로 걸음을 옮긴다. 그곳에는 어떤 비밀들이 있어서 모든 것을 풀어놓는지…. 아이의 심하게 접힌 다리가 풀리고, 부러진 의자들도 흔들리며 서 있다. 미역국을 끓이는 시인의 방안은 갑자기 들썩거리고 장롱 속의 이불과 옷들이 천천히 일어선다. 오래된 미역줄기처럼
겨울 북천 /임동확 더 이상 거슬러 가지 못해 밑으로만 뻗어가는 강바닥 알고 보면 모두들 낱낱일 뿐인 모래알들이, 자갈들이, 갈대들이 별다른 회의도 없이 저마다 군락群落을 이룬 채 뒤엉켜 있다 그렇게 집단적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얼어붙은 겨울 북천 몸통 잘려나간 채 머리만 남은 명태들이 겨우내 말라가고, 방한防寒의 옷가지라곤 날카론 촉수의 가시뿐인 호랑가시나무 한그루 오래 춥고 굶주릴수록 더욱 사나운 야성野性의 한겨울을 홀로 견디고 있다 -시집 「태초에 사랑이 있었다」 /솔 압록강 지류의 북천인지 경북 경주 토함산을 발원으로 하는 북천인지 알 수 없으나 형산강으로 흘러드는 경북의 북천은 우기 외에는 물이 흐르지 않는 하천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 이유로 겨울 북천은 메말라 있을 것이다. 북천으로 모여든 모든 것들도 덩달아 메말라있을 것이다. 푸른 잎 무성했던 나무가 여름내 걸쳤던 잎들을 서서히 버리듯이 수분을 버리는 일은 저마다 한겨울 야성의 추위를 꼿꼿이 견디는 방식이다. ‘몸통 잘려나간 명태들’도 ‘가시뿐인 호랑가시나무 한그루’도 수분을 몸에서 다 빼내는 방식으로 한때를 견뎌내고 있다. ‘알고 보면 모
거 /최영철 용서해다오 내가 그랬던 거 그때 막 갔던 거 짓밟은 거 그냥 돌아서 온 거 말 못한 거 차버린 거 못 가진 거 못 가진 줄 알았는데 다 가진 거 그러고도 자꾸 서러워 울었던 거 잘 가라 말하지 못했던 거 돌멩이만 걷어찬 거 하늘만 바라본 거 못 다 한 거 그러고도 미안하다 말 못한 거 먼 산만 바라본 거 주머니는 텅 비었지만 속은 그득했던 거 그러면서도 자꾸 아프다 말한 거 너의 아우성을 말없이 넘어온 거 숨어 돌아서서 눈물만 흘린 거 너 없어도 이리 잘 살고 있는 거 딱 거기까지만 살겠다고 맹세한 거 무수한 약속의 촛불을 켰던 거 돌아오며 다 꺼버린 거 이 거친 회환을 어느새 용서해 버린 거 다 옳다 괜찮다 해버린 거 이제 눈물도 참회도 말라버린 거 너를 두고 나 혼자 저 먼 바다로 내빼는 거 거거 거거 더듬더듬 우물우물 말꼬리를 흐린 거 출처 -『불교문예』 2011 겨울호 살다 보면 용서해달란 말 한 마디 제대로 못 하고 떠나보낸 인연들이 얼마나 많은가. 특히 가슴을 치는 부분이 “못 가진 줄 알았는데 다 가진 거” “무수한 약속의 촛불을 켰던 거 돌아오며 다 꺼버린 거” 그럼에도 “이 거
雪國 /박정석 요소비료 같은 싸락눈 내리고 다랑이 마을이 바빠졌다 하늘 방석인 저수지 위 얼음 썰매 작파하고 나는, 비료 포대 깔고 동산에 올라 눈썰매 탔다 저 눈 녹을 때 세상의 비탈 보이고 키는 크는 거고 봄눈 틔어 오르는 새벽, 물방울 졸졸 미끄럼 탈 것이다 삼일간의 고립, 휴교령은 황급히 날아왔지만 마을은 농한기처럼 느긋한 돼지를 잡아 잔치를 벌였다 붉은 화투장 만치 아름다운 꽃, 엄동설원에 있겠는가 밤을 새워 꽃을 파는 골이 깊은 청년을 싸락싸락 북 주듯 다독여주는 눈발의 걸음 사이 바쁜 밑줄 긋느라 대나무 빗자루가 짧아졌다 터널 같은 굴뚝 빠져나와 하늘로 불려가는 연기의 동선은 길었다 사람들은 작아진 키로, 밤이 긴 마을로만 맴돌고 깨어나면 모두 눈의 나라였다 가끔씩 다 닳은 포대 걸친 영혼이 北國 하늘에 걸리기도 했다 - 서정시학(2006) 겨울호 중에서 어릴 적 살던 동네엔 묵을 파는 화툿방이 있었다. 길이 넘게 눈이 쌓이면 마을 남자들은 밤새워 묵 내기 화투를 쳤다. 삼팔 광땡이나 비 조리, 청단, 홍단 같은 화투패의 이름들을 그때 처음 알았다. 낮에는 동네 허드렛일을 맡아 하는 키가 작아 꼬마 이 서방이라 불리는 종국아버지를 시켜 돼지를 잡
어떤 시절 /김보숙 지붕 위로 던져진 유년의 치아가 궁금한 밤이다. 실에 묶인 송곳니는 어느 집 지붕 위에 심어졌을까. 빠진 이 사이로 혀를 밀어 넣으면 놀이가 되던 저녁, 은퇴한 구름 주위로 몰려오는 별자리의 이름들은 나의 첫 비문이 되었다. 유산을 하고 돌아온 어머니는 시차를 잃고 어지러워했다. 한 여름, 밍크담요 속으로 들어간 어머니의 발을 따뜻한 물로 닦아주면 먼 시차 속에서 나를 바라보던 눈. 아가야, 아가는 별이 되었단다. 입 안에 고인 물방울은 아무리 삼키려 해도 넘어가지 않았다. 그날 오빠의 일기장에는 ‘달이 빨간데’가 적혀 있었다. 하지만, 나는 달이 이빨을 가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리토피아 겨울호 중에서 요즘이야 아이를 하나나 둘 낳고 만다. 아예 아이를 갖지 않는 사람들도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예전엔 장성한 맏이가 늦은 막내를 기르다시피 하는 일도 많았다. 한 집안에 아이가 여섯, 일곱, 열까지 이르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어머니가 유산하고 돌아온 날 일기장에 빨간 달이라고 적은 슬픈 오빠의 문장을 이빨 간다로 오독한 누이의 천진한 세계가 그럴 듯해 보인다. 새 이빨이 돋아나는 시기, 이갈이 시기는 다음의 사
오랜동거 /김주대 눈이 너의 따스한 피부를 만진다 눈을 통해 너의 까슬까슬한 슬픔과 아득한 넓이를 감각한다 너를 본 감각들은 고스란히 몸에 쌓여 몸이 움직일 때마다 달그락거리기도 하고 출렁거리기도 한다 너를 생각한다는 것은 내가 길을 걸을 때 몸 안의 네가 소리를 내며 흔들린다는 것이다 너는 어쩔 수 없이 눈으로 들어와 갈데없이 내가 된 감각습관화된 나다 이것은 집착이 아니라 몸이 이룩한 사실이다 너는 사라질 수도 떠날 수도 없다 - 시집 <그리움의 넓이> 중에서 ‘본다’는 것은 결국 ‘전부’일 수 있다. ‘눈’은 우리에게 모든 것의 시작이다. 눈은 모습만 보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눈을 통해 감각도 느낀다. 눈을 통해 마음도 읽는다. 눈을 통해 세상의 모든 것을 바라보고, 동시에 반응을 시작한다. 눈은 순식간에 우리들의 입이 되기도 하고, 귀가 되기도 하고, 코가 되기도 하고, 피부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한 번 들어온 것은 쉽게 나가지 못한다. 특히 감동적인 것은 몸 안에서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본능적인 생명활동을 벌이기 시작한다. 종내는 화산처럼 타오르는 에너지를 만들어낸다. 그
1968년 오늘 소련의 초음속 여객기 TU-144기의 초도비행이 실시됐다. 소련의 비행기설계가 투폴레프가 폭격기 설계 경험을 살려 만들어낸 여객기다. TU-144기는 1968년 시험비행에 이어 1970년 11월 마하 2.0을 기록했지만 1973년 6월 파리항공쇼에서 추락사고를 일으켰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10대 종정인 혜암(慧菴) 스님이 2001년 오늘 오전 경남 합천 해인사 원당암 미소굴에서 입적했다. 법랍 55세, 세수 82세를 일기로 열반한 혜암 스님은 성철 스님 열반 후 불교계의 정신적 지주였다. 94년과 98년 조계종 분규 때는 단호한 소신과 추상 같은 의지로 종단개혁에 앞장섰다.
‘뱅갈전쟁’이라고도 불리는 ‘제3차 인도-파기스탄 전쟁’의 참상을 담은 필름이 1971년 오늘 공개됐다. 동파키스탄의 독립 문제로 일어난 이 전쟁이 끝난 지 열닷새 만이다. 종군기자가 촬영한 이 필름에 인도의 폭격기가 동파키스탄의 다카시에 무차별 폭탄을 퍼붓는 모습이 녹화됐다.
지리멸렬 /허연 늦겨울 짚 더미에 불이 붙는다. 알맹이 다 털어내고 껍데기만 남은 것들은 타닥타닥 뼈 소리를 내며 재가 되고. 겨울은 그렇게 물끄러미 먼지가 된다. 그을린 소주병 몇 개와 육포 몇 조각이 누군가가 방금 전 시키지도 않은 자기 변론을 했음을 알려준다. 짚불 앞에서 느끼는 거지만 인생에는 지리멸렬한 요소가 있다. 깔끔하게 털지 못하는 그 무엇, 질척거리는 헛소리 같은 게 있다. 가늘고 긴 인생들에게 불꽃 몇 개가 날아든다. 찬 하늘에선 눈이 내렸다. 헛소리가 다시 시작된다. - 시집 『내가 원하는 천사』 / 2012년 문학과 지성사 삼 일째 폭설이다. 온통 헝클어진 삶을 새 판으로 다시 짜보라고 말하는 듯 연신 눈 내린다. 과연 어디서부터 어떻게 다시 시작해야 할까? 언제나 타이밍을 놓치고 후회만 되풀이되는 지리멸렬 위에 눈 내린다. 세상이 온통 흰 백지의 시간이다. 한 해가 저물어간다. 비닐봉지를 들고 기우뚱 기우뚱 걷는 저녁, 자꾸 열린 가슴 위로 눈송이들이 들이친다. 입안에서 터지고 마는 말짱 도루묵의 알처럼 타닥타닥 헛소리가 내린다. 둘러보니 온통 지리멸렬이다. /박홍점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