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무장지대/서영택 허공은 새들의 길, 오래된 전용도로다 맘 좋은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무상으로 세 놓으셨다 서영택 시집 『현동 381번지』/현대시 시인선 정부에서 개성공단 철거한 곳에 평화공원을 건설한다는 것을 발표했다지? 멀쩡한 평화의 공간을 불안조성하며 상주하던 사람들 다 빼내오더니 또 객쩍은 짓 하는가 보다. 그런데 그곳은 비무장지대라는 사실이다. 위험하다고 빨리 탈출하라던 말들은 어디 감추고 공원 조성 후 평화공원 홍보하며 치적을 선전선동 하겠지. 비무장지대 는 개성공단 이후 총부리 없이도 왕래할 수 있었던 남북 공동의 활동 공간이다. 그런 곳을 정치적 목적으로 기업들의 막대한 피해를 감수해가며 폐쇄한다는 게 애초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새들의 길’이고 ‘하느님이 무상으로 세놓으신’ 자유왕래가 가능한 지대인데 어느 땐 출입가능, 어느 땐 출입 통제로 위정자들의 입맛대로 이리저리 재단한다는 게 얼마나 모순된 일인가? 제발 정치가 할 일 좀 했으면 좋겠다.
향기 나는 소리/이섬 약간 돋워진 둥근 판에 아름답게 장식한 당좌가 맞는 자리다 맞으면 종은 부들부들 몸을 떨게 된다 둔탁한 파열음을 제거하기 위해 소리통을 만들어 세웠다 소리통을 거친 소리가 종 내부에서 소용돌이치면서 안에 머문다 머물렀던 소리가 방향음통에 떨어져 메아리를 이끌며 멀리멀리 퍼져나간다 순음이 되어 소리의 여운이 생긴다 소리의 맛이 난다 출처 : 이섬 시집 , 민예당, 1996 소리의 맛이 난다니 참 새롭다. 우리가 내가 네가 종이 되어 울고 있는 느낌이 강하게 다가온다. 살아가는 일이 제 안으로만 깊숙이 침잠하는 일이 되고 있는 일상에서 다시 한 번 나를 우리를 되돌아보게 하는 시이다. 소리의 맛이 나는 삶은 어떤 삶일까 참으로 궁금하다. 종소리를 낼 일이다. 에밀레종은 못되어도 작은 풍경 소리처럼 나지막하게. /조길성 시인
혼인비행 /권정일 수만 쌍이다 열애의 빛으로 하늘이 낮아졌다 꽁지와 꽁지를 활처럼 말아 사분사분 한삼汗衫을 뿌리는 고추잠자리, 곡진한 전율 투명한 날개끼리 업고 날다, 안고 날다, 꽁지와 꽁지가 한 줄 되어, 하나一가 되어 그칠 수 없다고 멈추지 않겠다고 너를 낳으려고 나를 낳으려고 순연한 우주의 붉은 점막이 터진다 -리토피아 가을호에서 사랑의 감정을 무엇이라 딱 꼬집어 말하기는 어렵다. 이성 간의 사랑은 오히려 연애감정이라 말하는 것이 편할 경우도 있다. 곤충들의 사랑행위는 상대를 감정으로 선택하는 것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암컷과 수컷의 때에 맞는 번식행위이어서 그럴 수 있겠다. 벌도 개미도 잠자리도 혼인비행을 한다. 그런데 그들에게 열애의 감정이 없다고 볼 수도 없으니 신기하다. 혼인을 위해 그들은 기나긴 준비를 한다. 정성스럽기 짝이 없다. 여왕을 기르고 받들어 모시고 복종한다. 신성하다. 하늘은 밝고 바람은 고요하다. 우주가 그들의 사랑을 위해 가장 빛나는 신방을 꾸며준다. 그들은 진화를 꿈꾸지 않는다. 마르고 닳도록, 영원토록 그들은 시작과 끝이 같다. 그들의 방식 그대로 사랑하고 연애한다. 아름답다. /장종권 시인
어머니/밝덩굴 비 오는 날, 시청에서 구로동버스를 탔습니다. 창밖의 우산도 창 안에서는 작았습니다. 빙 도는 노선버스라 자꾸자꾸 돌았습니다. 밝덩굴 시인은 아름다운 우리말을 사랑하는 시인으로 유명하다. 그는 자녀에게 순우리말의 긴 이름인 ‘박차고나온노미샘이나’라는 이름을 지어주어 세간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그는 군 생활을 할 때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셨다. 마지막 남은 한 분 혈육인 어머니마저 여의고, 제대 후 사회에 첫걸음을 내딛던 날에 비가 쏟아졌다. ‘시청-구로동’을 도는 버스를 타고 시인은 그저 울었다. 주위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부끄러운 것도 모른 채 말이다. 그리고 버스를 탄 채 시청에서 구로동으로 자꾸만 자꾸만 돌았다. 이제 그 버스에서 내려온 시인은 일상과 이상을 왕복하는 버스에 올랐다. 아름다운 시들을 흩날리는 버스를 운행하고 있는 것이다.
등2/서안나 나는 뒤쪽에서 더 선명하다 당신의 뒤편인, 나는 당신 뒤꿈치에 밟혀 꽃처럼 사납게 피어나는, 나는 없어서 있는, 나는 당신에게 훌쩍 뛰어들기도 하는, 나는 당신보다 늦거나 빠른, 나는 당신을 쫓거나 도망자인, 나는 태양의 비명이 들리는, 나는 기침처럼 당신을 찢고 나온, 나는 빛의 단검으로 당신을 내려치기도 하는, 뒤쪽으로도 잘 자라는, 나는 서안나 시집 『립스틱발달사』 / 시작시인선 뒷모습에도 표정이 있다. 아버지의 구부정한 어깨처럼, 창문에 기댄 어머니의 마른 등짝처럼 뒤쪽엔 서글픔이 매달려 있다. 복잡한 도시를 경험하는 사람들 중 어깨가 쳐지지 않은 사람은 별로 없어 보인다. 그만큼 시대를 견뎌내기 어려운 시대를 우린 살고 있다. 아니 그것을 떠나 인간의 등짝은 원래 쓸쓸하다. 빛이 들지 않는 그늘이 있다. 젖가슴이나 배꼽 같은 둔덕도 없고 쓰다듬는 손바닥에 아무것도 걸리는 것 없는 편편한, 그래서 ‘없어서 있고’, ‘훌쩍 뛰어들어’ 껴안아 주고 싶은 등짝인 것이다. 유쾌하거나 활달한 등짝은 좀처럼 볼 수 없다. 등짝엔 슬픈 표정만이 고루 퍼져있다. 그래서 난 등을 보고 너의 슬픈 표정을 읽는다.
신 모나리자 /이명 세월이 흐르자 모나리자의 눈꺼풀이 쳐졌다 얼굴에는 거뭇거뭇 점들이 생겨났다 다빈치의 노트북에는 구면球面에 비친 상을 평면平面에 옮기면 같은 길이의 대상이라도 각도에 따라 각각 다른 길이로 투사된다는데 눈꺼풀이 쳐지는 바람에 그녀의 소실축도 아래로 내려왔다 내 기억 속의 그녀는 티없이 맑은 인상이었다 안쪽으로 무한히 감겨들어가는 황금분할의 직사각형에 따라 이목구비가 갖춰진 얼굴 그녀의 얼굴을 되살리는 작업은 내 기억 속의 그녀를 온전히 불러내어 실물과 대조하는 일뿐인데 미숙련공 다빈치가 레이저와 해부용 칼을 도구로 사용하는 바람에 모나리자, 미소가 사라졌다. -이명 시집 <앵무새학당>에서- 아름다움은 본래의 자연스러운 모습이 제일이다. 그런데 세상이 변하고 또한 사람들의 마음도 간사하게 변하여 예전의 아름다움보다 더 아름다운 얼굴이 되고 싶어 안달이다. 본래의 아름다움에 반했던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지극히 안타까운 일일 것이다. 세월의 때가 묻으면 이겨낼 재간이 없다. 세월의 때조차도 아름다움의 한 부분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이겨내기가 힘들 것이다. 새로운 문명이 제아무리 대단한 레이저와 해부용 칼을 휘두른다 해도 신의 오묘한 재주
사람꽃/고형렬 복숭아 꽃빛이 너무 아름답기로서니 사람꽃 아이만큼은 아름답지 않다네 모란꽃이 그토록 아름답다고는 해도 사람꽃 처녀만큼은 아름답지가 못하네 모두 할아버지들이 되어서 바라보게, 저 사람꽃만큼 아름다운 것이 있는가 뭇 나비가 아무리 아름답다고 하여도 잉어가 아름답다고 암만 쳐다보아도 아무런들 사람만큼은 되지 않는다네 사람만큼은 갖고 싶어지진 않는다네 나도 갖고 싶다. 그것도 사람을 사람꽃을, 사람이 아니면 안 되는 꽃을 갖고 싶다는 시인의 말이 나는 복숭아꽃보다도 모란꽃보다도 연못을 유유히 헤엄치는 금빛잉어의 눈부심보다도 더욱 갖고 싶다. 사람에 부대끼고 미워하고 몸 떨다가도 사람은 끝내 사람인 것이다. 갖고 싶다. 나비처럼 날지는 못할지라도 사람꽃에 뜨거운 숨결로 내려앉아 긴 주둥이 들이밀고서 속삭이고 싶다. /조길성 시인
등대풀꽃 /박경숙 탐라 바닷가에서 꽃등 켠 등대 보았네 꽃받침 위에 꽃받침 위에 꽃받침 위에 꽃등대 노란 전구알 바투 켜 놓고 고기잡이 떠난 님 마중 나서듯 대낮에도 깨금발 목을 쑥 빼고 바다를 향해 등대지기 꽃등 환하네 출처 박경숙 시집 『야생을 말리다』 2013년 고요아침 (열린시학 기획시선) 아무리 작은 꽃이라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작은 꽃 속에는 우리가 사는 세상이 고스란히 들어 있다. 간혹 꽃 중에는 꽃보다도 더 예쁜 이파리를 간직하고 있는 것도 있는데, 이파리가 예쁜 등대풀꽃은 꽃의 존재를 무색하게 만드는 꽃이다. 이파리의 모양새가 겹겹이 쌓인 모습도 신기하지만 그 이파리 안에 보일 듯 말 듯 황록색 꽃을 피우고 있는 자태는 삶의 비밀을 품은 듯하다. 등대풀꽃은 가을에 싹을 내기 시작해 고난의 겨울을 보내고 이듬해 봄에 꽃을 피운다. 등대풀꽃의 꽃말은 ‘당신의 성격이 그렇게 냉혹하다면 우리는 그대의 마음을 돌덩이라고 생각할 것이다’이다. 고난을 몸소 겪어본 사람만이 다른 사람의 고난을 자신의 고난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법이다. 시인은 한신대학원 문예창작학과에서 시를 전공하였고, <비금도에서의 하루>를 출간하면서 문
쉿! 당신 혀를 잘라 /김지유 백팔 년 전 당신이 전한 그 말 그대로 듣는 거야 돌아선 등 뒤로 우두커니 늙은 박달나무 한 그루 더 이상 가지 뻗지 않는 우듬지 아래 까마귀는 평생 울어 줄 거야 신굿 없이 말 옮기는 무당이여 당신 혀 잘라 만든 사슴의 뿔 녹슨 굴착기가 푸르게 푸르게 동굴 속 신단수 뿌리에 얽혀 있어 쉿! 천팔백 년 뒤 오늘을 까막거리는 그 말 당신 할 바로 그 말이야 -김지유 시집『즐거울 랄라』/시작시인선- 미래를 점치는 사람들은 대체로 운명은 정해져 있다고 한다. 現生은 전생의 업으로 운위되는 것이며 미래를 알려면 현재를 보고 현재의 생활상을 보면 과거가 보인다고도 한다. 지은 죄가 원인이 되어 한 생 뒤에 불행한 결과로 나타나는 것, 佛家의 인과법칙과 통한다. 그러므로 선업을 쌓으면 후생엔 좋은 환경에서 태어날 것이며 많은 귀인들을 만날 것이다. 칼끝을 발등에 떨어뜨렸을 때 발등에 피나는 결과를 초래하듯이 어느 정도 들어맞는 법칙인 것은 사실이다. 대체로 맞는다고 해도 인간의 삶은 복잡하거니와 망각으로 모든 것을 잊기에 결과를 예측하긴 힘들 것이다. 또 경우의 수에 따라 결과는 얼마든지 변할 수 있으니 인간의 미래는 예측불허다. /성향숙
게에게 /이시카와 다쿠보쿠 바닷물이 밀려들면 구멍으로 기어들고 바닷물이 빠져나가면 기어나와서 온종일 옆으로 걷고 있는 동해바다 모래사장의 영리한 게야 지금 이곳을 운명의 파도에 휩쓸려 와서 마음 속 감실의 등불이 그대 눈보다도 작게 꺼졌다 켜졌다 하는 아이가 갈 길도 모르면서, 지쳐 헤매어 더듬어 가는 것을 아는가 모르는가. 출처 : 이시카와 타쿠보쿠 시선/민음사, 1998 운명의 파도에 휩쓸려 어디까지 왔는지 곰곰 되새기는 시간을 갖게 하는 시다. 게, 그 작은 눈 속에서 거대한 바다와 파도와 인생을 읽고 있는 시인이 아름답다. 갈 길도 모르면서 지쳐 헤매어 더듬어 가는 것이 인생이라는 말을 더듬더듬 더듬어 끝내 언젠가 우리는 알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