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랑 물소리 /성명순 아주 가까이에서 물소리가 들린다 햇볕이 한 자리 빌려준다 접혀 있던 기다림은 몇 도일까 하얀 나비 망설임도 두려움도 없이 특별한 바람 포대기 두른 채 빛의 밝은 부분을 향한 몸짓! 녹음이 빛깔을 다스리고 있다. 버티고 서 있는 떡갈나무가 우듬까지 나뭇가지의 온기를 짙푸른 날개를 편 채 긴 여정의 장마를 끝낸다. 태양은 소임을 다하며 중독되지 않는 삶을 녹인다 한동안 작렬한 열기 따라 숲속의 새들처럼 쪼그리고 앉아 세상에 없을 엽서 띄워본다 겨울 폭설이 기억난다. 이 시를 읽으며 녹음이 우거진 계절을 그리워해 본다. 기나긴 장마가 끝나면 햇살과 녹음이 우거지고 태양은 뜨거운 열기를 발산한다. 자칫하면 이 열기에 몸도 마음도 축 늘어지게 마련이지만 졸졸 흐르는 또랑 물처럼 잔잔한 자유를 만끽할 수도 있다. ‘세상 어디에도 없을 엽서’를 띄워볼 수 있는 것이다. 심리학자들에 의하면, 졸졸 흐르는 물소리는 우리의 마음을 치유해 준다고 한다. 지나간 겨울, 얼음장 사이로 졸졸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봄의 기운을 일으켜 세워보자. /박병두 시인·수원영화예술협회장
망초 /한소운 방문 양 옆으로 나일론 줄을 치고 꽃무늬가 있는 천으로 듬성듬성 주름을 잡아 매달고서 커튼이라고 좋아라 했던 아늑한 방, 자취방 창호지 문짝의 고리 하나를 굳게 믿었던 그 밤 누가 방문 앞 신발만 가만히 확인하고 돌아간 사람 있었지 철들기 전에 지는 꽃도 있지 -<시문학 2013 11> 첫사랑 이야기를 들어 본 지 오래다. 희미한 안개를 뚫고 아카시아 향기처럼 먼 옛날이 우리를 부른다. 소꿉장난 같은 자취방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아직도 머리맡에 놓인 자리끼 곁에서 은하 별들이 눈을 성글거리고 있다. 시인의 창호문짝 고리를 밀고 들어가면 그 아늑한 방이 얼굴 붉히며 우리를 반기겠다. 누굴까 방문 앞에서 신발만 가만히 확인하고 돌아선 사람은./조길성 시인
환한 슬픔의 숲 /안차애 아파트도 한 자리에 오래 자리잡다 보니 나무가 되어가나 보다 오래도록 바람에 가슴 뜯기며 살다 보니 뿌리가 생겼나 보다 요즘 들어 부쩍 창만 열면 새소리가 바쁘다 새들이 드디어 아파트에 나무처럼 깃들기 시작했다 아침이면 앞 베란다 창에서 오후 설거지 무렵이면 부엌 창 쪽에서 낮고 높은, 강하고 여린 주파수를 보내온다 그러고보니 네가 오랜 여행을 떠나고 혼자 남겨진 뒤부터다 오래 남겨진 아파트 오래 남겨진 공터 오래 남겨진 가슴 한편 새들은 꼼짝없이 한 자리에 서서 슬픔의 뿌리만 내리는 것들에 제 둥지를 얹는다 지상엔 환한 슬픔의 숲이 하나 더 느는 것이다 -출처- 치명적 그늘 /문학세계사 2013년 아이들은 이제 기숙사로 자취방으로 떠나고 식탁은 반쯤 비어갈 것이다. 어디 아이들뿐이겠는가? 영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가버린 구성원도 있을 것이다. 참 이상도 하지? 잘 보이지 않았던 공터, 잘 들리지 않았던 새소리 같은 것들이 여태 보이지 않다가 누군가의 부재 이후 보이고 들린다. 그것들은 오래 전부터 거기 있었으나 마음은 그것을 알지 못하다가 문득 크게 다가온다. 텅 비어서 숲속의 빈터처럼 빛이 들어오고 슬픔이 뿌리내리고 있는 꽉 찬
몽롱한 것은 장엄하다 /이재무 나는 나무들에게 어느 날 의지가 생겨 직립 보행하는 존재가 되었으면 좋겠다 마구 도심지를 휘젓고 다니며 자동차를 뒤 업고 빌딩을 뒤 업고 못된 생각에 골몰하는 나 같은 놈들을 패대기쳤으면 좋겠다 아아, 나무들의 반란, 나무들의 혁명, 그리하여 마침내 수목의 제국에서 인간이 나무의 수족이 되어 순종하는 거룩한 노예가 되었으면 좋겠다 -리토피아 봄호에서 인간도 따지고 보면 자연의 하나이겠으나 자연 속에서 본다면 참 답답한 존재일 수도 있겠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자존심에 걸맞은 자연스러움을 찾아보기가 힘들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욕망을 숨길 수 있는 자연은 없다. 그러나 무모하게 자신만의 욕망을 위해 주변을 망가뜨리는 강력한 칼을 휘두를 수 있는 것이 인간이다. 그러니 이기적 욕망에 빠지지 않는 자연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도 가질 만하다. 말 없는 자연을 향해 겸허하게 고개를 수그리는 미덕이 사라진 지 오래다. 인간은 끝이 잘 보이지 않는 어디론가 무작정 가고 있다. /장종권 시인
인사 /이정주 내가 잘 가세요 했더니 그 아저씨는 아무 탈 없이 산을 넘어갔다. 내가 잘 가세요 했더니 그 아주머니는 아무 탈 없이 강을 건너갔다. 내가 잘 가 했더니 그 계집애는 무사히 바다 너머로 갔다. 바다 건너서 흔든 계집애의 손바닥이 반짝반짝 파도쳐 이쪽으로 밀려왔다. 산이 강을 덮쳐도 아무소리 나지 않았다. 고목에 등을 기대고 서서 잘 가세요 했더니 그 할아버지는 무사히 별자리 건너로 가셨다. 고개를 숙이고 잘 가 하고 울먹였더니 그 친구도 무사히 밤하늘에 도착했다. 나는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별빛이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이정주 시집 홍등에서 이별의 절차니 이별의 방식이니 이별에 대한 예의이니 이별에 대한 무수한 말이 있다. 인사에는 안녕이라는 것이 있다. 만나서도 안녕 헤어질 때도 안녕이라는 말이 사용된다. 하나 인사는 마음을 담는 밥그릇이다. 잘 가세요 에는 잘 가라는 마음이 담겨 있다. 하나 반어법처럼 가지 말라는 마음이 담기기도 한다. 우리는 살아오면서 붙잡고 싶지만 붙잡지 못하고 가라 해버린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것이 생의 괴로움이고 슬픔이다. 살면서 무수히 가지는 만남도 따지면 서로에 대한 조문이다. 막다른 이별 앞에서 잘 가세
숨막히는 뒤태 /이은규 당신을 뒤로 하고 길을 건널 때 왜 가시 돋친 말은 등 뒤에 와 박히는 걸까 언젠가 등 뒤의 점을 바라볼 수 없는 데에서 인간의 고독이 시작된다는 문장을 읽은 적이 있다 가시 돋친 마음이 와 박히는 뒤태 오늘 새로운 흑점 하나 생겼다, 숨 막히는 -<다정한 호칭>(문학동네, 2012)에서 시인의 허락도 없이 뒤에서 물끄러미 시인의 뒤태를 바라봅니다. 시를 읽는 일은 시인의 뒤를 따르는 일이라 자연스럽게 그리 됩니다. 시인은 흐느껴 울지는 않지만 자꾸 어깨가 들썩이는 듯합니다. 시인의 허락도 없이 어깨에 손을 얹습니다. 시가 우리를 다독여 주었기에 우리도 당연히 시인의 무게를 느끼려는 것입니다. 시인이 숨 막혀 하는 고독의 시작은 어려워 쉽게 읽을 수 없어도 그의 등 뒤에 돋아난 흑점은 마침표가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그 점들이 가시 돋친 상처라 해도 언젠가는 아물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시인의 등에 박힌 가시들을 하나 둘 떼 내듯 등 뒤에 솟은 점을 지그시 눌러 봅니다. 그러면 혹여 막힌 숨통 뚫리지 않을까. 시인의 허락도 없이. /이민호 시인…
꽃춤 /함순례 벚꽃잎 바람에 실려 돌아가시네 먼 길 걸어와 후끈하게 달아오른 온 몸을 열어 절정에 올랐다가 미련 없이 길 떠나는 저 비릿한 蘭章난장, 정류장 빈 의자에 잠시 올려놓은 맨발로 가는 생의 첫 마음을 읽네 신발을 벗듯 일생 꽃피우겠다는 중심을 향해 바짝 나투시는 꽃의 일념은 제 몸 향기로운 혈관을 짜 우주의 통로를 여는 일 가벼워라, 바람은 참 맑아서 꽃 진 자리 눈뜬 새잎이 허공을 밀고 가네 꽃나비 떼 무진무진 물들이며 날아오르네 - 「혹시나」 삶창 봄날 휴일에 결혼식과 장례식에 다녀왔다. 세상에 태어나 여린 풀잎 같은 몸과 영혼을 키우고 한 계(系)를 형성하고 살아가는 또 다른 시작의 자리를 에둘러 해가 지평선을 가까이 할 즈음 부음을 좇아 달려갔다. 애통하지 않은 시간이 어디 있으랴만 느닷없는 죽음의 선고는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한다. 한때 벚꽃처럼 화르르 피어올라 비릿한 절정을 순례하고 각각 꼭 그만큼의 나투시 하고는 마침표를 찍는 지점이었는지. 떠나는 사람은 더 이상 기다려주지 않는데. 남은 자의 후회를 담보로 이 생(生)의 기억을 짊어지고 우주의 통로를 여는 의식을 치르는 중인지. 신발 훌훌 벗고 맨발로 소리 삼키고 떠나는 사이, 꽃춤이라
밥격 /윤중목 내가 오늘의 점심메뉴로 800원짜리 또 컵라면을 먹든 8,000원짜리 불고기백반을 먹든 80,000원짜리 특회정식을 먹든 밥값에 매겨진 0의 갯수로 제발 나의 인간자격을 논하지 마라. 그것은 식탁 위에 또아리를 틀고 앉아 입과 혀를 교란시키는 한낱 숫자일 뿐. 식도의 끈적끈적한 벽을 타고 위장으로 내려가는 동안 앞대가리 8자들은 모조리 떨어져나가고. 소장에서 대장에서 직장으로 울룩불룩 창자의 주름을 빠져나갈 때 나머지 그 잘난 0자들도 모조리 떨어져나가고. 밥격과 인격은 절대 친인척도 사돈에 팔촌도, 이웃사촌도 아니다. - 윤중목, 문예계간 『시에』 2010년 가을호 경제적 수치를 ‘국격’(國格)으로 이해한다면 그처럼 위험한 인식도 없다. 사람의 인격이 경제적 수치로 가늠할 수 없듯이 나라의 품격 또한 그 국가정책의 가치와 국민의 높은 문화적 수준이라고 하겠다. 오늘 시인은 밥값이 인간의 자격을 논할 수 없다고 시대를 노래하고 있다. 자신의 과시를 위해 고가의 식사를 한다 해도 그 또한 모두 배설물이 될 뿐이다. 결국 인생에게 남는 것은 밥격이 아니라 인격이다. 시인은 밥격을 통해 점점 돈으로 인격을 판단하려는 세태를 꼬집
하드와 아이스크림 /김미정 그는 내 손을 잡지 않고 손가락 하나만 잡는다 늘 그런 식이다 작은 것에 몰두하는 날들이다 냉동실에 넣어 둔 하드가 물컹거린다 하드는 딱딱한 것이 본질인데 언제나 현상은 본질을 앞지르곤 한다 마음의 길고 딱딱한 의자에 앉아 그의 손바닥을 생각한다 내 손가락이 그의 손 안에 있을 때 태양은 나를 낯선 곳으로 데려가려 한다 그래도 안심을 한다 그가 잡았던 손가락을 만지며 뜨거운 모래밭으로 걸어간다 바람은 본질과 현상은 하나라고 말한다 -김미정 시집 ‘하드와 아이스크림’ /시와 세계 하드와 아이스크림은 무엇이 다르고 무엇이 같은가? 손을 잡는 것과 손가락 하나만 잡는 것은 무엇이 다르고 무엇이 같은가? 우리는 현상에 집착하기 쉽다. 손가락 하나만 잡는 것과 손을 잡는 것으로 사랑의 본질을 논할 수는 없다. 여기서 믿음과 의심의 문제가 발생한다. 재미와 사유가 동시에 발현되는 시이다. 달은 보지 않고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보는 오류를 범하지 않기를. 그가 잡았던 하나의 손가락을 만지며 뜨거운 모래밭으로 걸어가 보시라. 본질과 현상은 하나라고 말하는 바람의 속삭임이 비로소 들릴 것이다. /이미산 시인
琴詩(금시) /蘇東坡(소동파) 거문고를 읊은 시 若言琴上有琴聲(약언금상유금성) 거문고에 소리가 있다하면 放在匣中何不鳴(방재갑중하불명) 갑 속에 두었을 땐 왜 안 울리나 若言聲在指頭上(약언성재지두상) 거문고 소리 손가락 끝에서 나는 거라면 何不于君指上聽(하불우군지상청) 어찌 그대 손가락에서 소리가 들리지 않나 -출처 한시미학산책 <정민 지음/솔출판사 1996>외 참고 어릴 때 정읍사를 읽고 눈물 글썽인 적 있었다. 천 년 전에도 사람에게 뜨거운 피가 흘렀다는 사실에, 또 한 번은 얼굴도 모르는 어머니 생각에, 하지만 친구들은 같은 교과서를 보고도 반응이 없었다. 달을 보고 느낀 감정만큼 이해하는구나. 그게 시로구나. 무릎을 치는 순간이었다. 시인은 거문고 소리 그 깊은 곳으로 들어가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거문고가 울지 않아도 그 소리 몸통을 울려 올 것이다. 거문고를 튕겨 보았을 것이다. 튕기지 않아도 손끝이 늘 얼얼할 것이다.시는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지경에서 스스로 빛이 난다. /조길성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