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잠 김칫국에 밥 말아 먹는 날 보고 시할머니는 댕길 때 많이 먹어라 늙으면 암 맛도 모른다 애를 업고 걸리고 시장에 갔더니 펑튀기 파는 아주머니는 날 보고 힘들어도 그때가 좋은 때다 모퉁이에 서서 수다 떠는 분꽃 같은 처녀애들을 종종걸음으로 지나치며 나는 부러워 자꾸 고개 돌아간다 그 시절, 자리 비워두고 어디 갔었나 -출처-이잠 시집 『해변의 개』(작가세계, 2012) 그 시절 다 겪었는데 새롭지요. 스무 살 때는 십대의 청춘이 부럽고 서른엔 스무 살의 청춘이 부럽고 마흔이 되니 서른의 젊음이 부러운 걸요. 자꾸 뒤만 돌아보네요. 우리에겐 아직 쉰도 있고 예순도 있는데 말이지요. 우리 가끔은 부러워하지 않기로 해요. 그 시절 우리 그 자리에 있었다고 믿어요. 어느 누군가에게는 살아보고 싶은 오늘일 수 있잖아요. 그렇죠?…
/안희두 서호를 품어 돌면 항주가 떠오르고 술 한 잔에 동파고기 베풀고 베풀란다 베풀다 귀양을 가도 베풀며 살으란다 이 시는 중국의 옛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춘추전국시대에는 월(越)나라였다가 삼국시대에는 오(越)나라였던 항주는 22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항주의 서호는 항주의 서쪽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이태백, 소동파 등 수많은 사람들이 시를 지었던 곳으로 중국 10대 명소 중 하나이다. 너무 넓어 바다와 같은 서호는 중국의 4대 미인인 서시(西施)가 태어난 곳으로, 전해오는 얘기로는 춘추전국시대 오나라의 왕 부차(夫差)가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장작더미 위에서 잠을 자며 월나라의 왕 구천(句踐)에게 복수를 맹세해 결국 월나라에 승리를 했다. 그러나 부차에게 패배한 월나라 왕 구천이 미인계로 아름다운 서시를 부차에게 보내어 오나라 왕 부차가 서시의 미모에 빠져 나랏일을 전혀 돌보지 않아 결국 오나라를 망하게 했다. 쓸개를 먹으며 원수를 갚아 와신상담(臥薪嘗膽)이라는 말이 나오게 되었다.
/우대식 파울 첼란의 시에 이런 구절이 있었던가 아름다운 시절은 흩어져 여자의 등에 반짝인다고 시선을 거둔다 운명이란 최종의 것 정선 강가에 밤이 오면 밤하늘에 뜨는 별 나에게 당신은 그러하다 성탄절의 새벽길 눈이 쌓이기 시작하면 기찻길 옆 제재소에서는 낮은 촉수의 등이 켜지고 이미 오래전에 예언한 미래가 사라지는 것들을 받아내고 있다 선명한 모든 것들을 배반하며 산기슭으로 흐르는 눈발 속에서 당신의 얼굴을 그리는 일은 또 언제나 부질없다 가끔 당신을 생각한다 당신을 생각하며 밥을 먹는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밥을 남긴다 이것이 나의 마지막 사랑이다 2013년 시와 표현 가을호 사랑은 사람의 눈을 밝게 한다. 예민하게 한다. 그러므로 미세한 것을 보게 된다. 그러므로 사랑에 빠진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순결하고 때 묻지 않는 감각으로 상대편을 바라본다. 느낀다. 아울러 사랑을 하는 사람의 호흡, 기침, 웃음소리, 말소리마저 벼락처럼 느낀다. 정선을 떠난다는 것은 사랑을 두고 떠난다는 것이 된다. 사라지는 것 부질없는 것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그러나 밥을 먹는 다는 행위는 일상을 유지해 간다는 것이다. 일상에서 조금씩 밥을 남긴다는 것은 결국 사랑을 떠날 없다는…
/박노빈 개울가 낭떠러지여야만 굴을 파고 둥지를 튼다, 그 예쁜 물총새는. 절망에서 오색 꿈 깊이깊이 키운다 날마다 개여울에 나와 앉았다가 샘물이 도른도른 모여 흐르는 찬 개울물 박차고 물무늬 섬광을 물어 아이에게 준다 세속의 노래와 단절한 채 절망의 벽에서 새하얀 비단실 꿈으로 수천 번 동여맨 동안거의 유폐가 처절하여 어둡고 깊을수록 무지개빛 용오름을 뿜는다. -‘날마다 개여울에 나와 앉~’ : 김소월 시 <개여울>에서 파랑새목 물총새과에서 가장 작은 종(種)인 물총새는 우리나라 전역에서 번식하는 여름새이다. 이 시에 묘사돼 있듯이 물총새는 오색찬란한 색채를 자랑한다. 등은 진주빛 도는 청색과 선명한 녹색이다. 멱은 흰색이고 가슴과 배는 밤색이다. 목 측면에는 밤색과 흰색의 얼룩무늬가 있다. 부리는 검은색을 띠며, 기부는 붉은색, 다리는 진홍색이다. 이러한 물총새는 겨울이면 남쪽으로 날아가 월동한다. 이 시에서는 그런 물총새의 습성을 ‘동안거’로 묘사했는데, 겨울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얼마나 찬란한 색체를 뽐낼 수 있느냐가 결정된다. 이는 인간의 인생사와 맞닿은 이치이기도 하다.…
/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름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 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이 시는 곽재구 시인의 등단작이며, 아름다운 서정성이 빛나는 시이다. 이 시의 화자는 역이라는 공간을 통해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삶의 애환을 형상화하고 있다. ‘사평역’이 상징하는 바는 ‘삶의 도정’, 곧 길이다. ‘길&rsquo…
/이시영 아버지 돌아가시자 아버지를 따르던 오촌당숙이 아버지 방에 들어가 한참 동안 말이 없더니 아버지가 평소에 쓰시던 모자를 들고 나오면서 이렇게 말했다. “오늘부터 이 모자는 내가 쓰겠다.” 그러고는 아주 단호한 표정으로 모자를 쓰고 사립 밖으로 걸어 나가시는 것이었다. -- 이시영시집 「바다 호수」, 문학동네, 2004년 오촌당숙은 친구처럼, 형처럼 아버지를 따랐을 터이다. 요즘처럼 서로 왕래 없이 사는 사람들에게서 점점 잊혀져가는 가까운 친척 형제들과의 소통의 기억, 동네 골목을 쏘다니며 어른들의 지청구를 함께 받았기도 했을 그리운 관계가 사라진다. 오래오래 따르고 싶어서 아버지의 모자를 쓰고 집을 나선 단호한 오촌당숙의 문상이 깊이 박힌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낡은 은수저를 쓰다가 잃어버렸다. 노모는 가끔 물건을 둔 곳을 기억하지 못한다. 살아생전 효도 한번 못해드린 불효가 빛 잃은 은수저로 기억을 퍼 넣는 것으로 지워질까마는 고이 닦아 쓴다. 아버지 기일이 어느새 훌쩍 다가왔다. 보고 싶은 아버지께 나무숟가락 놓아드리고 은숟가락 꼭 쥐고 깊어지는 가을 한 끼 거두어야겠다.…
/이경애 -일 년만 일하고 올게요 아들네가 떠난 뒤 하루에도 몇 번씩 지구본을 돌리는 할머니 일 년 내내 덥다는 나라 돋보기를 쓰고도 찾기 힘든 나라 -이 놈은 왜 이리 삐딱하게 생겼누 지구본 따라 점점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할머니 -이경애 ‘제2회 열린 아동문학 작품상’ 수상작 지구가 기울어진 채 자전하는 이유가 과학적으로 밝혀진 바는 없다고 한다. 반듯하게 축을 세운 지구라도 좋았겠지만, 23.4도 기울어졌기에 이 또한 묘미라고 하겠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있고, 다양한 기상 현상을 불러오는 지구의 기울기. 이러한 과학적인 근거에 앞서 어떤 그리움으로 바라보는 시선은 얼마나 낭만적인가. 돋보기를 쓰고 지구본을 돌리며 아들이 살고 있다는 타국을 하루에도 몇 번씩 짚어보는 어머니의 사랑. 기울어진 지구본을 따라 할머니의 허리가 굽어간다는 상상은 뭉클하면서 숙연하다.…
/이상윤 젖은 연탄 피우는 연기 움푹 꺼진 부엌에 질팍히 고인 밤이면 우리는 좁은 필통 속 연필처럼 나란히 누웠다 깎아보면 심이 곯아 다 부러져 있는 여섯 자루의 아픈 연필 찬 기운이 기어들지 못하도록 한 몸으로 붙어 누운 새벽 잠에서 깨어나 바라본 유리창은 밤새 여섯 자루의 연필들이 뱉어낸 입김에 온통 눈 덮인 풍경 -시와 미학/ 213년 겨울호 단칸방이란 말 오랜만이다. 지금은 좀 더 현대화된 시설을 갖추고 원룸이라 부르지만 단칸방과 원룸의 정서는 사뭇 다르다. 젖은 연탄을 피워놓은 부엌엔 매캐한 연기가 들어차고 방안엔 여섯 식구가 가지런히 누워있는 모습이 보인다. 마치 깎아보면 서로 부딪쳐 심이 다 부러져 있는 연필처럼 가난한 식구들 부대끼며 사느라 저마다 아픈 상처를 안고 있지만 바짝 몸을 붙여 서로의 체온으로 추위를 이기고 단잠을 자고 난 아침, 그 식구들의 입김으로 유리창엔 화려하게 눈 덮인 풍경화 한 폭 그려져 있던, 춥지만 아름답고 눈가 촉촉해지는 시이다. 문득 두고 온 옛집에 가보고 싶다.…
回文 /조용환 맴돌고…… 맴돌고…… 한참을 다녀와서 풀잎에 내려앉은 잠자리 한 마리 사르르르…… 日月보다 빠른데 물뱀 한 마리 밑줄 그으며 강을 건너온다 단 한 줄이다 강물과 햇살과 초록이 잠시 놀다 간 길, 그새 그걸 다 읽고 자취조차 없는 걸 보면 감쪽같다 --조용환 시집 <숲으로 돌아가는 마네킹>에서 回文이란 바로 읽으나 거꾸로 읽으나 뜻이 같은 문장을 말한다. 그러니까 어찌 보면 문장 전체를 휘어서 머리와 끝을 이어버리면 곧장 원의 세계가 될 법도 하다. 있다가 없다가, 없다가 있다가, 보였다가 사라졌다가, 사라졌다가 보였다가, 삼라만상의 원리도 혹시 이와 같지는 않을까. 시인의 생각이 대단히 재미있어진다. 윤회까지 가지 않더라도 우리는 늘상 이런 사실을 목도한다. 앞과 뒤는 붙어 있어 하나로 움직일 수 있다. 그렇다면 앞이 없고 뒤가 따로 없게 된다. 앞뒤를 구별하는 것은 논리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시 한 편을 거꾸로 읽는다고 해서 시의 뜻이 달라지진 않으리라. 소설 한 권을 거꾸로 읽는다고 해서 줄거리가 달라질까. 시작도 끝도 끝이고 시작이다.…
/신금자 며칠째 연이어 비가 내린다. 오늘도 어김없이 아파트 뒷길로 난 논둑길 사이로 맹꽁이들이 대거 나타났다. 촉촉한 날씨에 기분이 좋아진 맹꽁이들은 차가 다니는 도로까지 밀고 내려왔다. 물벼락을 치며 내빼는 택시를 보고도 맹이야! 꽁이야! 겁도 없이 차도를 가로질러 갈 모양이다. 웬 일인가? 집 앞 베란다에서 바라보이는 동산 밤나무에 둥지를 튼 까치들은 하루 종일 기척이 없다. 아침이면 운동을 하느라 야단법석을 피우는 녀석들이 운동은커녕, 밥을 먹는 기미도 없이 꼼짝을 안 한다. 96년 <순수문학>을 통해 문단에 나온 신금자 수필가의 산문시다. 그는 비상교육 고교 국어교과서에 논술문 『꿈의 전략을 세워라』를 집필했다. 이 시는 장마를 시간적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맹꽁이의 모습을 익살스럽게 그리고 있다. 촉촉한 날씨에 기분이 좋아진 맹꽁이들이 차가 다니는 도로까지 밀고 내려와 겁도 없이 맹이야, 꽁이야 하기 때문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흐리고 젖은 하늘 때문에 까치는 하루 종일 기척이 없다. 누군가에게는 기분 좋은 날이 누군가에게는 흐린 날이 될 수도 있음을 사색하게 한다. 인정 많고 단아한 내 누님 같은 참 아름다운 수필가다. 독자들과 다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