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인 /김종삼 1947년 봄 심야 황해도 해주의 바다 이남과 이북의 경계선 용당포 사공은 조심 조심 노를 저어가고 있었다. 울음을 터뜨린 한 영아를 삼킨 곳. 스무 몇 해나 지나서도 누구나 그 수심을 모른다. -‘김종삼시전집’(나남출판사, 2005)에서 한국인의 비극적 운명을 이토록 극명하게 드러낸 시도 드뭅니다. 우리는 늘 경계에 서 있습니다.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형국입니다. 캄캄한 밤에 누군가 들이닥쳐 깊은 잠을 깨워 일으켜 손전등을 들이밀고 “너는 어느 쪽이냐?” 물을 때 섣불리 대답할 수 없습니다. 어둠 속에서 목소리만 들려오는 그 음험한 이데올로기의 폭력에서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목숨은 참으로 모질고도 처연합니다. 살기 위해 어린 생명마저도 수장시켜버릴 수밖에 없는 현실을 우리는 아직도 살고 있습니다. 아이를 삼켜버린 경계선은 우리 사회 곳곳에 바다를 이루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어디를 향해 건너가고 있는가요? 무엇을 피해 달아나고 있는가요? 그리고 또 얼마나 많은 어린 영혼을 깊은 바다 속에 강제로 처넣어야 하나요? 침묵만이 우리를 휘감고 있습니다. 여태 비극은 끝나지 않았
마음은 이렇게도 가르친다 /박주택 마음은 이렇게도 가르친다 오래 겨울이 머물다 가는 사람처럼 두려워하고 잔고를 더듬는 사람처럼 쓸쓸해라 침대에 앉아 옆 침대 신음을 듣는다 햇살은 여리도록 창에 스미고 건성으로 연속극은 돌아간다 다친 각막으로 건너편 병동을 본다 육체를 떠나는 마음이 목례를 하고 마음이 없는 육체는 적요하리라 - 박주택 시집 <또 하나의 지구가 필요할 때/문학과 지성 2013> 마치 금강경을 새롭게 해석하는 느낌이다. <꿈의 이동건축>으로부터 그려온 삼십 년여의 시적 궤도가 별처럼 빛나는 순간이라 생각된다. 마음이 가르친다니, 마음을 마당에 내어다걸어 본 사람은 알 수 있을 것이다. 거기서 스스로 홀로 빛나는 말씀들을, 우리는 모두 각막을 다친 경험을 가졌으므로 시인과 같은 곳을 같은 상(像)으로 볼 수 있다. 아파본 사람만이 아픔을 노래할 수 있다. 마음이 없는 육체는 정녕 적요하리라(?). 이것은 커다란 질문일 것이다./조길성 시인
지에밥 /최승범 울안 대숲 스친 초여름 훈풍이 초석자리 지에밥에 뜬구름 드리우면 엄마 앞 아양을 떨며 주섬주섬 먹었지. -최승범 시집 <명암>에서 문화 가 - 00224<일간> 2002년 6월 15일 창간 유년시절 어머니가 떡을 만들기 위해 만든 고두밥을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난다. 시루에 찌는 된밥인 고두밥의 대표가 술을 만들기 위해 만드는 지에밥이 아닐까 한다. 어린 생각으로는 보통의 진밥에 비해 이 고두밥이 좀 특별해 보였을 것이다. 1960년대 먹거리가 없던 전라도 평야지대의 아스라한 기억이다. 남은 콩고물에 진밥조차도 일부러 비벼 고두밥처럼 먹었으니 아마도 군것질이 아니었나 싶은 것이다. 고향과 어머니에 대한 따듯한 기억이다./장종권 시인
오래된 시장 골목 /박명숙 누구는 호객하고 누구는 돈을 세는 양미간의 팽팽한 노점 앞을 지나는데 꽃집의 늦은 철쭉이 여벌옷처럼 펄럭인다 가끔씩 여벌처럼 세상에 내걸려서 붐비는 풍문에나 펄럭대는 내 삶도 마음이 지는 쪽으로 해가 지듯, 저물 것인가 퍼붓는 햇살까지 덤으로 얹어놓아도 재고로만 남아도는 오래된 간판들을 쓸쓸히 곁눈 거두며 지나는 정오 무렵 - 유심 2013년 1월 문화 가 - 00224<일간> 2002년 6월 15일 창간 정오 무렵, 쓸쓸한 풍경이다. 오래된 시장은 정말 이제는 어쩌면 기억 속에만 남겨져 있는 것인지. 어린 아이들에게 신기한 것이 얼마나 많은 곳이었는지. 온갖 음식냄새가 가득한, 질척한 좁은 통로를 엄마 뒤꽁무니로 졸졸 따라다니면 어쩌다 동전이나 십원짜리 지폐를 줍기도 하던 어린 시절의 시장풍경은 점점 사라지고 없다. 그럼에도 경복궁 옆 통인시장과 충무로 뒷골목 인현시장처럼 도심 속에 살아있는 시장도 있다. 높은 빌딩 숲 속 좁은 골목 사이로 각종 가게가 있는 풍경은 여전히 우리들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물론 예전만큼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그렇게 풍경 속에 남아있는 시장을 구경하는 재미가 작지 않다. 쓸쓸할 때도 있겠지만 너
좀팽이처럼 /김광규 돈을 몇 푼 찾아가지고 은행을 나섰을 때 거리의 찬바람이 머리카락을 흐트려놓았다 대출계 응접 코너에 앉아 있던 그 당당한 채무자의 모습 그의 땅을 밟지 않고는 신촌 일대를 지나갈 수 없었다 인조 대리석이 반들반들하게 깔린 보도에는 껌자국이 지저분했고 길 밑으로는 전철이 달려갔다 그 아래로 지하수가 흐르고 그보다 더 깊은 곳에는 시뻘건 바위의 불길이 타고 있었다 (생략) 금고 속에 넣을 수 없는 이 땅을 그 부동산업자가 소유하고 있었다 마음대로 그가 양도하고 저당하고 매매하는 그 땅 위에서 나는 온종일 바둥거리며 일해서 푼돈을 벌고 좀팽이처럼 그것을 아껴가며 살고 있었다 출처 - 김광규 시집 『좀팽이처럼』- 1988년 문학과지성 “당당한 채무자의 모습”을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는 사람들에게 충분히 공감이 가는 시다. 왜 돈을 많이 빌리는 사람이 몇 푼일지언정 제 돈을 찾아가는 사람보다도 더 당당한가. 은행에서 큰돈을 빌려 마음대로 그가 “양도하고 저당하고 매매하는” 땅 위에서 바둥거리며 푼돈을 벌고 그것조차 아껴가며 사는 이 시대의 “좀팽이들”이 우리의 자화상 아닌가. 자본의…
화암사 도롱뇽 /함순례 산중 계곡 낙엽 젖히니 알 주머니들이 둥둥 떠 있다 늙은 도롱뇽은 쓸데없는 짓을 하지 않았다는데 그래서 사는 게 지루했다는데 천개 알을 방사한 저것은 혈기왕성한 수컷이겠다 막 빚어 올린 꽃술을 이기지 못한, 또 한번 사천왕 같은 눈을 굴리며 발아래 봄 산을 눕히고 있는 -시집 <혹시나>(삶창, 2013)에서 차례를 무시하고 꽃들이 다투어 피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개나리가 피고 나면 진달래가 다음은 벚꽃이 피었다는 얘기는 이제 옛날에나 들었던 순리가 되었습니다. 지구가 앓고 있는 병이 얼마나 위중하기에 이렇게 많은 생명들이 일제히 일어서 기웃대나요. 화암사 절터 산 깊은 계곡에 도롱뇽 알들도 낙엽 같은 어둠을 걷어내고 목도하였다니 생명은 죽음과 한 이불을 덮고 있나 봅니다. 어찌 새 생명을 잉태하는 일이 쓸데없는 일이겠습니까. 짝을 만나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얻는 일이 요즘엔 우리 삶의 가장 나중으로 내쳐둔 것을 생각하면 정말 사는 게 지루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우리는 죽음의 계절을 혹독히 치르고 있습니다. 그래도 하늘의 뜻은 우리를 더욱 담금질하려는지 사천왕 같은 눈을 굴리며 몰아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를 짓누르는 죽
신발 한 켤레 /김선희 “집에 가자 집에 가자, 이젠 도리 없다” 요양병원 지겹다고 사는 게 두렵다고 어머니 부러진 다리 슬그머니 매만진다 먼지 뽀얀 신발을 날마다 쳐다보며 중얼 중얼 혼잣말에 눈물도 글썽이며 맨발로 가야할 길도 있는가를 묻는다 - 열린시학 2013 봄 문화 가 - 00224<일간> 2002년 6월 15일 창간 싱그러운 오월 연휴 중 하루 남동생네랑 화창한 봄날을 점심으로 들고 또 다른 하루는 엄마의 큰 아들 동네로 갔다. 일요일 한낮 어두운 식당, 살림살이만큼의 점심을 먹고 돌아서 서울 한 구립노인요양센터에 들렀다. 엄마의 동갑네기 조카가 수년 전부터 치매로 누워 계시다는데 거기 한번 가보자는 청을 들어 드리지 못했다. 깨끗하고 적막한 건물, 엘리베이터는 다 잠겨있었다. 센터 벽에 걸린 오빠 생각이라는 그림은 꼭 그만한 나이가 되어 오빠를 그리워하는 어느 노인의 기억이었을 터였다. 침대에 누워있는 아득한 눈빛의 조카는 고모를 알아보지 못했다. 드문드문 웅얼거리는 소리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복도를 초점 없는 눈빛으로 천천히 걷거나 기어 다니는 노인들, 나이를 먹는 것이 그래서 겁나는 일일 게다. 사랑하는 가족
부석사에서 /윤제림 이륙하려다 다시 내려앉았소, 귀환이 늦어질 것 같구려 달이 너무 밝아서 떠나지 못했다는 것은 핑계, 실은 사과꽃 피는 것 한 번 더 보고 싶어서 차일피일 결국은 또 한철을 다 보내고 있다오 누가 와서 물으면 지구의 어떤 일은 우주의 문자로 설명하기도 어렵고 지구의 어떤 풍경은 외계의 카메라에는 담기지 않는다고만 말해주오 지구가 점점 못쓰게 되어 간다는 소문은 대부분 사실인데 그냥 버리기는 아까운 것들이 너무 많소 어르고 달래면 생각보다 오래 꽃이 피고 열매는 쉬지 않고 붉어질 것이오 급히 손보아야 할 곳이 있어서 이만 줄이겠소 참, 사과꽃은 당신을 많이 닮았다오 출처 - 윤제림 시집 『새의 얼굴』- 2013년 문학동네 지구가 별이라는 생각을 평소에는 잊고 산다. 단지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땅이라고 생각할 뿐. 지구라는 별에 잠시 체류하고 있는 이가 먼 우주에서 지구를 바라보며 애틋해 할 누군가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의 시. “사과꽃 피는 것 한 번 더 보고 싶어서” 차일피일 지구를 이륙할 날짜를 미루는 시의 화자는 “점점 못 쓰게 되어가는 지구”에 “그냥 버리기는 아까운 것들이 너무 많
엄마 /김주대 옛날부터 우리 엄마는 나보다 나이가 많았다 나도 이제 꽤 나이 들었다 생각하며 찾아갔는데 홀로 사는 엄마는 어느새 또 나보다 나이가 많아 있었다 흰머리 이고 저만치 가신 당신을 서둘러 따라가 동무해주지 못하는 그것이 오늘 슬펐다 -김주대 시집 <그리움의 넓이>에서 늙은 아들이 더 늙은 어머니 앞에서 재롱을 부린다는 이야기는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자식은 아무리 어른이 되어도 부모 앞에서는 죽는 날까지 어린애라는 말이 맞는 말이긴 하다. 그런데 문제는 어머니에게 만족감을 줄만한 어른으로 성장하기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어머니의 바람이 그리 큰 것도 아닐 것인데 어머니에게 자식은 항상 불안하고 부족한 존재다. 또한 자식은 어머니에게 항상 미안하고 부끄러운 존재다. 세상살이 지난할수록 모든 자식들에게 어머니 슬하는 그립고, 그리운 만큼 비어있는 슬하가 시렵기도 할 것이다./장종권 시인
冠岳山을 오르며 /전오 구름이 머무는 산자락에 올랐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다. 어리석은 衆生 이 산 오르면 지혜로운 사람 될까? 세상의 소음도 粉塵 같은 貪慾도 산 품속에선 고요하기만 하다. 촘촘히 엮은 세월도 분초 다투던 시간도 산이 품어 안았다. 無限天空에 펄럭이던 바람이 어깨에 내려앉는다. 인자요산(仁者樂山)은 공자가 남긴 고사성어다. 이 말은 ‘어진 이는 산을 좋아한다’는 뜻이다. 어진 이는 고요함을 좋아한다. 어진 사람은 의리에 만족하여 몸가짐이 진중하고 심덕이 두터워 그 마음이 산과 비슷하므로 자연히 고요한 산을 좋아한다. 이 시는 인자요산(仁者樂山)의 의미를 더 분명히 알게 해준다. 세상의 소음도, 분진 같은 탐욕도 산속에서는 고요하기만 하다. 촘촘히 엮은 세월도, 분초 다투던 시간도 산은 품어 안는다. 고단한 일상에서 벗어나 고요함을 만끽하고 싶다면, 산에 오르자. 우리가 분주하고 혼잡한 시간들을 보내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산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박병두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