잎이라는 말 /박혜람 바람과 가장 절친한 말이 있다면 그것은 잎이라는 말일 것이다. 이 엽록(葉綠)의 프로펠러들이 없었다면 바람은 날아오르는 종족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서로가 서로의 가려운 등을 긁어주듯, 서로가 서로를 닮아가듯, 서로의 무거운 그늘과 햇빛을 털어주는, 아니, 서로가 할퀴는 절친한 것들의 흔들림 나라는 잎 바람에 속아서 너무 빨리 팔랑거렸다 그러고 보니 바람과 가장 불편한 말이 있다면 그것 또한 잎이라는 말이다 출처- <낡은 침대의 배후가 되어가는 사내> 2006년 문예중앙 푸푸 웃음이 나온다. 내 청춘의 시간들을 내놓으라고 악다구니를 하는 여자의 모습이 불쑥 떠오른다. 잎의 팔랑거림으로, 가지의 휘어짐으로 나는 종종 창 안쪽에서 바람의 세기를 측정한다. 정말 강풍이 부는군, 뉘 집 창문을 깨고야 말겠어, 닫힌 문의 잠금장치를 다시 확인하곤 한다. 굳이 바람을 맞아보지 않아도 잎이 그것을 확인시켜 준다. 절친한 동시에 불편한 바람과 잎의 오래된 관계, 그러나 누가 그 둘의 관계를 인위적으로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사내가 여자를 위로하듯 바람이 잎에 얹힌 눈송이를 털어내며 등을 토닥이며 간다.
어떤 市 /함기석 어떤 市를 가는데 어떤 커다란 돌이 굴러와 멈춘다 돌에서 다리가 쑥 나오더니 내 엉덩이를 걷어찬다 팔이 쑥 나오더니 내 빰을 후려친다 내 가발을 빼앗아 쓰더니 내 바지를 빼앗아 입더니 내 가방을 빼앗아 열더니 노트에 깨알같이 적힌 미분방정식의 오류를 지적하더니 오류의 오류를 지적하더니 내 노트를 먹어치우기 시작하더니 내 가방도 구두도 마구 먹어치우더니 나까지 먹어치우더니 다시 데굴데굴 굴러간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삼복염천의 다리 밑에서 돌은 배를 두드리며 늘어지게 낮잠을 잔다 출처- 함기석 시집 <오렌지 기하학> 문학동네 옛 어른들께 많이 듣던 소리, 눈 뜨고도 코 베어간다는 도시가 서울이다. 같은 대도시임에도 水原보다 훨씬 눈이 휘둥그레지고 눈알이 팽팽 돌아간다. 혼이 쏙 빠진다. 획획 나타났다 획획 사라지는 사람들, 건물들, 가로수들, 자동차들. 모두 나를 ‘후려치고 걷어차고 빼앗고 오류를 지적하는 돌’이다. 아니 서울은 내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일들이 순식간 일어났다 사라진다. 그러니 내 예상은 오류투성이일 수밖에. 당연히 지적당한다. 겉으로는 개미처럼 열심히 살아가는 것 같지만 정신없음 속에서 누군가
봄날의 점심 /엄승화 꽃이 만발하면 함께 먹자구요 그러면 무섭도록 정이 들어요 덩굴꽃이 담장을 넘으면 미울 지경이에요 오 오 탄식하며 주저앉아 울어요 물이 든 길을 걸어 오르면 당신의 간소한 식탁이 가장 화려해요 무엇보다 당신의 발놀림이 음악이어서 가난한 어깨 무거운 줄도 몰라요 푸른 것을 씻고 붉은 것을 그 위에 놓아 나르는 당신은 요술을 부리지요 앉아서 기다리고 있으면 입 속에서 소리를 내며 탁탁 꽃이 터지고 있어요 간소하지만 사랑이 있어 화려한 식탁, 가난하지만 사랑이 있어 가벼운 어깨, 꽃이 만발한 봄날 사랑하는 이와의 아, 무섭도록 정이 드는 식사. 사랑하는 이를 기다리며 탄식하는 이여, 울어도 괜찮다. 입 속에서 꽃이 터지는 그 설렘, 꽃이 만발한 봄날의 점심, 상상만으로도 아름답다. 아름다워 슬프고 슬퍼 아름답다. 머지않아 기다리는 이가 음악처럼 오리라. /조길성 시인
먼나무 /박설희 바로 코 앞에 있는데 먼나무 뭔 나무야 물으면 먼나무 쓰다듬어 봐도 먼나무 끼리끼리 연리지를 이루면 더 먼나무 먼나무가 있는 뜰은 먼뜰 그 뜰을 흐르는 먼내 울울창창 무리지어서 먼나무 창에 흐르는 빗물을 따라 내 속을 흘러만 가는 끝끝내 먼나무 내가 사는 시골마을 언덕에는 오래된 소나무가 서 있다. 비가 와도 바람이 불어도 삼한사온을 견디며 동장군처럼 기다려준다. 영화 속 먼 나무가 아니라 상상력 결합에 함몰된 시간의 연속성이다. 사람들은 연출자에게 자신의 영화에 무엇을 담고자 하는가 질문을 던진다. 생각을 표현할 길이 이렇게밖에 없다고 한다면 이해충돌을 넘어 무거운 가슴을 밀어낸다. 삶의 무상감들은 사람만이 가진 감각적인 일이다. 소리 없이 지나는 것들도 모두 변하지 않는 게 없다. 참혹한 일을 발견하거나 혹 겪든, 지나가는 일들은 공허하고 쓰라린 마음의 음성으로 전위된다. 먼 나무의 대화는 마음속 가슴앓이로 머문 자리겠지만 오늘 내가 표현하는 미소가 타인에게 마음을 받아들이게 하거나 소통의 벽을 무너뜨릴 수 있다. 빗방울에 젖고 나무에 젖고 아침저녁으로 겹쳐지는 사람과 사람 속 풍경들이 먼 나무와 악수는 허허로운 가슴만 남겨주고 갈 것이다
빈말 /이인원 너는 입술에 침도 안 바르고 쉽게 던졌는지 모르지만 난 입술에 침 발라가며 꼭꼭 씹어본다 팥소가 꽉 찬 찐빵 하나 만큼 달다 출처- 이인원 시집 <궁금함의 정량>에서 참말과 거짓말의 진정한 가치를 우리는 안다. 세상은 참말로 인하여 엄청난 회오리가 불기도 하고, 거짓말로 하여 그 회오리를 잠재우기도 한다. 참말만을 하고 살 수는 없다. 참말만이 인생의 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아름다운 거짓말을 칭송한다. 시도 거짓말이다. 소설도 영화도 드라마도 거짓말이다. 세상에 참이란 궁극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답이 없는 세상에 참이 있다면 그것이 오히려 거짓말인 것이다. 우리는 과학과 사회적 한계로 인해 숱한 거짓말을 참말로 오인하며 한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세상이 어려울수록 감동적인 거짓말이 필요해진다. 사람이 힘들수록 희망을 주는 거짓말이 필요해진다. 어렵고 힘들지 않다 하더라도 주변을 따뜻하게 만드는 거짓말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칭찬이란 알고 보면 거짓말인 것이다. 거짓말인 줄 알면서도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아름다운 거짓말의 위대한 힘이다. /장종권 시인
배꼽 살구꽃 자리에는 살구꽃비 자두꽃 자리에는 자두꽃비 복사꽃 자리에는 복사꽃비 아그배꽃 자리에는 아그배꽃비 온다 분홍 하양 분홍 하양 하냥다짐 온다 살구꽃비는 살구배꼽 자두꽃비는 자두배꼽 복사꽃비는 복숭배꼽 아그배꽃비는 아기배꼽 달고 간다 아내랑 아기랑 배꼽마당에 나와 배꼽비 본다 꽃비 배꼽 본다 출처- 박성우 시집 <자두나무 정류장> 2011년 창비 모든 꽃이 진 자리에 비가 내리고 있다. 직선으로 내려오는 비는 떨어지면서 몸을 바꾼다. 그래서 ‘자두꽃 자리에는 자두꽃비’, ‘복사꽃 자리에는 복사꽃비’, ‘살구꽃이 핀 자리에는 살구꽃비’가 내린다. 빗줄기는 가느다랗게 내려오다가 땅에 떨어질 때는 동그랗다. 이 동그란 빗방울은 배꼽과 닮았다. 그래서 시인은 살구꽃비는 살구의 배꼽, 복사꽃비는 복숭아의 배꼽이라고 쓴다. 아내와 아기가 마당에 나와서 빗방울이 번지는 것을 보고 있다. 갑자기 마당은 커다란 배꼽이 된다. 이때 시인은 비를 우주와 연결된 탯줄처럼 느꼈을까? 내리는 비를 보다가 시인은 배꼽비라고 불러본다. 모든 꽃비에 젖으러 배꼽의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간다.
화투판에 그리다 /박경희 시아버지와 며느리가 화투를 친다 광을 팔아야 하는지 내버리고 나가야 하는지 서로 눈빛만 주고받는다 삼광이 번쩍이는 형광등이 발발거리고 아부지 언능 죽으세요 며느리 말에 발끈한 아부지 시아버지한테 언능 저승 문턱 밟으라니 허, 참나 내가 헛살았구먼 얼굴 벌게진 며느리가 말도 못 하고 화투장만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판을 엎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가만가만 눈치만 오간다 옆에서 손녀가 할아버지 죽어? 죽어? 한다 넘어진 김에 코 박는다고 며느리한테 속 안 좋았던 것을 화투판에 그린다 번들거리는 똥광 틈새로 흔들리는 며느리 눈동자 갑자기 엄니가 판을 엎는다 무슨 놈의 화투판에 저승이 나오느냐고 죽으라면 죽지 죽을 판에 죽지 않고 뭐하느냐고 저녁 잘 드시고 곡소리 나오겠구먼 꽉 찬 달이 안방을 들여다본다 출처- 박경희 시집 <벚꽃 문신> 2012년 실천문학 박경희 시인은 사라져가는 농촌의 모습을 충청도 방언으로 능청스레 펼쳐낸다. 슬픔이 밑바닥에 깔린 해학이다. 이 시에는 시아버지와 어머니, 며느리, 손자, 그리고 화투판을 들여다보고 있는 보름달이 화투장처럼 한 장의 그림을 이루고 있다. 숨어 있는 화자의 시선도 느껴진다. 정겹다. 언
Happy Birthday /김륭 잠 속에 손을 집어넣었더니 머리끄덩이가 잡혔다 고백건대 나는, 내 죽음이 축하 인사 한마디 없이 스르륵 사라질까 두려운 것인데 랄랄라, 케이크 대신 콘돔을 사온 그녀 발그레 달아오른 얼굴의 반을 잘라 비석을 세웠다 머리끄덩이에 불을 붙였다 남의 꽃밭에 버렸던 그림자를 다시 찾았다 출처- 김륭 시집 <살구나무에 살구비누 열리고> 문학동네 생일은 행복할 수만 없는, 내가 이 세상에 무지막지 내던져진 날이다. 어미의 자궁 속에 낯선 손이 불쑥 들어와 ‘머리끄덩이 잡혀’ 끌려나온 이 세상, 하나의 사건이다. 지극히 낯선 시간과 공간을 부여받고 허둥지둥 적응하며 살아가는 동안 생은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흘러간다. 긴 세월 흘러가다가 자연스러운 죽음에 이를 수 있고 어느 한 순간 돌발적인 죽음과 맞닥뜨릴 수도 있다. 시 속의 화자처럼 아무도 모르게 ‘스르르 사라지는 죽음’을 두려워할 수도 있을 것이다. 출생이 없다면 죽음도 없을 터, 남녀의 관계에서 어떤 생이 시작된다. ‘머리끄덩이에 불을 붙’이고 ‘꽃밭에 버렸던 그림자를 다시 찾았다.&rsquo
잊혀진 여인 /마리 로랑생 권태로운 여인보다 더 불쌍한 여인은 슬픔에 젖은 여인입니다 슬픔에 젖은 여인보다 더 불쌍한 여인은 불행한 여인입니다 불행한 여인보다 더 불쌍한 여인은 버려진 여인입니다 버려진 여인보다 더 불쌍한 여인은 떠도는 여인입니다 떠도는 여인보다 더 불쌍한 여인은 쫓겨난 여인입니다 쫓겨난 여인보다 더 불쌍한 여인은 죽은 여인입니다 죽은 여인보다 더 불쌍한 여인은 잊혀진 여인입니다 프랑스의 화가인 마리 로랑생 Marie Laurencin(1883~1956)이 쓴 것으로 알려진 시, 도니체티 사랑의 묘약 중 “남몰래 흘리는 눈물”이다. 사람들은 우울함을 쉽게 넘기거나 예사롭지 않게 여긴다. 사랑한다고 외롭다고 쓸쓸하다고 호소한들 대수롭지 않게 넘어간다. 최근 우리사회는 자살공화국이라는 칭호까지 받으며 가난해서, 빚 때문에… 이런저런 사유를 달아 죽음을 선택하는 사람들로 앞을 다툰다. 빠른 정보화시대를 함께 호흡하기란 보통사람들의 삶과는 거리가 너무 멀리 서 있는 느낌이다. 친절한 삶은 어떤 것일까? 관심 가져주고, 배려해주고, 사랑해주는 일이다. 친숙하면서도 다가서서 실천하거나 실행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단단한 습관 /장상관 1 인간은 소젖을 먹고도 소를 어미라 부르지 않는다 살 베어 먹으면서도 질기다 기름이다 말도 많다 수많은 생명에 기대어 사육될 수밖에 없는 생명이 모두 사육하기를 원한다 2 가랑비에도 하굿둑이 허물어질 수 있다 3 실수도 쓸모가 있다 반복하지 않으려고 온 신경을 집중하는 몸도 기억력이 있다 -장상관 시, 문학 무크 『시에티카 제7호』, 시와에세이, 2012 인간들의 자기양육에 대한 이중적 인식을 질타하는 잠언(箴言)같은 시편이다. 인간의 단단한 습관은 더러 자연에게는 답답한 습관이 되기도 한다. 자신을 키우고 양육한 생명에게 그저 그것은 음식일 뿐이라고 우긴다. 참으로 단단한 교만이다. 높으나 낡았고, 두터우나 닳아버린 인간의 권력경계를 보라. 정치권력의 둑이나, 자본권력의 둑이나, 지식권력의 둑에게 이 시는 말한다. 잎사귀 하나 뚫을 수 없는 가랑비일지라도 그 오만한 둑도 오랠수록 가랑비 한줄기에도 반드시 무너지리라고, 아무리 단단했던 인간의 습관도 자연의 순리, 천리(天理) 앞에 여지없이 허물어진다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다.우리 몸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고 신경을 집중하는 기억력이 있다. 그러나 나의 답답한 습관을 들여다보는 겸손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