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를 읽는 법 /박지웅 나비는 꽃이 쓴 글씨 꽃이 꽃에게 보내는 쪽지 나풀나풀 떨어지는 듯 떠오르는 아슬한 탈선의 필적 저 활자는 단 한 줄인데 나는 번번이 놓쳐버려 처음부터 읽고 다시 읽고 나비를 정독하다, 문득 문법 밖에서 율동하는 필체 나비는 아름다운 비문임을 깨닫는다 울퉁불퉁하게 때로는 결 없이 다듬다가 공중에서 지워지는 글씨 나비를 천천히 펴서 읽고 접을 때 수줍게 돋는 푸른 동사들 나비는 꽃이 읽는 글씨 육필의 경치를 기웃거릴 때 바람이 훔쳐가는 글씨 - 박지웅 「구름과 집 사이를 걸었다」문학동네 2012년 12월 나비는 꽃이 쓴 글씨라고 시인은 읽는다. 아니 쓴다. 한 편의 시를 쓰기 위해서 시인은 얼마나 많은 말들을 닦고 지우고 쓰고 또 삼키고 토해내기를 수도 없이 했을 것인지. 그렇게 뭉툭해지는 펜 끝을 바라보다 팔랑팔랑 피어나는 활자들이 꽃과 꽃이 주고받는 쪽지라니. 천생 시인은 시인이다. 봄볕 따뜻한 키 작은 뒷산을 걸을 때면 나비가 길을 앞서 따라나선다. 봄으로 길을 안내해 주기라도 하듯, 조붓한 산길을 소리도 없이 이쪽으로 팔랑, 저쪽으로 팔랑 거리다 호젓이 날아가 사라져버리는 산책길이면 시 한 편 마음 가득하게 내놓을 수 있을 것…
지독한 포옹 /김예강 담쟁이넝쿨 담장을 타오르는 아침 육교 아래 특수학교 아이들이 스쿨버스를 기다린다 기다리는 버스가 서고 아이들 태워갈 때까지 길에 심어진 아이들 나팔꽃이다 다음 날도 다음 날도 육교 아래 어머니들은 아이와 스쿨버스를 기다린다 타오르는 담쟁이넝쿨 온 몸 해에게 내밀어 오래 X-레이를 찍어댄다 오래오래 벽을 껴안아 벽과 한 몸이 된 담쟁이넝쿨 육교 아래 어머니와 아이 오래오래 껴안고 있다 늘 한 몸이다 -김예강 시집 『고양이의 잠』/작가세계 특수학교에 다니는, 아마도 몸이 불편한 아이들이 스쿨버스를 기다린다. 아직 성숙하지 못한 어린 아이들도 그렇겠지만 장애를 가진 아이라면 분명 누군가의 손길이 필요한 존재다. 더군다나 시력이나 청력에 장애가 있다면 그 아이는 ‘벽과 한 몸이 된 담쟁이넝쿨’처럼 누군가에게 착 달라붙어 온 몸을 의지해야만 한다. 버스를 타기 전 어머니와 포옹하고 엄마 품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아이를 시인은 벽에 붙어 떨어지지 않는 담쟁이넝쿨로 묘사하고 있다. 장애 아이와 어머니를 벽과 담쟁이넝쿨의 관계로 치환시키며 포옹이라는 단어를 등장시킨 시인의 감성이 따뜻하게 다가온다. /성향숙 시인
검은 사자들 /세사르 바예흐 살다 보면 정말 지독한 비운도 있어 … 정말 모를 일! 무슨 신의 증오로부터 오는 벌 같은 재난들 ; 그런 일을 당하면 마치 지금까지의 세상 모든 고통이 웅덩이가 되어 마음에 고이는 듯 … 정말 알 수 없는 <중략> 영혼의 십자가와 그리스도가 한꺼번에 무너지는 운명이 저주하는 어떤 귀한 믿음의 깊은 추락, 그럴 때 사람은 … 그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은 비로소 눈을 돌려 바라본다. 등 뒤에서 누가 등을 쳐 그를 깨우치기라도 하듯, 돌아다보는 그 미친 눈길. 거기에는 지금까지 살아왔음이 죄악의 웅덩이처럼 눈길에 멍울져 고인다. 살다 보면 정말 지독한 비운도 있다 … 정말 모를 일! -세사르 바예호 시집<하얀 돌 위에 검은 돌/고려원 1995>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는 죤 오스본의 희곡이 떠오른다. 스페인인과 페루원주민 간의 혼혈 가문에서 11번째 아이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굶주림과 가난, 원주민에게 가해지는 불의를 직접 목격했다.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지원을 받는 스페인 파시스트군부의 반란으로 시작된 스페인 내전에도 참여했다. 패배로 얼룩진 그의 삶…
그리운 시절 /서영택 담장 널린 햇빛에 홑청이불을 널었다 대문 밖에는 연탄재가 쌓인다 어디선가 된장 끓는 냄새, 좁은 한 뼘 그늘에서 아이들이 자라고 골목길에 종을 흔들고 회전목마가 왔다 아이를 업은 새댁들 수다가 벌어지는 동네 뉴스 스튜디오 간밤 생긴 일에 손뼉을 치고 듣는 여자들의 어머, 어머 눈동자가 커진다 - 서영택 시집 ‘현동 381번지’ / 한국문연 골목과 골목이 이어지는 주택가, 대문을 열어놓고 사는 이웃들,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는 그곳에서 여자들은 아이를 키워냈다. 골목에 돗자리 펴놓고 반찬 한두 개씩을 가져와 소풍흉내를 내거나 집에 모여 국수를 삶아 먹기도 했다. 골목을 휘돌아 목청을 높이며 아이들은 형과 동생이 되어 잘 놀았다. 회전목마가 오는 날, 아이를 목마에 맡긴 여자들의 수다는 더 길어지기도 했다. 공감의 손뼉을 치며 어머, 어머, 추임새를 넣으며 하하 호호거리던. 지금은 아파트로 변했을 그곳과 희끗한 머리칼에 조금은 고독할지도 모를 그 골목의 여자들, 다시 오지 않을 그리운 시절이다. /이미산 시인
수레질 찻잔 /白利雲 푸른 시간 위에 네 입술은 닿아 있다 꽃 피는 상처 위를 네 손은 짚고 있다 놓으렴, 재에 대한 명상 환하고 눈부시다. -시조집 ‘무명차를 마시다’(동방기획, 2011)에서 시간도 주눅이 들어 핏기 없이 파리합니다. 시인은 시간의 주검 앞에서 당신도 입술을 대고 마지막 인사를 나누라 넌지시 말합니다. 그러면 시간의 포로가 되어 아귀다툼하며 살아온 우리 삶의 상처 속에서 꽃이 피듯 새 살이 돋는 기적과 조우하리라 속삭입니다. “놓으렴.” 순간, 그동안 맺혔던 마음 응어리가 다 녹는 듯합니다. 시인은 어쩌면 이런 말을 할까요? 투박하고 소박한 찻잔이 우리의 입술과 마주대하기까지 불타오르는 시련의 시간을 견뎌야 했을 것입니다. 오톨도톨 흉터 진 찻잔을 감싸 안아 문지르기까지 종당엔 재가 되는 소멸의 시간을 지나왔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 고요히 죽음을 생각합시다. 아무 이유 없이 스러져간 목숨들을 깊이 명상합시다. 그러면 환하고 눈부신 부활을 매일 마시고 호흡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모든 상처를 서로 어루만지자고 시인은 말합니다. 아무 말 없이. /이민호 시인
몸의 유리2 /이기철 새처럼 깨끗한 내장으로 살 수 있다면 물고기처럼 투명한 몸으로 살 수 있다면 내 서슬 푸른 욕망 모두 베어내도 좋으리 나비처럼 가벼운 몸으로 꽃밭을 날 수 있다면 구름처럼 피었다 지는 생애에 자유로울 수 있다면 내 몸뚱이보다 더 큰 고뇌를 오늘에서 내일로 운반하지 않아도 좋으리 진실로 나무처럼 흙 위에서 싱싱해지는 삶일 수만 있다면 불빛처럼 어둠에서 차가운 몸 데울 수만 있다면 -이기철 시집 ‘유리의 나날’ / 문학과 지성사 명징해질 수 있다는 것은 깨끗하게 닦아내거나, 비워내는 행위 끝에 오는 것들이다. “서슬” 푸른 “욕망”은 베어내도 웃자라거나 베어낸 자리만큼의 면적으로 다시 메워진다. 욕망의 영토에서 토양이 되어주는 “오늘”이거나 “내일”이라는 시간들. 그 시간들은 단지 “나날”에 불과한 어떤 순간들이다. ‘유리’에 닿는다는 것은 경계를 허문다는 의미이자, 내부와 외부의 벽을 허물겠다는 의지이기도 하다. 자아를 반영하는 유리. 자신의 내부를 깊이 들여다 볼 수 있는 거울의 투명함.…
지구여 /싱카와 가쓰에 억년을 울어왔는데도 새는 아직 그 노래를 완성하지 못하고 있다 억년을 자라왔는데도 나무는 아직 궁극의 하늘을 모르고 있다 지구여 지구여 어찌 화로의 불을 끌 것인가 씩씩하게 손을 드는 어린애들의 목소리가 울리며 학교는 수업중이다 - 싱카와 가쓰에시집<저를 묶지 마세요/서문당1995> 억년을 울어왔으니 또다시 억년을 울 자는 이야긴 아닐 것이다. 궁극의 하늘을 증명하자는 이야기는 더욱 아닐 터이다. 우리가 아무리 자라서 지구를 뚫고 나가도 태양계를 지나 은하계를 넘나든다 해도 속도와 그에 동반한 진보의 개념만으로는 아무것도 얻지 못할 수 있다. ‘어떻게 해서든 좋은 흙이 되었으면 한다’는 시인의 말에서 흙으로 돌아갈 것들에 대한 무한한 연민을 느낄 수 있다. 우린 죽어 어떤 흙이 될 것인가, 어쩌면 씩씩하게 손을 드는 어린애들의 지금이 궁극의 하늘일지도 모른다. /조길성 시인
토글방식 /이기선 오디오를 끌 때나 오디오를 켤 때나 스위치 하나로 통한다 스위치를 누르면 침묵덩어리에서 음악이 흘러나온다 마술사의 모자 속, 젖은 손수건에서 장미꽃이 만발한다 깜깜하던 방안도 스위치는 일순간 환하게 만들어 준다 그토록 눈부신 빛은 다름 아닌 어둠 속에 있었다 꽃은 시들었던 자리에서 자기를 다시 피워올린다 봄볕을 쏘여주면 피어나는 따스한 생각, 나는 지그시 내 아픈 곳을 눌러본다 *하나의 스위치로 전원의 켜짐과 꺼짐 두 기능을 담당하도록 하는 방식 -이기선 시집 『손이 닿지 않는 슬픔』/문학의 전당 어느 시인은 아픈 곳에 손이 먼저 간다고 했는데 아픈 곳은 스위치다. 우리 몸은 유기체이므로 아픈 곳을 만지면 온 몸에 불이 들어온다. 웅크리고 있던 어둠속으로 빛이 쳐들어온다. 너무 환하게 아프다. 어금니 하나 아픈 것으로 밤새 잠도 못자고 끙끙 ‘음악이 흘러나오고 장미꽃이 만발한다.’ 아픈 곳을 눌러보는 시인의 그 스위치는 ‘시들었던 꽃을 다시 피우고 따스한 생각이 피어나’는 시발점이기도 하다. 몇 번 누르다 보면 누를 때마다 피어날 것 같은 생각처럼 필생의 역작이 될 좋은 시 한 편 건질 수도 있지…
패키지 천국 /하종오 옷에 우리는 담겨 있다 집에 우리는 담겨 있다 차에 우리는 담겨 있다 빌딩에 우리는 담겨 있다 도시에 우리는 담겨 있다 담기지 않으면 상품이 아니다 그녀도 육체에 담아서 판다 그도 육체에 담으면 팔린다 담기지 않으면 명품이 아니다 물은 병에 담겨 있다 밥은 통에 담겨 있다 국은 캔에 담겨 있다 찬은 곽에 담겨 있다 약은 팩에 담겨 있다 이 모든 것을 담아서 전쟁과 군대와 기업과 국가가 패키지로 만들어지고 있다 -시집 ‘반대쪽 천국’(문학동네) 담긴다는 것은 주체를 잃는 것이다. 지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주의에 담겨야 가치를 얻게 되지만 우주에 담겨져 보호 받는 인간이 도리어 인간이 만든 자본이라는 용기에 담긴다는 것은 우주란 절대가치 속에서 들어내어 담겨지는 것과 같다. 가치하락이자 존재감의 상실이다.?무엇에 담기느냐에 따라 가치가 달라지는데 그 누군가의 사랑 안에 내가 담긴다면 그것은 행운이다. 하나 패키지를 위하여 담긴다는 것은 패키지 천국이란 것은 패키지 천국이 아니라 자본논리가 지배하는 절망적인 세상이다. 인간의 존엄성이 말살된 세상이다. 늘 세상의 어두운 부분을 예리하게 파헤치면서 각성을 불러일으키면서 다가오는
행성관측 /천서봉 불행이 따라오지 못할 거라 했다. 지나친 속도로 바람이 지나갔고 야윈 시간들이 머릿속에서 겨울, 겨울, 우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지나치게 일찍 생을 마친 너를 생각했다. 대개 너는 아름다웠고 밤은 자리끼처럼 쓸쓸했다. 실비식당에서 저녁을 비우다 말고 나는 기다릴 것 없는 따스한 불행들을 다시 한번 기다렸다. 하모니카 소리 삼키며 저기 하심(河心)을 건너가는 열차, 왜 입맛을 잃고 네 행불의 궤도를 떠도는지. 콩나물처럼 긴 꼬리의 형용사는 버려야겠어, 말하던 네 입술은 영영 검은 여백 속으로 졌다. 그래도 살자, 그래도 살자. 국밥 그릇 속엔 늘 같은 종류의 내재율이 흐르고 사람을 끌어당기는 건 여전히 사람이지만 나는 더 이상 사람을 믿지 않는다. - 천서봉 「서봉氏의 가방」 문학동네 2011년 12월 그래도 살자, 봄이 오는 길목에서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버렸다. 얼마나 수많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을까.한번도 밀리지 않고 꼬박꼬박 세금을 지불했으나 그들의 안위는 아무도 보장해 주지 않았다. 버티다 더 이상 밀릴 곳이 없는 많은 사람들이 고공에서 노상천막에서, 살 수 없는 곳이 되어가는 고향땅에서 힘든 싸움을 벌이고 있는지. 그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