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평에서 국수를 먹다 /이상국 봉평에서 국수를 먹는다 삐걱이는 평상에 엉덩이를 붙이고 한 그릇에 천원짜리 국수를 먹는다 올챙이처럼 꼬물거리는 면발에 우리나라 가을 햇살처럼 매운 고추 숭숭 썰어 넣은 간장 한 숟가락 넣고 오가는 이들과 눈을 맞추며 국수를 먹는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사람들 또 어디선가 살아본 듯한 세상의 장바닥에 앉아 올챙이국수*를 먹는다 국수 마는 아주머니의 가락지처럼 터진 손가락과 헐렁한 셔츠 안에서 출렁이는 젖통을 보며 먹어도 배고픈 국수를 먹는다 왁자지껄 만났다 흩어지는 바람과 흙 묻은 안부를 말아 국수를 먹는다 -- 이상국 『어느 농사꾼의 별에서』 창비시선 2005 <옥수수로 만든 국수> 어디선가 살아본 듯한 세상의 장바닥에 앉아 먹어도 배고픈 국수로 허기를 지우는 사람들. 오래 전에 수원역에서 버스터미널 쪽으로 가는 길가에 부부가 하는 허름하고 작은 국수집이 있었다. 퇴근길에 가끔 동무들과 들러 오백원짜리 동전을 놓고 멸치국물에 김 가루 살짝 뿌려진 국수를 단무지와고춧가루만 든 김치 몇 조각으로 후루룩 먹고 나오곤 했었다. 일터가 다른 곳으로 옮겨지고 나서 한참 후 그곳에 갔을 때 여전히 노부부가 국수를 말고 있어 반가웠
누가 또 바람에 쓰러진 고춧대를 세우고 있다. 누가 또 수취인 부재로 반송된 편지로 울고 있다. 내 2 시의 구름은 어디로 흘러가는지 금속의 심장을 가진 새가 나르는데 누가 또 이별의 흔적 위에서 소주잔을 하염없이 비우고 있다. 한 땀 한 땀 기웠던 사랑의 실밥이 터져버려 괴로운 사람이 공복의 쓰라린 속에서 낙타로 터벅이고 있다. 내 2 시의 구름은 잔털이 수없이 돋아난 텔레파시가 눈처럼 펄펄 휘날리는 하늘을 건너 어느 목장으로 아니면 어느 남미의 바닷가로 용연향처럼 떠밀려 가는지 내 2 시의 구름에는 가사가 투명한 노래가 실렸는데 내 2 시의 구름에는 처녀막을 가진 내 영혼이 누웠는데 아직도 구름 노예사냥꾼이 날 뛰는지, 유린하는지 내 2 시의 구름을 찾다가 내 2 시의 구름 먼 곳에서 고꾸라지는 내 야윈 그림자들 -2013년 시와 경계 봄호 일상은 슬플 수 있다. 그러나 슬픔 속에서 희망을 보는 것이 사람이다. 괴로움 속에서 사람은 끈질기게 희망을 키운다. 가장 어두울 때 빛의 존재를 실감하고 빛을 향하는 것이 생존의 본능이자 사람이 가진 고귀한 장점이다. 생에 처음으로 끝없이 우는 여자의 등을 다독여 준 적이 있다. 울어라 한 적이 있다. 울다가 보면…
귀환 /쉼보르스카 돌아와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속상한 일이 생긴 것이 틀림없다. 옷을 입은 채 잠자리에 들어서는 담요 아래로 머리를 파묻고 두 무릎을 끌어당겼다. 나이는 마흔 살 가량, 하지만 이 순간엔 아니다. 있는 - 일곱 겹 살갗 너머 엄마 뱃속, 보호되는 어둠 속에 있는 동안, 내일은 전 은하계를 비행할 때의 인체의 항상성恒常性을 강의할 거지만, 일단은 웅크린 채 잠이 들었다 쉼보르스카 시집 ‘모래 알갱이가 있는 풍경’ / 문학동네 엄마 뱃속의 시절을 기억하진 못하지만 엄마 뱃속의 시절이 가장 행복했노라고 누구나 말한다. 우리는 필연적으로 엄마 뱃속에서 분리되었으므로 필연적으로 엄마 뱃속을 그리워한다, 특히 속상할 때. 세상살이는 속상한 일들의 연속이다. 누구를 탓할 것인가. 탓한다는 것은 또 다른 불화의 불씨가 된다. 조용히 혼자서 처리해야한다. 태어났기에 겪어내야 하는 삶의 과정이다. 마흔 살이나 되었으니 엄마를 목청껏 부를 수도 없겠다. 그러니 자신의 두 무릎을 끌어당겨 엄마의 뱃속을 만들자. 일곱 겹 살갗으로 보호되는 엄마의 뱃속, 그 따뜻함 고요함 속에 풍덩 빠져보자. 무의식에 남아있는 행복한 기억들이 달려올 것이다. 달려와 어루만져
장마 /신영진 보다 긴 올여름 장마는 국회의사당으로부터 시작됐다 몇날 며칠 똬리를 틀고 앉아 낮은 먹구름이 까마귀 떼처럼 달라붙어 햇빛을 갉아먹는 아귀다툼을 본다 솨악 솨악 거리는 빗줄기는 비늘처럼 쏟아지고, 대기는 몸통같이 꾸물대며 세상을 온통 끈적거리게 한다 올 여름 장마는 죽은 배얌 속에 우글대는 구더기보다 더 구역질이 난다 아직도 끝나지 않는 난장판처럼…. 올여름 장마는 유난히 길다. 40여일 계속된 장마로 채소 가격이 큰 폭으로 오르면서 밥상물가도 들썩이는 등 서민물가에 빨간불이 켜졌다. 그러는 와중에 정치권은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으로 여야가 논쟁을 벌이느라 시끄럽다. 장마는 남쪽과 북쪽의 두 기단이 만나 형성된다. 그런데 이 시의 화자는 올해 장마가 국회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말한다. 민생을 뒤로 한 채 자신의 목소리만 높이는 정치인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것이다. 이제 40여일 지속되었던 장마는 소강되었고, 국가안위가 달린 정치인이 국민의 대표가 되었다는 익숙한 얼굴들이 소란스럽다. 그러나 정치인들이 민생을 뒤로 한 채 아귀다툼을 멈추지 않는다면 장마는 그치지 않을 것이다. 장마가 그치고 화창한 날들이 시작되기를 바랄 뿐이다. /박병두 시인
문신文身- 장미 /김효경 지나온 길은 언제나 아득해지고 다가올 하늘은 푸른 꿈이지 오늘도 팔을 쭈욱 뻗어 하늘을 가리키고 있어 멀리 바라보는 눈초리는 언제나 빛나는군 입술은 달콤하고 부드럽고 내미는 손은 온통 붉은 색이군 내 몸은 가시투성이 그럼 이제 나와 손잡아 볼까 주머니 깊숙이 꿈틀거리는 내일을 넣고 -출처 김효경 시집 <타클라마칸의 바람개비/문학의 전당 2007> 지나온 길이 아득해지자 다가올 하늘이 푸른 꿈이라고 가시투성이로 건너가는 삶은 온통 피투성이였으나 시인은 그 손을 잡아주고 싶어 한다. 아니면 자신의 손을 내어 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가을이다. 요즈음처럼 푸른 하늘을 바라보노라면 나도 팔을 쭉 뻗어 어딘가에 가서 닿고 싶다. 만지고 싶다. 가시에 찔려 뼈째로 통증이 드러나더라도 가야겠다. 상처를 문신으로 온몸 두르고서 주머니 속 깊이로는 꿈틀거리는 내일을 넣고. /조길성 시인
그네 /문동만 아직 누군가의 몸이 떠나지 않은 그네, 그 반동 그대로 앉는다 그 사람처럼 흔들린다 흔들리는 것의 중심은 흔들림 흔들림이야말로 결연한 사유의 진동 누군가 먼저 흔들렸으므로 만졌던 쇠줄조차 따뜻하다 별빛도 흔들리며 곧은 것이다 여기 오는 동안 무한대의 굴절과 저항을 견디며 그렇게 흔들렸던 세월 흔들리며 발열하는 사랑 아직 누군가의 몸이 떠나지 않은 그네 누군가의 몸이 다시 앓을 그네 -문동만 시집 『그네』(2009, 창비) 그 누군가 한 번은 이별한 경험이 있겠지. 떠난 그의 자리에 남아 있는 반동, 흔들림. 내 중심이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은 그 중심에 흔들림이 지키고 있다는 것이다. 떠나는 몸이 사랑이든지 사유든지 신념이든지 저항이든지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리라. 그 무엇이 떠나든지 그 흔들림으로 우리는 살아가는 것이겠지. 그것이 사랑이라는 것이겠지. 한동안 앓더라도 흔들림이 계속되는 한 우리는 사랑을 계속 한다는 것이지. 그것이 따뜻한 진동이며 세월일 것이라 생각하며 오늘도 흔들거리는 따뜻한 그네에 앉아 흔들거리는 별빛을 헤아려보는 것이다. /유현아 시인
지퍼 /박후기 나는 밤마다 지퍼를 열고 몸만 빠져나오고 혀는 아무 때나 지퍼를 열고 몸 밖으로 빠져나온다 이 악물고 살아라, 죽기 전 아버지가 말했다 출처-내 귀는 거짓말을 사랑한다 / 2009 / 창작과 비평사 자본의 확대재생산에 복무하는 온갖 종류의 직업들, 그 사이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오염된 폐수들, 인간중심적 기계문명 속에서 우리는 매일 매일 몸의 지퍼를 열고 닫는다. 몸속에 들어있던 말들이 폐수처럼 쏟아져 나올 때가 많다. 범람하고 있는 말들이 서로에게 상처로 남을 때가 많다. ‘몸’의 은유는 ‘말’이다. ‘말’의 은유는 몸을 움직이게 하는 ‘마음’이다. ‘마음’이 전하는 말들이 비수로 남는 일들이 매일 매일 많아진다. ‘이 악물고 살아’야 할 일들이 많아진다. /권오영 시인
미안하구나 /송재학 외할머니는 밥공기에서 반쯤 밥을 자꾸 들어낸다 외숙모는 더 큰 그릇에 밥을 담아 외할머니가 밥을 들어내도 일정량이 되도록 조절해왔다 아무도 없을 땐 밥 한 공기를 다 비우신다 같이 식사할 때만 자꾸 밥을 비워낸다 반 공기의 밥도 억지로 먹는다고 중얼거리신다 2 아흔 살 외할머니의 외출 가방은 아직도 악어, 악피(鰐皮)가 유 행하던 시절의 유산이지만, 인조 가죽이 분명하다고 내 삐띡한 의 혹은 웃고 있다 그렇더라도 악어과 악어목의 악어 가방은 지금 눈꺼풀 닫고 수면 높이에서 응시중이다 육식성 악어도 가끔 지퍼 열고 허기를 채운다 무얼 삼키는지 궁금하지만 명절이면 악어새 닮은 꾸개꾸개 천 원짜리 지폐가 내 아이들 손에 슬며시 날아와 앉는 날도 있으니 그게 죽은 악어 껍질이 아니라 영혼만 슬그머니 꽁무니 뺀 늙은 악어가 쥐 죽은 듯 가방 흉내를 내는 것이다 3 외할머니는 묘법연화경을 태워버렸다 아무리 경을 읽어도 당신은 아직 이승이라고 쫑긋하셨다 파킨슨병으로 하루에도 몇 번 정신이 오락가락하지만 맑은 마음으로 읽어가던 묘법연화경, 과두 문자처럼 비뚤비뚤한 자필 한글본 불경이었다 출처-송재학 시집 내간체內簡體를 얻다-2011년 문학동
용화사에 들다 /은결 3월의 시린 언덕을 올라 첩첩불경의 법문을 지나 적멸고요의 본존불 앞에 생의 가파른 길을 내려놓는다 팽팽했던 겨울은 지나가는 것 벨벳꽃잎 어머니도 지나가는 것 연꽃잎 속 저 부처 겹겹슬픔까지 녹아내리는 소신공양의 불꽃너울을 품었을까 다비의 화염이 사그러지듯이 마침내 무심의 재가 되어 엎드리듯이 있고 없음이 하나인 불가에서는 이승과 저승의 경계가 없다. 생과 사의 경계는 법문을 지나면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사찰의 초입에 들어서 있는 다리도 이승과 경계를 이어주는 상징으로 자리 잡고 있다. 용화사에서 이 시의 화자는 생의 가파른 길을 내려놓고 있다. 그리고 저승으로 떠나신 어머니와 하나가 되고 있다. 영화 <대부>에서는 대부가 죽자 죽음의 이미지를 가리기 위해 고인의 얼굴에 화장을 짙게 했다. 서양에서는 죽음을 두려워해서 죽음의 이미지를 우리의 삶과 동떨어지게 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동양에서는 이승과 저승을 분리하지 않는다. 이승과 저승은 서로 하나로 이어져 있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영화 <축제>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시의 화자 역시 이승과 저승을 하나로 잇고 있다. 죽음은 더 이상 슬픈 일만은 아닌 것이
세월 /권혁소 하얀 꽃나무에 하얀 꽃 피었다 작년에도 피었더니 올해도 피었다 작년엔 이리 반갑지 않았는데 올해는 이리 반갑다 권혁소 시집 『아내의 수사법』/푸른사상 28 시간은 항상 흐른다. 하지만 그 흐름을 의식하지 못하다가 어느 계기를 만나면 문득 깨닫는다. 그 계기는 공간을 의식하는 순간이다. 공간에 거주하는 존재들을 의식할 때다. 젊음이 왕성했을 땐 어떤 일에 몰두하다가 고개 들면 어느새 어둠일 때가 많았다. 사랑이라는 무주 공간에 떠 있다가 사랑이 떠났을 때 문득 시간이 흘렀음을 피부로 느끼듯 세월 역시 우리가 정신없이 사는 동안엔 잠시 잊는다. ‘작년에 핀 꽃이 올해도 피었다’고 느꼈을 때 아니, ‘반갑지 않았던’ 꽃이 ‘올해 이리 반갑다’고 느꼈을 때 문득 나이가 들었고 늙었으므로 무상함을 느낄지도 모른다. 하지만 누구나 느끼는 것은 아닐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만이 그 존재에게 의미를 부여할 것이다. 시인은 그런 사람이다./성향숙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