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침묵, 똥 고개 도시로 몰려든 문명의 이기를 생각하면 도시는 채우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 수도승처럼 비우고 또 비우는 것이다. 눈 돌려 보면 다 자연이라 하겠지만 자신의 원형을 발견할 수 있는 곳이 진짜 자연으로 오아시스 같은 곳, 비록 태어나지는 않았으나 전생의 인연처럼 뿌리내리고 이날 이때까지 살고있는 사람들에게 고향 같은 맛을 즐길 수 있는 곳은 도시의 속살을 사생한 고향이나 다름없다. 사도(思道)에서 사도(邪道)를 걷지 않으며 느릿느릿 흐르는 서정적 도취를 음미하며 이드거니 읽고 또 보며 걷는 길은 유년의 기억과 결속한 삶의 궤적이 담겨있는가 하면 도시와 자신의 생과 역사가 숨쉬고 있는 것이다. 작은 어촌에 불과했던 인천항이(만석과 화수부두 포함) 본격적으로 개항돼 인천의 중심지 기능을 수행하게 된 것은 1883년 개항 이후다. 개항으로 쇠문처럼 닫아건 정책이 무너지고 무역으로 이익을 챙기고자 서구열강들이 조선에 발을 담그고 각축전을 벌였다. 인천은 개항 이후 서울로 가는 가장 빠른 지척의 도시로 행정의 중심 통이자 외국 문화유입이 급속으로 확산된 도시로 변해버렸다. 외국인 전용 거주지가 조성돼 일본인, 중국인, 서양인(각국 조계)들은 땅 차
▲오전 9시30분 (리마인드 현장점검) 송도/ 송도 [ 경기신문 / 인천 = 이인수 기자 ]
▲ 오후 4시 영상메시지 촬영/ 시청 접견실 ▲ 오후 7시 청년네트워크 인천청년정책 제안보고회/ 인천스타트업파크 [ 경기신문 / 인천 = 이인수 기자 ]
▲ 오전 8시 공직자 아카데미/ 온라인 ▲ 오전 10시30분 정책현안회의/ 시청 영상회의실 ▲ 오후 2시 사회적비용 절감을 위한 데이타 공동활용 업무협약/ 시청 대접견실 [ 경기신문 / 인천 = 이인수 기자 ]
▲ 오후 2시 인천여성가족재단 내 시설 개관식/ 인천여성가족재단 ▲ 오후 3시30분 2021 대한민국 동행세일 개막식 영상촬영/ 미트스튜디오 ▲ 오후 5시 6월 시장.군수.구청장 정책회의/ 시청 공감회의실 [ 경기신문 / 인천 = 이인수 기자 ]
▲ 오전 11시 공사공단 간담회/ 인천연구원 ▲ 오후 3시 굴포천 생태하천복원사업 착공식/ 부평동행정복지센터 앞 ▲ 오후 4시40분 한국자유총연맹 인천지부 평화통일사진전 라운딩/ 집무실
팔미도는 인천연안부두에서 남서쪽으로 약 15km 떨어진 섬으로, ‘팔미’란 남쪽의 대팔미도와 북쪽의 소팔미가 육계사주로 연결돼 상공에서 보았을 때 그 모양이 여덟 팔(八)자의 뻗어 내린 꼬리처럼 보여 붙어진 이름이다. 비록 작은 섬이지만 남서쪽 해상에서 인천으로 들어오는 길목에 위치, 인천항 개항 이후 해상교통의 중심적인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로 팔미도에 설치된 등대는 구한말 인천항을 드나드는 일본 배들이 암초에 부딪히는 사고가 빈번해지자 일본이 조선에 주요 항로와 항만의 수로 측량을 강권하는 과정에서 1903년에 만들어졌다. 몇 년 전 세간의 주목을 받았던 영화 ‘인천상륙작전’의 촬영지로 알려진 팔미도는 1950년 9월14일 인천상륙작전을 앞두고 맥아더 사령관의 작전 명령을 받은 해군 특수부대원들이 격전 끝에 점령, 팔미도등대에 불을 밝혀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게 함으로써 한국전쟁의 전환점을 마련한 곳이기도 하다. 팔미도 유람선 선착장이 있는 인천연안부두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 광장’이 조성돼 있다. 이곳에는 러·일전쟁 당시 ‘바랴크'함 등 러시아 함정 2척에 타고 있던 해군장병 추모조형물과 러시아를 상징하는 대형 마트료시카 인형이 설
▲ 오전 11시 관내 정수장 현장점검/ 부평정수장 외 [ 경기신문 / 인천 = 이인수 기자 ]
▲ 오전 10시 리마인드 현장점검(영종)/ 씨사이드파크 외 ▲ 오후 2시 XR메타버스 인천이음 프로젝트 업무협약/ 시청 공감회의실 [ 경기신문 / 인천 = 이인수 기자 ]
배롱나무, 꽃의 기억 자연을 예찬하는 시가(詩歌)를 뜻하는 강호가도(江湖歌道)의 선구자라면 전라도 담양이 낳은 ‘송순’이 아닐까 생각한다. 누정(누각과 정자)과 원림이 있고 수려한 산수가 있어 그런지는 몰라도 그곳은 이맘 때 배롱나무꽃이 빨갛게 피다 못해 붉은 물감을 엎질러 놓은 듯 붉게 타오르고 있다. 배롱꽃은 100일을 핀다 해서 ‘백일홍’이라고도 불렀고 배 곯던 민초들이 그 꽃이 지면 쌀밥을 먹을 수 있다 하여 ‘쌀 나무’라고도 불렸었다. 하니 가을이 와도 좀처럼 꽃이 지지 않는 배롱나무는 미움의 나무이기도 했다. 세 번씩 새순이 돋아 또 꽃을 피우니 미움이 없을 수 없었다. 을사사화 때 추풍낙엽처럼 목이 떨어지던 올곧은 선비들을 기리며 지은 송순의 ‘석춘가’ 한 대목을 읊어보면 “꽃이 진다고 슬퍼 마라 / 바람이 날리니 꽃의 탓이 아니로다.” 배롱꽃을 보며 읊었던 것으로 예로부터 선비들이 정자나 서원에 또는 집터에 배롱나무를 한두 그루쯤 심어 의미를 찾고자 했던 것이다. 붉은 꽃은 화를 물리치고 척화(斥禍)의 뜻을 담고 있으며 불붙듯 피어나는 모습에서 학문(예술)의 번성을 기원했던 의미, 그래서 배롱나무는 ‘선비 나무’이기도 했었다. 한 개의 사물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