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한(雪寒) /최서림 살강에 쥐똥이 얼어붙었다 불씨가 사위어가는 작은 마을들 폭설에 눌려 집들이 나지막하다 지도에 점 하나 찍지 못하는 마을처럼 남겨진 노인들 마음의 곳간부터 텅, 텅, 비어 있다 텅 빈 쌀부대처럼 버석거리는 몸들, 까마귀같이 삼삼오오 경로당에 모여들어 점 십의 민화투를 치다 다툰다 카시미롱 이불 속에 언 발을 묻으며 죽어서도 돌아오지 않을 목화의 꿈을 그리고 있다 목화를 따 먹으면 목화처럼 환하게 피어나던, 그림을 그리면 개도 고양이도 사람도 집도 목화솜같이 붕붕 떠다니던, 그림자도 없이 원근법도 없이 지금도 우리 부엌에 ‘살강’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거기 쥐똥이 얼어붙을 정도로 추운 겨울날이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눈이 많이 내린 다음 날입니다. 마을이 고립되었듯이 인생도 비어 버린 것처럼 한 구석에 쓸쓸합니다. 오직 머리 쇤 노인들만이 모여 앉아 살을 에는 추위를 꿈처럼 맞고 있습니다. 여름 날 살강에 얹은 사발들은 뽀득뽀득 물기 가셔 빛이 났건만 겨울 눈 속 찬바람에 손바닥 쩍쩍 달라붙는 세월이 야속합니다. 눈이 내리는 날은 온 세상을 덮어 자못 따뜻하였는데, 그래서 미당 서정주가 눈 내리는 소리를 &lsquo
민담3 /류근삼 시골 버스 삼백리 길 덜커덩거리며 과장으로 승진한 아들네 집에 쌀 한 가마 입석버스에 실었것다 읍내 근처만 와도 사람 북적거린다 뚱뚱한 할매 울 엄마 닮은 할매 커다란 엉덩이 쌀가마 위에 자리 삼아 앉았것다 〈이눔우 할미 좀 보소 울 아들 과장님 먹을 쌀가마이 우에 여자 엉덩이 얹노? 더럽구로!〉하며 펄쩍 하였것다 〈아따 별난 할망구 보고 좀 앉으마 어떠노 차도 비잡은데… 내 궁딩이는 과장 서이 낳은 궁딩이다.〉 버스 안이 와그르르 한바탕 하 하 하 … 사람 사는 재미가 이런 것이렸것다 -국어시간에 시 읽기〈전국국어교사모임 엮음/나라말〉 사람 사는 재미가 자꾸만 없어져 가고 웃을 일도 차츰 줄어든다. 친구들끼리 모여도 말없이 술잔만 기울이거나 한숨이 오간다. 아파트 한 채 달랑 있는 것도 빚잔치 하고 나면 남는 게 없다느니 이러다 아프기라도 하면 속수무책으로 가야한다느니 별 좋은 이야기가 도통 들리지 않는 세월이다. 사람냄새가 몹시 그립다. 어디 시골 5일장에라도 훌쩍 다녀와야 할까 보다. /조길성 시인
경포식당 /정미소 경포식당 주전자에서는 비둘기호 기차소리가 난다 첫차가 떠날 시각을 알리는 주전자가 뿌우, 화력을 뿜어올린다 서둘러 개찰구를 빠져나가는 시야에 그가 들어선다 달뜬 마음이 주전자의 뚜겅을 연다 첫 새벽의 플랫폼이 실어다 준 바다가 끓는다 불면이 끓는다 암흑의 동굴을 달리며, 레일을 교차하며, 그를 기다리는 마음이 물을 끓인다 --정미소 시집 〈구상나무 광배〉에서 해는 저물고, 날은 춥고, 한적한 시골마을 허름한 식당 안 난로 위에서 하얀 김을 뿜어내는 주전자를 유리창을 통해 바라보면 어떤 생각이 먼저 들까. 당연히 저 따뜻한 한 잔의 맹물이든 커피든 마시고 싶은 생각 간절할 것이며, 그 따뜻함 속으로 온통 빠져들고 싶을 것이다. 사실 주전자에 물을 끓인다는 것은 누군가를 간절하게 기다린다는 의미이다. 그 누군가가 금방이라도 문을 열고 들어설 것만 같은 마음으로 주전자는 끓고 있는 것이다. 춥고 외로운 누구라도 따뜻한 물 한 잔에 몸을 녹이고 마음을 녹일 수만 있다면, 하는 마음이 주전자 가득 물을 끓이고 있는 것이며, 그 누구가 바로 사랑이라면 얼마나 그 마음은 간절할까. /장종권 시인
물고기 신발 /김미정 눈물 나는 그런 포즈는 아니에요 젖은 신발이 되었고 그날 나는 문을 향해 엎드려 있었죠 발에 꼭 맞는 발걸음이 앉았다 날아가요 나를 물가로 데리고 가요, 당신 신발이, 앞으로 나아간다, 휘어지는 고요, 호수의 옆구리가 오므려 졌다, 펴진다, 버려진 입구와 출구사이, 투명한 지느러미가 돋아난다 어느 날 나는 내가 되어 버려요 갑자기 신발이 사라진 그 길들이 젖지 않은 채 젖어가요 죽은 척 가만히 떠올라요 누군가 낚시를 하다 신발을 건질 거예요 -계간 『시작』 2013년 겨울호 물고기는 신발을 버리고 물고기가 된다. 그리고 투명한 지느러미가 돋아나면서 나는 내가 되어 버린다. 누군가 낚시를 하다 신발을 건질 거라며 아무런 미련 없이 고요히 수면을 느끼고 싶은 나는 신발을 버린 물고기의 즐거움을 느끼려 한다. /김휴 시인
그냥 /이형우 차 몰고 열심히 가다가 문득 스친 꽃가게 풍경이 다시 떠올라 십 리쯤은 되달려 가서 만든 장미 한 다발 흑장미에서 백장미까지 형형색색 다 만나 한 움큼 손 꽃밭 일구어서 맨 먼저 만나는 여인에게 주고 싶어 그냥 -이형우 시집 〈착각〉, 시인동네 2014년 목적지를 향해 열심히 가는 일. 삶이 그런 것이라고 하자. 옆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실하게…. 그 목적지란 무엇인가. 놀랍게도 죽음이다. 우리는 죽음을 향해 날마다 성실하게 달려가고 있다. 기다리고 있을 죽음을 생각한다면 덜 열심히, 덜 빠르게 달려갈 일이다. 그러니 한 번쯤, 왔던 길을 ‘그냥’ 되돌아가는 일탈의 묘미! 장미 한 다발 사서 맨 먼저 만나는 모르는 여인에게 ‘그냥’ 주는 것. 삶의 여정에서 스스로 설레는 순간들을 만드는 것. 분명한 것들만이 삶의 요소가 아니듯이 더러는 이유 없이 누군가에게 꽃을 건네는 행위. 그래서 삶이 덜 쓸쓸하다면. /이미산 시인
옛집 마당에 꽃피다 /김선태 옛집 마당을 숨어서 들여다본다 누군가 빈집을 사들여 마당에 텃밭을 가꾸었나 온갖 꽃들이 지천으로 피어 있다 울며 맨발로 집을 뛰쳐나왔던 내 발자국 위에 울음꽃 대신 유채꽃 고추꽃 환하다 어머니 아버지 뒤엉켜 나뒹굴던 자리에도 언제 그랬냐는 듯 깨꽃 메밀꽃 어우러졌다 불화의 기억 속으로 화해가 스민 것이다 가만히 귀기울이니 식구들 웃음소리 들린다 폭력의 아버지도 눈물의 어머니도 뿔뿔이 흩어졌던 형제들도 모두들 돌아와 마당에 꽃으로 웃고 있다 슬며시 옛집 마당에 들어가 꽃으로 서본다 선뜻 들어서지 못하고 어릴 때 살던 옛집을 훔쳐보는 시인을 지천으로 핀 꽃들이 마당 안으로 불러들인다. 아마도 자주 삐꺽거리는 곤궁한 살림살이였을 것이다. 술기운으로 휘두른 아버지의 폭력에 맥없이 쓰러졌을 어머니의 눈물 때문에 맨발로 뛰쳐나가지 않고는 견디지 못했을 시절이었을 것이다. 그 마당에 울음꽃 대신 유채꽃, 메밀꽃 피어 환하니 과거의 불화는 녹아 사라지고 식구들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폭력의 아버지도 눈물의 어머니도 멀리 흩어졌던 형제들도 꽃으로 웃고 있는 마당, 슬며시 들어가 꽃으로 환하게 피어보는 시인의 마음이 애틋하다. 그런 옛집이 사라지지…
길을길을 갔다 /김근 여자가 살을 파내고 나를 심는다 나는 아무 저항 없이 여자의 살에 뿌리를 내린다 내 실뿌리들이 혈관을 타고 여자의 온몸으로 뻗어 나간다 여자를 빨아먹고 나는 살찐다 언젠가 여자는 마른 생선처럼 앙상해질 것이다 옛날에도 그랬다 나는 커다란 종기처럼 여자에게서 자랐다 나라는 고름 주머니를 달고 여자가 길을길을 갔다 -시집 ‘당신이 어두운 세수를 할 때’(문학과지성사, 2014)에서 ‘옛날에도 그랬다’는 말이 귀에 솔깃합니다. 오래된 미래를 이야기하듯 시인은 우리의 근원으로 더 거슬러 갈 것을 속삭이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여자에게서 잉태되고 태어나고 길러졌기에 종기처럼, 고름처럼 살고 있는 나를 돌아보게 됩니다. 시인은 숙주인 여성의 몸에 기생하는 에일리언 같군요. 영화 장면처럼 기괴하고 흉측한 우리 삶의 초상이 떠오릅니다. 우리가 자기 생활의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이기적으로 얼마나 많이 남의 삶을 무심코 혹은 일부러 침범하고 침탈하였나요. 여자가 이 오만하고 자기 중심적인 인간을 왜 끌어안고 꼬이고 꼬인 길을 나서야만 했을까 궁금합니다. ‘어머니’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입
세상의 손 /황미라 거미줄을 따라 가면 그 끝에서 만나는 것이 있다 처마 밑이나 나뭇가지, 하다못해 썩은 지푸라기라도 거미줄은 부여잡고 있는 것이다 거미줄의 처음과 끝이 닿아 있는 거미줄보다 절대 먼저 놓아버리지 않는 힘겨울 땐 언제나 잡아보라고 이 세상 손이 사방 뻗어 있는 것이다 -시집《스퐁나무는 사랑을 했네》 세상은 모두 연결되어 서로 비추고 비추어주는, 관계의 그물이란 말이 떠오른다. 마음을 알아주지 않았거나 말에 상처를 받았을 때, 불만이 배인 눈빛과 말투가, 보이지 않는 거미줄을 친다. 얼른 감지하지 않으면 끈적거리는 줄에 칭칭 얽매일 수도 있다. 마음의 움직임을 볼 수 있을 때, 거미의 그물망에서 벗어난다. 마음의 움직임이 그쳐, 적막이 견딜 수 없을 때는 사방의 그물망에 다시 손을 뻗어보는 것이다. /신명옥 시인
남당리 /이윤학 1. 비릿한 생선 냄새가 났다. 여섯 시간마다 시내버스가 생선 냄새를 신고 읍으로 갔다. 익숙하게 잔잔한 천수만을 고동소리 내지 않고 떠나간 희망은 파장 같은 썰물에 키 큰 말뚝에 걸려 돌아오지 않았다. 선착장 주위를 몇 바퀴 돌다 썰물의 시야 밖으로 밀려나는 갈매기떼, 늦은 항해에 몇 번씩 기억이 있는 죽도의 대나무 숲이나 썰물이면 솟아나는 샘물을 이야기하며 궁색한 막걸리 잔에 별을 띄우는 사람들, 2. 늦은 귀가길, 발목에 엉키던 그물코 억센 바람을 안고 자주 쓰러졌다. 엎드려 들 을 수 있는 정확한 바다의 발음, 낮은 포복으로 기어드는 똥장게 같은 어둠 속으로 반달이 뜨는 날이면 바다에서 멀리 집들이 떨어져 나갔다. 3. 잠들지 못한 사람들이 바다를 이야기 한다. 푸른 기억 속에서 바다는 멀어져 가지만 가깝게 느껴지는 날이 있다는 걸 빼놓지 않으리라. 싱싱한 냄새를 맡고 찾아오는 새떼나 대처에서 바다를 동경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바다는 건망증이 심하다. 어제의 일을 기억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빠른 체념만이 바다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다. 살아남으면 언제라도 수평선을 바라볼 수 있다. /박병두 시인(수원문인협회장)
변기 /심창만 나와 더불어 몹쓸 것이 된 늦은 밥그릇 어머니가 어머니를 멍하니 들여다보고 있다 등굣길에 낳은 여중생의 아이도 맨 처음 받아주신 성모 마리아의 골반 귀를 대면 요단강까지 새 밥이 끓는 소리 -심창만 시집 『무인등대에서 휘파람』/푸른사상 변기의 역할이 그러하지만 물은 내림과 동시에 정신이 말끔해지고 냄새까지 사라진다. 어머니의 손길을 닮았다. 고마움이나 편리함도 까먹은 채 그저 지저분해지면 박박 솔질이나 해대는 내게 시인의 변기에 대한 성찰이 새롭게 환기된다. 새삼 변기에서 따스한 온기가 느껴진다. 어머니는 끊임없이 따끈한 밥을 새로 지으신다. /성향숙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