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나물 /이정록 노란 조막손을 머리통 속에 디밀어 넣은 동승들 저 숭엄한 합장 머리를 숙이는 일이 어찌 삶만의 일이겠는가 손등에 파란 핏줄이 돋을 때가지 외발로 서 있으리라 끝내는 지붕이며 주춧돌 다 날려버리고, 스스로 다비식의 젖은 장작이 될 저 빼곡한 법당들 -이정록 시집 ‘의자’ / 문학과 지성사 오랜 시간이 만드는 순간들이 있다. 한 알의 씨앗이 발아하여 싹을 틔우는 순간, 씨앗과 씨앗이 섞여 각자의 싹눈을 틔우는 그 순간들이 슬픈 계절이다. 서로 기대어 서 있을 때 서로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삶의 숙연함. ‘머리를 숙이는’ 일들이 많은 순간들이 속절없이 가고 있다. 사람들의 가슴에서 흔들리는 노란 리본들. 그 리본들이 노랑나비가 되어 끝이 보이지 않는 세상으로 날아가는 자유를 잠시 꿈꿔본다. /권오영 시인
비애 /문정희 거울처럼 말간 기도 속에 살고 있던 젊은 처녀는 어디로 갔을까 먼 바다로 향한 눈빛을 하고 따스한 어깨로 꿈꾸는 여자, 그 안에 살며 사시사철 청송처럼 키가 컸는데 마른 잎 서걱이는 지금은 저녁 답 횐 머리칼 날리며 홀로 창가에 기대섰는 것은 거울 속에 처녀 대신 저녁노을 하나 잔주름 물결져서 살고 있기 때문이리. 그리움 모두 작아 물레처럼 돌고 사랑은 귓속말로 남아 편안한 오후가 거기 쓸쓸히 웃고 있기 때문이리. 시인의 비애는 세련된 비음으로 시를 읊는 것만 같다. 프랑스 파리의 여름이기도 하고 한국의 정취와 맞물린 계절의 비애도 자리한다. 감동의 전율이 오는 아름다운 예술가들의 커피 한잔의 음미는 어떤 것일까? 시인은 기실 죽음보다 늙음을 더욱 두려워하고 있는 인지감이다. 상상력의 고갈, 주름진 얼굴, 노욕(老慾), 맹목적인 권위주의, 그리고 사랑에서 소외된 여인이 갖는 뻔뻔함에 대한 경계로 읽힌다. 우리의 먼 미래는 알지 못하지만 미래의 항구에 안도의 닻을 내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무반주 첼로곡처럼 그렇게 깊고 폐부를 찌를 듯이 파고드는 향기가 비애 속에 담겨 한데 흔들리고 있다고 할까? 열망과 갈증 투성이인 젊은 나이에서 빠져 나와
육봉달 /윤형돈 삶의 그루터기 나무 밑동에 솟는 육중한 봉우리여, 퉁방울 눈의 사내 저잣거리엔 오늘도 육질 좋은 생고기의 입맛이 살아 있고 낙타 등 타고 가는 고단한 사람들에게 은총의 식탁이 내린다. 문화 가 - 00224<일간> 2002년 6월 15일 창간 육봉(肉峰)이란 말은 듣기만 해도 왠지 힘이 불끈 솟고 가슴이 설레는 말이다. 육에 봉이 있다니! 사전식으로 하면 낙타 등에 있는 커다란 혹으로 단봉이나 쌍봉을 가리키지만, 거기에 지방을 저장해 힘을 길러 고단한 인생의 사막을 가는 것에 비유된다. 〈육봉달〉은 현재 진행형으로 수원의 정자사거리에 있는 상호다. 싱싱한 목장의 생고기로 연일 북적대는 사람들의 사람냄새가 물씬하다. 자주 출몰하는 지인들 사이엔 은연중 봉달이란 닉네임이 더 친숙하게 되어, 누구라도 아무 때나 이곳에 오면 행복한 포만감을 거저 한 봉다리 얻어갈 수 있다는 기대감에 부풀어 있는 것이다. 이따금 노래방 테이블에 점프하듯 뛰어올라가 유연한 허리춤으로 뜨겁게 연주하는 봉달이가 환호작약하며 달린다. 우리도 예서 지금 멈출 수가 없다! 수원영화 예술기행 답사로 임원들과 그의 고향 부안엘 다녀온 적이 있다. 구부정한 허리의 기역자…
수크령 노래 /홍성란 희미한 그대 체취 실리는 천변에 와 고마리 기우는 꽃길 너울너울 걸었나봐요 잘 번진 토끼풀처럼 나도 너울 번져서 번지는 풀꽃 하나 손가락 반지 짓고 달개비 꽃빛 하늘 가리키며 웃었나봐요 누군가 여기 보라고 들릴 듯 말 듯 말 거는데 그대 분망한 거처 그 바람 일렁이다 여기 보아 여기 보아 손 흔드는 거였나 봐요 언덕엔 수크령 무리 넘실 물결지어 밀리는데 수그렸다 들었다 낟알 익어나는 내음으로 그대가 온다는 걸 고추잠자리도 아는가 봐요 몸으로 누른 몸짓으로 이내 올 걸 아나 봐요 - 홍성란, 『춤』 문학수첩 2013. 4 입추가 벌써 멀지 않은 날이다. 뜨거운 태양은 칠 줄 모르고 우리네 살림살이를 달궈댄다. 나크리는 또 남쪽과 서쪽 일부를 뒤집고 올라왔다. 해마다 큰 태풍을 맞으며 사는 사람들은 얼마나 가슴 졸이는 계절일지. 비둘기가 연약한 가지에 잠시 매달려 쥐똥나무 열매를 거두어 먹기 위해 날개를 퍼더덕 거려야 하는 게 사는 거라고 시인은 말했다. 살아야 한다는 것은 얼만 고단한 일인지. 세월호가 바다에 빠진지 100일도 더 지났다. 슬픔도 아픔도 아물어지지 않았는데 상처를 치료해주어야 할 사람들은 외면하고 있다. 아직 찾지 못한 이
갑골문자 /곽경효 바닷가 모래밭에서 우연히 발견한 거북의 등껍질 몸의 이미지는 사라져 버리고 선명한 육각형의 무늬만 남아 있다 천천히 걸어온 삶의 흔적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어쩌면 누군가에게 읽혀지기를 기다리며 오랫동안 제 몸에 새긴 암호가 아닐는지 그동안 바다도 땅도 아닌 다른 세상을 꿈꾸느라 한 생이 저무는 줄 몰랐다 보이지 않는 글자를 해독하려 발버둥치고 있었던 것 지금 모래 위를 걷고 있는 나와 모래 속에 박혀 있던 거북의 시간을 생각한다 살아있음과 죽음이 함께 뒹굴고 있는 절대불멸의 이 아득한 공간을 몸이 삶의 일부분이라면 소멸은 또 얼마나 오랜 것인가 끝내 뼈 한 벌의 무게로 빛나고 있는, - 《문학마당》 2007. 겨울호 소멸은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울 수 있으나 가장 슬픈 것이다. 지상에 남기는 마지막 두 글자가 소멸인 것이나 이름은 더 오래 남아 소멸의 말미를 장식하는 것이다. 절대불멸의 아득한 공간에서 떠도는 것은 소멸이란 과정을 통해 절대불멸의 공간을 마련해 준다. 소멸이니 불멸이니 결국은 쳇바퀴를 돌리듯 돌면서 멸의 나라를 이루어간다. 멸이 있는 나라에는 생이란 아름다움이 있다. 멸이란 바탕위에 생이란 존재의 꽃이 핀다. 뼈에 새긴다는 것은
아스피린 /안명옥 내 상처가 하늘로 수없이 밀어올린 별 한움큼, 털어 넣고 싶었던 -안명옥시집 〈칼/천년의 시작〉 털어 넣지 않았으니 별이 되었겠지 알약을 한움큼 쥐고서 도무지 두고 갈 수 없는 눈빛들을 생각하며 몸 떨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내가 만든 별이 나를 끌고 간다는 것을, 별이 보이지 않는 하늘에 이제 사람의 별이 뜬다. 우리가 별을 만들어 하늘에 가득 걸어두고 별 밭 아래 글썽이며 간다. /조길성 시인
烈女門 앞에서 /강계순 만고풍사에 삭아내린 고행과 미덕 빛 바랜 돌이 되어 서서히 죽어가고 지독한 사랑 하나 외롭게 웅크린 채 길목을 지키고 있다 가장 높은 것은 가장 비천한 것과 가장 아름다운 것은 가장 어리석은 것과 오랜 세월 서로 몸 비비면서 살고 비바람은 그들 모두를 함께 적시며 털어내고 있다 작은 추억 하나 극히 드문 소리 울리며 허공을 떠돌고 있다. 비록 비바람 속에 팽개쳐져 있는 작은 돌일지라도 그 속에는 우리의 심금을 울리고 지나가는 어떤 것, 지울 수 없는 추억이 지독히 강하게 각인된 채로 오랜 세월을 견디어낼 것이다. 한 시대를 살다간 측은하고 아름다운 여자의 생애를 이 시를 통해 돌아보게 된다. 몸 낮추고 자신의 생명을 타인에게 주었던 열녀의 지독한 어리석음과 아름다움 또한 이와 같지 않겠는가. 살아가면서 가장 존귀한 것은 무엇이며 가장 비천한 것은 무엇인가 불확실한 추억으로만 몇 세상을 떠돌고 있다. 영원한 것은 없고, 삶의 중심을 관통하고 있는 사랑조차도 육신의 소멸과 함께 삭아서 없어져 버리는 것, 남는 것은 기록에 의존하면서 추억의 빛바랜 사진뿐이다. 몇 사람의 가슴에 각인되는 일이란 게 어디 쉬운가? 온 생애를 매달려 가치 있다고
나의 하늘(1) -유리창을 닦다 /김종해 마포 쪽에 있는 백여 평 미만의 하늘을 사들여 내 이름으로 등기를 끝내고 취득세를 물고 난 얼마 뒤 나는 완벽한 나의 하늘을 갖게 된 기쁨 속에서 이웃들로부터 축복을 받았는데, 그 가운데 제일 마음에 드는 것은, 내 하늘에 있는 별들을 가끔 빌려보고 싶다는 소박한 친지의 말이었다. 나는 내가 사들인 하늘의 별들이 잘 보이도록 오늘도 유리창에 낀 성에를 닦고 또 닦아내었다. -김종해 시선집 〈별똥별/문학세계사〉 올해 환갑을 맞는 동네 형님을 길에서 만났다. 노동일을 나갔는데 일 못한다고 잔소리 듣다가 술 마시고 홧김에 그냥 들어오는 길이라 했다. 검은 비닐봉지엔 소주가 들었으리라.반지하방으로 들어가며 나더러 들어오란다. 거기 들어가야 아무도 없다. 참 열심히 살아온 형님인데 환갑나이에 집도 절도 없이 홀로 떠돈다. 별들이 잘 보이도록 형님의 하늘을 가리고 있는 유리창의 성에를 닦아주고 싶다./조길성 시인
얼룩 /박서영 공원 나무 의자에 앉은 할머니의 얼굴에 자줏빛 시반(屍班)이 그려져 있다 의자가 저울처럼 죽음으로 기울어질 때 유모차가 갸륵하게도 꽃을 업고 어디론가 간다 벌레 먹은 나뭇잎을 바삭바삭 밟아본다 얼룩이 너무 빨리 지워져 내가 지워야 할 색이 없다 -이 스펀지로 매질해도 되겠습니까? 점이 번지면 꽃의 형체가 완성될까 빛의 전령사들이 내려와 잎사귀를 사각사각 뜯어 먹고 꽃숭어리 맺힌 얼굴을 찰칵 찍어 간다 -시집 ‘좋은 구름’(실천문학사, 2014)에서 치자꽃 향기를 맡으면 여인의 화장내음이 납니다. 그래서 문득 잊혀진 사람 얼굴이 떠오르기도 한답니다. 할머니 얼굴에 그려진 얼룩이 치자의 자주빛처럼 여인의 향기를 잃지 않은 흔적은 아닐까 생각하니 죽음으로도 범접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꼭 있을 것만 같습니다. 유모차에 실린 꽃처럼 할머니는 다시 젊은 시절로 돌아갈 것만 같습니다. 삶과 죽음의 자연스런 건너뜀을 시인은 ‘갸륵하다’고 합니다. 그 표현이 정말 갸륵합니다. 어쩌면 그리도 따뜻하고 순하게 할머니의 삶을 읽어냈나요. 다 스러진 나뭇잎을 밟으며 입가에 맺혔을 시인의 깨달음의 얼굴이 사뭇 그립습니다. 지난
우비속의 어머니 /이윤학 맨발로 뛰어다녀도 잡히지 않았다. 건조장 비닐 조각들 밤동산에도 뒷산 소나무에도 걸려 나부끼는 저녁은 어깨 걸고 쓰러진 벼포기도 비에 젖어 피곤을 풀기에도 적은 어둠 속에서 어머니의 낮은 꿈이 우비 속에서나마 따뜻할까요. 죄 많은 것들 부서져라 천둥치는 저녁에 교회당 위로 우뚝 선 전기 십자가 위에도. 환하게 드러난 십자가 위에 피뢰침이 박혀 있을 줄이야. 어머니의 미신은 성경보다 튼튼하여 여러 날 망가지고 상처입은 것을, 어머니의 우비 속에 무엇이 싹트고 있는가 저는 압니다. -이윤학 시집 ‘먼지의 집’/문학과 지성사 천둥과 번개 속에서 빛의 긴 줄기가 뚜렷하게 비춰주는 순간들. ‘우비 속’ 맨발의 어머니가 뛰어다니는 모습만으로도 어머니의 생애가 다 읽혀진다. ‘건조장’ 속에서 익어갔을 곡식들이며, ‘쓰러진 벼포기’가 비에 젖어있는 상황 속에서도 어머니가 잃지 않은 것은 사랑과 희망이었을 것이다. 여러 날 계속되는 마른장마 속에서도 싹 틔워야할 무언가가 분명 있기에 우리에게 새벽은 늘 그렇게 온다. /권오영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