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시절 /김보숙 지붕 위로 던져진 유년의 치아가 궁금한 밤이다. 실에 묶인 송곳니는 어느 집 지붕 위에 심어졌을까. 빠진 이 사이로 혀를 밀어 넣으면 놀이가 되던 저녁, 은퇴한 구름 주위로 몰려오는 별자리의 이름들은 나의 첫 비문이 되었다. 유산을 하고 돌아온 어머니는 시차를 잃고 어지러워했다. 한 여름, 밍크담요 속으로 들어간 어머니의 발을 따뜻한 물로 닦아주면 먼 시차 속에서 나를 바라보던 눈. 아가야, 아가는 별이 되었단다. 입 안에 고인 물방울은 아무리 삼키려 해도 넘어가지 않았다. 그날 오빠의 일기장에는 ‘달이빨간데’ 가 적혀 있었다. 하지만, 나는 달이 이빨을 가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리토피아 겨울호 중에서 새 이빨이 돋아나는 시기, 이갈이 시기는 다음의 사춘기와 마찬가지로 한 시기에서 다음 시기로 넘어가는 중요한 과정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이갈이 시기를 사춘기의 기억처럼은 잘 기억하지 못한다. 주변 상황을 읽어내는 작업보다 자신의 관심사에 국한된 작업으로 세상을 읽어내기 마련인, 이 시기의 기억을 찾아내는 시인의 눈이 부럽다. /장종권 시인
즐거운 세일 /조재형 오늘 나는 임의로 제출되었다 하지만 누구도 나를 펼쳐 보지 않는다 하는 수 없이 집으로 반품되는 중이다 표준 어법으로 억양을 각색했던 바 원산지 표시에 하자가 드러난 것 내가 이 가문의 재고품이 된 지는 오래 식구들은 밤새 나를 재포장할 것이다 내일 다시 신품인 듯 납품을 시도하겠지 따뜻한 배후가 되어 주겠지 화살기도로 엄호해 주겠지 또한 이렇게 외쳐 주지 않겠어? 대박이 아니라도 좋아, 반품이 되어도 좋아, 바겐세일만은 사양해! -아라문학 5호에서 사람을 상품과 비교가 가능하다면 대부분의 중년은 아마도 신품이란 애초에 틀린 일로 보아야 한다. 세일을 통해서라도 상품화가 가능하다면 그것도 축복이다. 영락없이 반품이다. 버려진 존재라는 생각에 미치면 참을 수 없는 허무가 밀려오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고목나무에서도 꽃이 핀다 했던가. 열심히 꽃이라도 피울 일이다. /장종권 시인
꽃 /김주대 눈으로만 들을 수 있는 말이 있다 -시집 ‘사랑을 기억하는 방식’(현대시학, 2014)에서 ‘꽃’ 하면 김춘수의 ‘꽃’을 언뜻 떠올리지요.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서정주가 노래했던 꽃 ‘화사(花蛇)’는 어떤가요? 꿈틀대는 꽃을 만든 시인에게 경탄할 수밖에 없습니다. “석유(石油) 먹은듯 …석유(石油) 먹은듯…가쁜 숨결이야” 외치는 단말마의 숨소리가 몸을 들뜨게 합니다. 호명할 수 없는 슬픔이 이 짧은 말 속에서 웅웅대고 있습니다. 몸으로 다가가 부딪칠 수 없는 안타까움이 서려 있네요.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 이 고즈넉한 사랑! /이민호 시인…
그리운 맨드라미를 위하여 /이승희 죽고 싶어 환장했던 날들 그래 있었지 죽고 난 후엔 더 이상 읽을 시가 없어 쓸쓸해지도록 지상의 시들을 다 일고 싶었지만 읽기도 전에 다시 쓰여지는 시들이라니 시들했다 살아서는 다시 갈 수 없는 곳이 생겨나고 있다고 내가 목매달지 못한 구름이 붉은 맨드라미를 안고 울었던가 그 여름 세상 어떤 아름다운 문장도 살고 싶지 않다로만 읽히던 때 그래 있었지 오전과 오후의 거리란 게 딱 이승과 저승의 거리와 같다고 중얼중얼 폐인처럼 저녁이 오기도 전에 그날도 오후 두시는 딱 죽기 좋은 시간이었고 나는 정말 최선을 다해 울어 보았다 - 이승희 『거짓말처럼 맨드라미가』문학동네 2012. 2 떨어지는 낙엽만 봐도 까르르 거리며 웃음을 터뜨리기만 할 나이 즈음, 청년기의 문 앞에 서기 전 즈음이면 앓았던 열병이다. 누구나 지나온 시간이지만 그 자리를 벗어나면 그들의 존재에 대한 갈망과 고민을 속 깊이 봐 주는 이가 없다. 읽혀지기도 전에 다시 쓰여지는 시들이라니, 얼마나 시들한 일인지. /이명희시인
새벽 5시 /안혜경 어김없이 새벽은 온다. 그냥 말없이 절망이 우리들의 神인데도 불구하고 지난 밤엔 많은 피를 흘리고 진창 속에 뒹굴어 나무들조차 손을 내밀지 않고 질식시키려 했는데 마술에 걸린 이 아침, 커피는 더욱 갈증을 일으키고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는다. 그날 그날에 감금당한 우리는 창밖의 일을 알지 못하고 지나가는 구름의 부호도 읽지 못한다. 그런데도 새벽은 찾아오다니, 발자국 소리도 내지 않으면서 우리의 심장은 수수께끼로 가득 차있고, 손을 내미는 순간 손목은 잘리고 아무리 소리쳐도 듣지 못한다. 다시 어둠이 오고 우리는 잠들고 다시 새벽은 오고. 끝없는 갈증, 무엇에 대한 목마름인지 정확하게 규명되지도 않는, 그러면서도 등 뒤에 찰거머리처럼 붙어 늘 시달리게 만드는 시인의 화자는 착잡한 모양이다. 일상생활의 고달픈 하루의 일기 같은 시에서 1년이 가도 5년이 가도 늘 변함없는 자신의 삶을 반추하면서 시인은 무슨 말을 해 보고 싶은 것일까?희망은 다만 신기루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고 희망은 우리를 끝없이 속이고 결국에는 우리를 지치게 만들고 그것을 나중에야 깨닫게 된다는 것을. /박병두 (시인·수원영화예술협회장)
나는 청동기에서 왔다 /박미라 허벅지 안쪽에 멍울이 섰다 마음이 쏘다니던 길목이 막혔다 흙장난하듯, 조물거리는 언 손에 흰 피 묻은 민무늬 토기가 잡힌다 달빛이 밝으면 깊은 잠이 쏟아졌으므로 발굴을 중단한다 뜻밖의 침입자가 있을지도 몰라, 오래된 돌칼을 당기며 웅크려 눕는다 달의 형상을 훔쳤다던 ‘거친무늬거울’ 속 그대에게 돌베개를 전한다 먼발치에서 바람의 기척이 들린다 이로써 멍울의 병명을 유추할 수 있겠다 -박미라 시집 『우리 집에 왜 왔니?』/푸른사상 푸른 멍울은 책상 모서리나 의자, 싱크대, 침대 모서리에 부딪히거나 외부의 어떤 물체들이 내 몸에 가한 물리력의 흔적이다. 붉은 피들은 외부의 침입에 우왕좌왕 혼비백산 저희들끼리 몰려다니다 어떤 ‘길목’을 막고 대항한다. 마치 푸른 옷을 입은 청동기의 기사들처럼. 멍울을 누르면 아프기도 하지만 혼자 외롭게 싸우는 ‘달의 형상’을 닮아 외롭다. 혹시 몽고반점은 청동기에서 온 푸른 옷의 기사가 아직도 굳건하게 날 지키고 있는 건 아닐까? /성향숙 시인
레몬은 시다 /함기석 침대 끝에 등을 돌리고 앉아 있다 언어가 알몸으로 빈 컵에서 새가 날아오른다 꽃은 없고 꽃 그림자 속에서 누가 흘러내리는 내 몸을 마시고 있다 취한 밤 레몬은 새처럼 자고 방을 가득 채운 지름 4cm의 노란 공(空) 나와 레몬, 유기적인 구분 없이 둘은 취한 밤에 놓여있고 방을 가득 채운 레몬의 향기는 언어가 필요 없는 향기로운 대화며, 꽃은 없지만 꽃밭이 펼쳐진다. 노란 공이 알몸으로 밤을 유혹하는…. /김휴 시인
몇 술 얻으며 /강규 끝도 없이 허기가 지는 날들 돌아앉으면 생각나는 삼시 끼니때마다 사랑없는 이 허기와 현기 때문에 뱃속 든든해야 뭐든 할수 있다 우선 큰 상심이 없다 아 그러나 이 生存 빈접시 핥는 이 지독한 따박따박 숟갈질 크게 하면서 해질무렵 우리들 제각기 빈 깡통 들고 밥 빌러 나가지만, 실은 하염없이 내 집 창 두드리던 당신 훤칠한 삐삐 마른 허기진 사랑 몇 술 얻으면 살아갑니다. 늦도록 책을 보고 부지런히 움직여, 보고 들어야 할 많은 것들에 이렇게 소박한 욕심이 있는데 몸은 말하지 않는다. 시인의 착잡한 밤을 준비한 마음은 어떤 것일까? 이해할 수 없는 부조리한 시선 끝에 매달려오는 밤을 준비하는 것은 아닌지 시를 훔쳐보게 된다. /박병두(시인·수원영화예술협회장)
낙과(落果)들 /이정원 연보도 없이 한 생이 저문다 그러쥐었던 손목이 악력을 놓을 때 하필 지구 한 모퉁이에 와서 연소시킬 아무것도 없다는 듯 차츰 쪼그라지는 백색왜성들 -2014년 시집<꽃의 복화술>천년의 시작 푸른 모과 하나 내 앞에 떨어졌다, 모든 생명은 별의 성분을 지니고 있다, 별 하나를 집었다, 높은 가지 끝에 달려있던 열매로서, 햇빛과 달빛을 먹으며 빛나던 별, 제 궤도를 벗어나 지구에 떨어진 별을 창틀에 놓아두고 노랗게 익어가는 과정을 본다, 자신의 핵원료를 다 소비한 백색왜성, 항성진화의 마지막 단계에 도달한 백색왜성이 검게 변하며 쪼그라든다. 내가 영원을 빌던 별들, 알고 보니 유한한 목숨이었다, 별과 모과와 나는 수명을 가진 생명체, 활동을 멈추고 검게 썩은 모과의 잔해를 나는 흑색왜성이라 부른다. /신명옥 시인
별똥별 /이문재 그대를 놓친* 저녁이 저녁 위로 포개지고 있었다. 그대를 빼앗긴 시간이 시간 위로 엎어지고 있었다. 그대를 잃어버린 노을이 노을 위로 무너지고 있었다 그대를 놓친 내가 나를 놓고 있었다 오른손에 칼을 쥐고 부욱― 자기 가슴팍을 긋듯이 서쪽 하늘 가늘고 긴 푸른 별똥별 하나. - 이문재 『지금 여기가 맨 앞』실천문학 2014. 5 * 직장 대선배가 어린 딸을 먼저 저 세상으로 보낸 뒤 지인들에게 보낸 편지에 쓴 표현이다. 그 편지의 첫 문장이 다음과 같았다. “사랑 하는 딸을 놓쳤습니다.” 진도에 머물고 있는 실종자 가족에게 체육관을 비워달라는 요구가 있었다는 뉴스가 있었습니다. 누군가는 세월호 때문에 경제가 침체됐다고 함부로 말을 뱉았습니다. 왜 우리는 우리의 아픔을, 상처를 우리 스스로에게만 지우고 칼을 들이 대며 날을 세우는지 모르겠습니다. 내 자식이, 내 사랑하는 사람이 어이없게 죽었는데 말입니다. 바로 잡지 않으면 또 언제 우리에게 닥칠 일일지 모르는데 말입니다. / 이명희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