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 밭을 지나며 저 시퍼런 무 밭을 지나면 내 안에 칼 한 자루 지니고 싶어진다 - 시집 아껴먹는 슬픔 중에서/문학과 지성사/ 2001년 잎이 푸르고 싱싱한 무밭을 지나다보면 그 시원하고 청량한 맛이 저절로 느껴지지요. 주인 몰래 한 개 뽑아 먹어보고 싶기도 합니다. 몸속의 갈증이 시원하게 풀릴 것 같아서지요. 문제는 시인이 단순히 무가 먹고 싶어서가 아니라는 거지요. 우리 속담에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잘라야 한다’라는 말처럼 기왕에 태어났으니, 아니 그보다는 더 현실적인 문제로 무라도 단칼에 베어보고 싶었겠지요. /최기순 시인
밤이 되면 /김충규 밤이 되면 왠지 얼굴이 다 뭉개지는 기분이다 내 얼굴을 누가 흙처럼 주물러버린 기분이다 더러운 기분이 들기도 하고 식은 국을 후루룩 마셨을 때처럼 스스로 측은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낮에 멀쩡하던 얼굴이 밤이 되면 뭉개지는 기분 이런 기분 때문에 밤에는 외출을 삼간다 내 얼굴을 본 사람들이 마루 주물러 버릴까봐 집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반죽 덩어리인 줄 알고 수제비 속에 집어 넣을까봐 아내가 밀가루 반죽을 할 때도 가까이 가지 않는다 얼굴에 책을 덮고 자는 버릇이 생긴 것 순전히 그 탓이다 - 김충규 시집, 『라일락과 고래와 내 사람』 2013, 문학동네- 시인은 마지막 메모에서 ‘허공에 바치는 시를 쓰고 싶은 밤이다. 비어 있는 듯하나 가득한 허공을 위하여, 허공의 공허와 허공의 아우성과 허공의 피 흘림과 허공의 광기와 허공의 침묵을 위하여…’ 그렇게 허공을 향해 자신의 영혼을 한 편의 시로 바쳤다. 2012년 3월 느닷없이 날아온 한 통의 부고(訃告), 시인이 광활한 허공을 향해 떠나기 전 그의 밤은 두려움과 회피의 흔적으로 남았다. 세상은 누구의 얼굴이건 어둠속에서는 뭉개버리는 불쾌한 공기들로 둘러싸여
백두산 가는 길 4 -아버지 /강 수 눈의 무게에 눌려 잣나무 가지가 부러진다 어린 시절 어깨에 묻은 눈송이들을 털어내며 들어서시던 아버지 이제는 뼈마디에서 뚜둑 뚜둑 가지 부러지는 소리가 들린다. 몸속에 눈이 계속 내리나 보다 잣나무, 잣나무 가지마다 눈 무더기를 올려놓고 겨울을 난다 힘이 없는 가지는 부러뜨린다. 늘 푸르기 위해 자기 몸을 부러뜨릴 줄 아는 소리 살아남은 가지들이 모여 나무가 된다. 부러진 가지들이 모여 산이 된다. 쩌억 쩌억 산이 만들어지는 소리가 아버지의 뼈마디에서 들린다. 거대한 산 하나가 살아난다. -시인축구단 글발공동시집 ‘토요일이면 지구를 걷어차고 싶다’에서- 아버지는 자기의 희생을 통해 자식에게 푸른 잣나무가 된다. 잣이란 꿈을 준다. 우리는 아버지란 잣나무를 잊고 사는 경우가 많다. 하나 아버지는 먼 들판 끝 산기슭에 홀로 서 있는 잣나무다. 자식을 생각하면서 엄동을 지나 더 큰 잣을 맺기 위해 늙은 뿌리를 지층 더 깊이 들이미는 잣나무다. 잣나무 아버지, 잣나무 아버지 불러보고 싶은 봄날이다. 아버지는 산 나뭇가지는 더 푸르게 부러진 나무는 산의 자양분으로 돌려 아버지 산으로도 일어서신다. 산 아버지,
봄 /박광순 부르지 않았건만 보송한 얼굴을 내민다 종소리 뒤로 푸른 빛 머금는 가지 위 춘곤증을 즐기는 꿈 까치 홀로 바쁘다 황사 뒤에 숨어서 아지랑이 되었다 때 이른 숨바꼭질 코를 간질이는 바람 남녘의 꽃소식 전하니 재치기 속에 발아 중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봄은 어머니 품처럼 포근하게 느껴진다. 포근한 그 정감 때문에 춘곤증이 찾아온다. 박광순 시인의 <봄>에는 그러한 봄의 향기가 고스란히 배어 있다. 이 시를 읽으면 이장희 시인의 <봄은 고양이로소이다>가 떠오른다. 이장희 시인은 고양이를 통해 봄의 계절 속에 숨어 있는 포근함과 나른함, 영롱함, 심술궂음 등 다양한 속성을 표현했는데, 박광순 시인의 이 시에서도 봄의 포근함과 나른함뿐만 아니라 다양한 봄의 속살이 엿보인다. 3연의 ‘황사 뒤에 숨어서 아지랑이 되었다 때 이른 숨바꼭질’에서 알 수 있듯이, 봄은 얄궂은 속성도 있다. 또 4연의 ‘코를 간질이는 바람 남녘의 꽃소식 전하니’에서 알 수 있듯이, 황사먼지로 우리를 괴롭히는데도 불구하고 봄은 우리에게 그래도 길조인 ‘까치’처럼 반가운 것이다. 그러니까…
목련 /양승본 어둠 속의 달덩이 같은 모습으로 봄의 햇살을 안내하는 웃음이어라 인고(忍苦)의 겨울을 견디며 다져온 마음으로 백의의 천사처럼 봄의 공간을 곱게 수놓은 순수(純粹)이어라 고통을 거쳐 그리움으로 되살아난 나의 연인(戀人)이어라. 봄이 오면 가장 먼저 피는 꽃인 목련은 가지 끝에 잎보다 먼저 흰색 꽃이 피는데, 꽃말은 ‘우애, 사랑, 숭고한 정신’이다. 이 시에 나타난 목련에는 이러한 꽃말들의 의미가 엿보인다. 그런데, 아름답고 숭고해 보이는 이 꽃에는 슬픈 전설이 담겨 있다. 북쪽 바다지기를 사모한 하늘나라의 공주가 어느 날 남몰래 먼 길을 걸어 그를 찾아갔으나 바다지기에게는 이미 아내가 있어 사랑을 이룰 수 없었다. 공주는 절벽 아래로 뛰어내려 목숨을 끊었다. 뒤늦게 그 사실을 알게 된 바다지기는 공주의 시신을 거두어 묻어주었고, 그 곁에 약을 먹여 깨어날 수 없게 된 자신의 아내 무덤을 만들었다. 그 이듬해 봄, 공주의 무덤에서는 하얀 목련이, 아내의 무덤에서는 보라색의 목련이 피었다는 슬픈 전설이 전해온다. 이처럼 꽃이 피기까지는 고통과 슬픔이 따랐던 것이다. /박병두 시인
나에게 /지디마자 오솔길이 없다고 그리움이 없는 건 아니지 별빛이 없다고 온기가 없는 건 아니지 눈물이 없다고 슬픔이 없는 건 아니지 날개가 없다고 거짓말이 없는 건 아니지 끝이 없다고 죽음이 없는 건 아니지 하지만 분명한 건 다랑 산과 내 민족이 없다면 지금의 나, 시인도 없다는 것 -지디마자 시선집 <문학과 지성사, 2009>- 중국 소수민족인 이족 태생이다. 많은 아픔을 딛고 일어서서 소수민족을 대변하며 민족에 대한 사랑과 긍지를 노래하는 시인이다. 쓰촨성 문학상 등 여러 상을 휩쓴 시인이다. 세계적으로 많이 알려진 시인이지만 우리에게는 생소하다. 현재는 칭하이성 부성장을 맡고 있다. 자기 민족에 대한 노래로 우뚝 선 시인이다. 민족이라는 말이 낯설게 느껴지는 시대에 신선한 기쁨을 주는 시인이라는 생각에서 소개한다.
눈물에 금이 갔다/김이하 남의 집 한 칸을 빌어 십수 년을 살면서 이게 어디냐고 가끔은 걸레질 비질도 했는데 (중략) 술에 치여 보낸 밤도 많았고 화가 나서 뜬눈으로 보낸 날도 있었고 그러던 어느 날 그놈이 참 듬직한 걸 보았다, 거미란 놈 눈이 시려 실눈을 뜨고 새벽처럼 일어나 전동 칫솔을 돌리는데, 이제는 쩍쩍 금이 가는 남의 집 그 틈새에 끼여 거미줄을 치는 그놈은 실은 제 집을 짓는 게 아닌가 남의 집 한칸을 빌어 사는 내 삶의 한켠에 번듯하게 제 집을 짓는 저놈 흐릿한 거미줄 틈으로 멀리 사라지는 내 등이 보인다 더 이상 걷어 낼 거미줄은 아닌 것이다 출처 - 따킨 꼬더 마잉 外 시집 『멀리 사자지는 등이 보인다』 - 2008년 화남 사월이다. 봄철마다 이사를 하던 기억이 새롭다. 햇볕 아래 더 남루해 보이던 이불과 살림, 내 집 마련이 지상의 과업처럼 생각되던 나날, 세입자라는 이유만으로 집주인 앞에서 주눅 들던 경험. 그런데 세든 집에 “번듯하게 제 집을 짓는” 거미를 보면서 그 “듬직한” 모습에서, 당당함에서 “내 등”을 보는 것이다. 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우주의 한켠에 세
래여애반다라 3 /이성복 이 순간은 남의 순간이었던가 봄바람은 낡은 베니어판 덜 빠진 못에 걸려 있기도 하고 깊은 숨 들여 마시고 불어도 고운 먼지는 날아가지 않는다 깨우지 마라, 고운 잠 눈 감으면 벌건 살코기와 오돌토돌한 간처녑을 먹고 싶은 날들 깨우지 마라, 고운 잠, 아무래도 나는 남의 순간을 사는 것만 같다 이성복 시집 『래여애반다라』/문학과 지성사 봄 햇살 속, 거실 창에 기댄 채 깜빡 자고 깼을 때의 나른한 행복. 긴 인생이 일장춘몽이라 했던 선현들의 말씀을 반추한다. 눈 감고 떠올리는 상상들 또한 봄날의 감미로운 잠 같은 것이다. 깨고 싶지 않은 잠이므로 타인의 잠 또한 깨우지 말 일이다. 남루한 젊은 생에 꾸었던 꿈은 ‘남의 순간을 사는 것만 같다.’ 지나고 나면 그때(남의 순간을 사는 것만 같은)조차 행복한 삶이었던 것이다. 인간은 나이가 많아지면서 경제력이나 학력 등의 차이에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태어나 타인들과 같아지고 슬픔을 겪으며 어느 정도의 위치에 서니 지난 세월이 비단처럼 펼쳐진다는 뜻의 ‘래여애반다라’. 삶에 대한 성찰이다. ‘래여애반다라’는 신라 공덕
봄 가뭄에 만난 단비/전영택 달구리 지난 동틀 녘 하늘과 땅이 물길 텄다. 봄비다! 꽃샘바람 잠재운 약비에 새 풀잎들 새벽 귀잠 깨어 남실바람에 춤사위가 귀엽다. 삼동 지낸 뭇나무들 긴 겨울잠에 마른 몸 우듬지에서 밑동까지 흠뻑 젖는다. 철겨운 봄철가뭄에 지친 들녘 추적추적 내리는 단비가 좀 고마울까. 산골 천둥지기에도 봄비는 종요로우려니. 우산 밖으로 내민 손바닥에 고인 빗물 맛이라도 보듯 혀끝을 대어본다. 산길 오르다 만났던 샘물 맛이 이랬던가!? 봄비, 약비, 봄 가뭄에 만난 단비! 꽃들이 만개하는 봄이다. 하지만 얼마 전부터 이맘때면 우리를 괴롭히는 불청객이 있다. 바로 중국에서 날아온 황사다. 황사는 보통 중국대륙이 봄철에 건조해지면서 북부 고비사막과 타클라마칸사막, 황하 상류지대의 흙먼지가 편서풍을 타고 우리나라까지 날아오는 현상이다. 이 황사 때문에 꽃들도 집들도 하늘도 온통 누렇게 변색되고 있다. 천연의 색을 만끽해야 할 이 봄날에! 다행히 봄비가 있다. 봄비는 황사에 찌든 우리 산하에겐 약비 같은 존재이다. 비록 황사에 찌든 것들을 씻겨주는 것을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전영택 시인은 <봄 가뭄에 만난 단비>에서 봄비는 그야말로 &ls
꽃들도 하늘을 날고 싶다 /정명희 꽃이 핀다 꽃잎이 흔들린다 그 흔들림이 눈부시다 꽃은 그리움을 안고 하늘을 날고 싶어한다 수없는 날개가 되어 매일매일 허공을 가른다 피어날 때도 피어 있을 때도 어느 날 꽃잎은 드디어 날개가 된다 날개의 정원에 꽃잎이 흐드러진다 야릇한 봄이 또 오고 말았다. 봄은 만물이 소생하는 계절이다. 봄은 영어로 ‘spring’인데, 용수철처럼 생기 있는 계절이 바로 봄인 것이다. 그리고 ‘봄’ 하면 우리는 개나리, 벚꽃, 진달래 등의 봄꽃을 떠올리게 된다. 해마다 봄이 오면, 겨우내 한파와 눈송이들을 머금고 잿빛으로 변했던 들녘은 알록달록 형형색색의 꽃들로 가득하다. 이 시에는 봄바람에 흩날리는 꽃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바람에 흔들리는 꽃잎은 창공을 향해 비상하려는 새의 날갯짓과 흡사하다. 봄 햇살이 따사로운 요즘이다. 일상의 고단함을 잠시 봄바람에 실어 훌훌 날려버리고, 봄꽃 가득한 그곳으로 날아가 보자. /박병두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