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기국숫집에서 /김광렬 세 부자가 고기국숫집에 깃들었다 아비는 늙은 노새를 닮았다 어디서든 권위가 안 설 것 같은 머리털이 몽당 빗자루 같은 왜소한 아비와 같이 온 두 남매가 쑥부쟁이처럼 고왔다 아비가 자식들의 그릇에 말없이 돼지고기 한 점씩 얹어주었다 나는 소싯적 찌든 아비를 얼마나 부끄러워했는가 가슴이 아리게 면도날이 서는데 서럽긴 해도 저들은 덜 아프겠다 김광렬 시집, 그리움에는 바퀴가 달려있다/푸른사상/2013 세상의 모든 아비들은 패자다. 아들은 아비를 보며 위축되거나 거만해진다. 지척의 아비를 사랑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머리털이 몽당 빗자루 같은, 늙은 노새 같은 아비, 찾아온 친구에게 때마침 마당을 쓰는 아비를 부리는 머슴이라고 했다는 옛이야기도 있지 않은가. 그렇건 말건 말없이 자식의 그릇에 돼지고기 한 점씩을 올려주는 아비의 마음이 얼마나 느꺼울지 자식을 키워본 사람은 안다. 어쩌면 가고 없어야만 눈물 나게 그리운 이름 아버지. /최기순 시인
허공우물/정수자 부답의 메일 끝에 시 한 편을 건져들고 이명과 대작하듯 제 메아리에 제가 취하는 밤이다 허공 우물에 목을 길게 드리우는 문병마냥 다녀오던 노모의 빈 방께로 어둠도 혼자 고이는 고아 같은 밤이다 마음이 풍덩풍덩 빠지는 폐가의 우물 같은 그리는 그만큼씩 다 별 되는 건 아니라도 부르는 그만큼씩 더 빛나는 건 아니라도 밤이다 되삼키는 이름에 은하강도 붉게 젖는 정수자 시집 <허공우물/천년의 시작 2009년> 시를 쓰는 사람은 많으나 시를 살아내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는 생각을 하며 살다가 <저녁의 뒷모습> <저물녘 길을 떠나다> 등의 시집을 통해 시인을 만나며 시와 사람이 어쩌면 그렇게 닮았을까 싶었다. 어머니 떠나보내고 빈방을 들여다보는 시인의 눈빛이 허공 우물보다 깊다. 어둠도 혼자 고이는 고아 같은 밤 은하강도 붉게 적시던 깊은 우물 같은 마음이 시를 쓰게 했으리라. 오롯이 시만을 살아내는 시인의 그 깊디깊은 속내가 문득 그리운 밤이다. /조길성 시인
또 발이 묶이다/이상훈 우물가에 쪼그려 앉아 어떻게 하면 우물 속에 빠진 달을 길어 올릴까 궁리궁리한 끝에 결국 포기했다 북극 칠성의 무게를 재려고 푸줏간에서 저울을 빌려왔다 눈금 읽는 방법을 몰라 도로 가져다주었다 옆 마을 용한 점쟁이 왈 금년에는 애정운이 안 좋은 괘가 나왔다 하여 몹시 실망하여 점집을 빠져나왔다 집으로 가는 길에 두루마기 편지지 낱장을 사서 왔다 손꼽아 기별을 기다리다 못 견디어 심부름 값을 주고 인편으로 편지를 보냈지만 모두 감감무소식이었다 찬 겨울이 오기 전에 낙향하려고 주섬주섬 봇짐을 싸는데 기러기가 먼저 찾아오는 바람에 또 발이 묶여 일 년을 더 눌러앉아 살기로 했다 -이상훈 시집 <나비야 나비야>에서 사람은 꿈을 꾸며 산다. 꿈이라도 있어야 이승을 버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꿈이라는 것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어쩌면 절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옳은 말일 수도 있겠다. 어쨌거나 꿈을 꾸지 않으면 인생이 참 팍팍하고 답답하다. 하지만 꿈은 꾸어보았자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이루어지는 꿈과 시인의 꿈은 좀 다르다. 시인은 이루어지는 꿈은 처음부터 꿈이라 하지 않는다. 그래서…
정오/임동확 아스팔트 위의 고양이, 길가 풀섶의 앉은뱅이 망초, 냉장고 속의 마늘 싹들까지 가장 외롭고 높게 맑고 푸른, 그 어느 하나 빠트리지 않은 채 남김없이 빛나는 생의 정오 오로지 흠가지 않는 보석처럼 찬란한 눈망울을 마치 처음인양 깜박이며 다가오는 한 아이가 제 어미젖을 빨다 방긋 웃고 있고, 또 은어 새끼 한 마리가 제가 태어난 강을 떠나 막 바다로 향하고 있을 때 소리도, 형체도 없는 그 하늘이 그저 두려울 뿐 어찌 더 이상 무엇이 괴로우며 아쉬울 것인지요 논둑에서 긴 목을 빼고 있는 쇠백로 한 마리, 전나무를 기어오르는 칡덩굴, 비 개자마자 밤꽃을 탐하는 호박벌 한 마리 더욱 뚜렷하고 투명하여 제 속까지 낱낱이 드러내는 환한 비밀의 대낮 금세 달라붙은 어두운 그림자조차 녹여낼 듯 뜨겁게 입술과 입술을 맞댄 채 마치 마지막인양 키스를 나누는 그 누군가 여기 결코 죽어서가 아닌, 살아서 기어이 갈참나무 숲을 이루고, 드디어 보리밭 위로 종달새 울음이 떠오를 때 끝끝내 안식을 모르는 생멸과 재생이 끝없이 이어지는 이 소란하고 분주한 땅의 그 어느 이슬 한 방울인들 우연히 맺혀있을 것인지요 어찌 축 늘어진 8월 태양 아래의 호박잎, 오솔길에 달라붙은…
방/김승기 사람들은 이제 모두 나비가 되려나 보다 나무 가지처럼 뻗어간 골목 구석구석 칸칸이 횃대가 마련되고 그 위에 다닥다닥 고치 속 마다 고단한 몸을 들여 놓고 비상의 긴 꿈을 꾼다 몇 잠을 더 자야 나비가 되려는지 - 원룸 세놓습니다 그 속에서 부화된 나비는 지금 어디를 날고 있을까? 정신과 의사인 김승기 시인의 시는 인간을 따뜻하게 품으려는 마음이 바닥에 늘 깔려 있다. 그로부터 치료는 환자의 이야기를 들어 주는 것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들었다. 얼마나 숭고한가? 남의 이야기를 듣기 보다는 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환자가 쏟아내는 이야기가 만수위로 차올라도 시인은 꿋꿋이 듣는다. 그것이 환자를 치료하는 것이고 의사는 순전히 자신을 버리고 환자와 동일시되어 웃고 울고 할 것이다. 그런 따뜻한 감성으로 늘 좋은 시를 써내는 김승기 시인은 방을 희망의 자궁으로 전환시켰다. 방은 모든 것을 잠으로 곱게 다려 날개를 달아주는 곳이다. 호접몽을 꾸는 방이다. 그 안에서 나비처럼 가벼운 영혼을 가지게 된 사람은 새털구름 흐르는 파란 하늘 속으로 끝없이 하늘거리며 날아갈 것이다. 자유를 마음껏 누릴 것이다. /김왕노 시인
먹돌 /이관묵 찾아뵈려고 문 두드렸더니 열어주신다 한참을 물끄러미 내려보시다가 혀 끌끌 차며 도로 문 닫으신다 쾅! 이관묵 시집 <시간의 사육>에서 깨달음의 정체는 무엇일까 생각한 적이 있다. 깨달음과 만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생각한 적이 있다. 사람이 짐승과 다른 것이 있다면 이 깨달음이란 것도 한 몫을 차지할 것이다. 그런데 굳이 사람들은 왜 짐승들과 자신들을 구별하려 하는 것일까. 인간의 논리적인 사고체계는 정말 짐승들과 다른 특별한 그 무엇일까. 알 수 없다. 죽어있는 먹돌에 생명을 불어넣는 일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어려운 일은 그 먹돌 속으로 들어가는 일이고, 그 먹돌과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는 일이다. 부질없어 보이지만 사람이 짐승과 다르게 더 사람다워지는 연습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스스로 생명력을 불어넣어준 이 먹돌이 오히려 혀를 찬다. 삼라만상의 세계는 인간을 넉넉하게 바라보고 있지만 인간은 그 세계에서 볼 때에는 아직 미물에 지나지 않는다. 절망과 반성의 울림이 강력하다. 먹돌 속으로 들어간 시인의 생각이다. /장종권 시인
날개/반칠환 저 아름다운 깃털은 오솔오솔 돋던 소름이었다지 창공을 열어 준 것은 가족이 아니라 무서운 야수였다지 천적이 없는 새는 다시 날개가 사라진다지 닭이 되고, 키위가 된다지 『포엠포엠』 2013년 여름호 VOL.58 알다시피 진화는 생존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가장 편안한 상대는 존재의 발전에 아무런 영향력이 없다는 것은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 나를 위협하는 존재라야 그것에 대항해 뇌가 작동하고 살아낼 길을 모색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화라는 측면에서 가족은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한다. 새에게 ‘창을 열어준 것’도 ‘무서운 야수였다지’ 않은가? 새의 아름다운 깃털은 종족보존을 위한 구애의 한 방편이라는 설을 보면 이성은 인류의 미학적 발견과도 밀접하다. 아름다운 깃털이 생기기 전 ‘오솔오솔 돋던 소름’은 무엇이었을지 조금은 상상 가능한 일이지 않을까? /성향숙 시인
산문시(散文詩) 1 /신동엽 스칸디나비아라던가 뭐라구 하는 고장에서는 아름다운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업을 가진 아저씨가 꽃리본 단 딸아이의 손 이끌고 백화점 거리 칫솔 사러 나오신단다. 탄광 퇴근하는 광부들의 작업복 뒷주머니마다엔 기름 묻은 책 하이데거 러쎌 헤밍웨이 장자(莊子) 휴가여행 떠나는 국무총리 서울역 삼등대합실 매표구 앞을 뙤약볕 흡쓰며 줄지어 서 있을 때 그걸 본 서울역장 기쁘시겠소라는 인사 한마디 남길 뿐 평화스러이 자기 사무실 문 열고 들어가더란다. 남해에서 북강까지 넘실대는 물결 동해에서 서해까지 팔랑대는 꽃밭 땅에서 하늘로 치솟는 무지개빛 분수 이름은 잊었지만 뭐라군가 불리우는 그 중립국에선 하나에서 백까지가 다 대학 나온 농민들 트럭을 두대씩이나 가지고 대리석 별장에서 산다지만 대통령 이름은 잘 몰라도 새 이름 꽃 이름 지휘자 이름 극작가 이름은 훤하더란다 애당초 어느 쪽 패거리에도 총 쏘는 야만엔 가담치 않기로 작정한 그 지성(知性) 그래서 어린이들은 사람 죽이는 시늉을 아니하고도 아름다운 놀이 꽃동산처럼 풍요로운 나라, 억만금을 준대도 싫었다 자기네 포도밭은 사람 상처 내는 미사일기지도 땡크기지도 들어올 수 없소 끝끝내 사나이나라
그곳이 멀지 않다 /나희덕 사람 밖에서 살던 사람도 숨을 거둘 때는 비로소 사람 속으로 돌아온다 새도 죽을 때는 새 속으로 가서 뼈를 눕히리라 새들의 지저귐을 따라 아무리 마음을 뻗어 보아도 마지막 날개를 접는 데까지 가지 못했다 어느 겨울 아침 상처도 없이 숲길에 떨어진 새 한 마리 넓은 후박나무 잎으로 나는 그 작은 성지를 덮어 주었다 나희덕의 시 <그곳이 멀지 않다>에서는 화자 ‘나’가 시적 대상인 숲길에 떨어진 새 한 마리를 보고 시인 자신의 삶, 더 나아가 길을 찾으려는 인간의 삶에 대해 말한다. 죽으면 영혼이 육체 밖으로 빠져나간다는 일반적인 생각과 화자의 생각은 다르다. 화자는 사람과 새는 죽어서 자기 속으로 돌아온다고 말한다. 1연의 ‘사람 밖에서 살던 사람’은 어머니의 자궁 밖에서 살던 사람, 삶의 길 위에 내던져진 사람을 말한다. 그러한 사람은 ‘숨을 거둘 때는 비로소 사람 속으로 돌아온다’. 2연의 ‘새’도 사람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새의 죽음은 끔찍하다기보다는 아름답다. 비록 ‘마지막 날개를 접는 데까지 가지 못했’더라도
길위에서/김우영 그래 이것이 경계가 아니었으면 참 좋겠네 더 이상 전생과 후생 오거나 가는 것이 아니었으면 좋겠네 나 이 길 위에 서 있을 때 구름 편안히 모였다 흩어지고 바람은 선선히 몸을 투과해 허허 웃으며 걸을 수 있다면 기교가 다하고 생각의 뿌리가 모두 드러나 내게 순명(順命)하며 저 위대한 도랑물이나 풀잎처럼 낮아져 그저 흐르거나 흔들릴 수 있다면 아, 참 좋겠네 김우영 시집 <부석사 가는 길/청학 2003년> 참으로 이 길 위에 오래 서있는 시인이다. 고등학교 시절 이미 온 나라에 필명을 날리기 시작한 시인이 이제 기교가 다하고 생각의 뿌리가 모두 드러나 순명을 받들고서 낮아지고자 한다. 한 시절 이름을 나란히 하던 동료시인들이 아직도 그 이름 위에 군림하고 있을 때 시인은 오히려 흐르거나 흔들리며 고향을 지키겠다고 허허 깨끗한 웃음을 보여준다. 쉽지 않았을 것이다. 구름 편안히 모였다 흩어지고 바람은 선선히 몸을 투과하는데./조길성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