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룸 /김소연 창문을 열어두면 앞집 가게 옥외 스피커에서 음악이 흘러나온다 내 방까지 닿는다 주워 온 돌멩이에서 한 마을의 지도를 읽는다 밑줄 긋지 않고 한 권 책을 통과한다 너무 많은 생각에 가만히 골몰하면 누군가의 이야기를 엿듣는 느낌이 온다 꿈이 끝나야 슬그머니 잠에서 빠져나오는 날들 꿈과 생의 틈새에 누워 미워하던 것들에게 미안해하고 있다 이야기는 그렇게 내 곁에 왔고 내 곁을 떠나간다 가만히 있기만 하여도 용서가 구름처럼 흘러간다 내일의 날씨가 되어간다 빈방에 옥수수처럼 누워서 -김소연 시집 ‘수학자의 아침’ / 문학과 지성사 ‘내일’은 예측불허의 시간이다. ‘오늘’은 ‘어제’의 ‘내일’이다. 이 모두 ‘꿈’의 시간이다. 얼마나 많은 ‘잠’을 자야 ‘꿈’에서 빠져 나올지 모를 날들이 가고, 온다. 모든 시간들의 ‘틈새’에 끼워져 있던 관계들은 서로의 잣대로 길이와 폭을 재서 재단하기도 한다. 자신의 척도에 맞지 않으면 과감히 잘라내는 습관이 속성으로 자라 스스
X-ray /김유석 늦은 밤 포장마차에 등고선처럼 그려진 비닐 밖으로 그림자를 쏘여 비를 맞고 있는 그림자와 대작하는 사람, 소주보다 독한 것에 절어가는 속없는 그림자 그림자만으로 알 것 같은 생을 가진 그림자보다 먼저 취해 비틀거리는 그림자에 부축되어 가는, 그림자를 닮지 않은 사람 -김유석 시집 ‘놀이의 방식’ / 시인동네 X-ray 사진을 보면서 자신의 고독한 내부에 대해 연민을 느낀 적 있다. 흑과 백으로 분류되는, 마치 영혼의 표정처럼 말이 없으나 거부할 수 없는 사실인 나의 실존. 늦은 밤 포장마차에서 자신의 그림자와 대작하는 사람과의 비유가 절묘하다. 디테일이 생략된 그림자만으로도 알 것 같은 한 사람의 생. 그림자보다 먼저 취해 그림자에 부축되어 가는, 그러나 그림자가 아닌 사람. 내부를 바라보는 것은 어디선가 비를 맞고 있을 그림자를 투영하는 사실에 다름 아니다. /이미산 시인
서시(序詩) /박형준 학생 식당 창가에 앉아 늦은 점심을 먹습니다 손대지 않은 광채가 남아 있습니다 꽃 속에 부리를 파묻고 있는 새처럼 눈을 감고 아직 이 세상에 오지 않은 말 속에 손을 집어넣어봅니다 사물은 어느새 광대뼈가 툭 튀어나온 어머니 나를 감싸고 있는 애인 오래 신어 윤기 나는 신발 느지막이 혼자서 먹는 밥상이 됩니다 죽은 자와도,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자와도 만나는 시간 이마에 언어의 꽃가루가 묻은 채 나무 꼭대기 저편으로 해가 지고 있습니다 - 박형준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 문학과 지성사 2011. 7. 햇살이 잠시 시인을 기다린 것인지, 학생들 맑은 목소리가 곁에 머물렀던 것인지 한 순간, 아직 이 세상에 오지 않은 말이 시가 됩니다. 빛의 광채가 닿은 사물은 어머니의 이미지가 되기도 하고, 애인이거나, 오래 신어 윤기 나는 낡은 신발이 되기도 하고 혼자서 먹는 밥상이 되기도 합니다. 세상 속, 일상의 찰나, 길지 않은 시간, 한 끼 식사를 하는 시간이 시인의 서시(序詩)가 됩니다. 한 순간이 죽은 것과 미처 태어나지도 않은 것과의 만남의 시간이 됩니다. 늦은 점심, 빛나는 광채가 어머니, 애인, 윤기 나는 신발에 닿는 언어의 꽃가루로 생생하
빈 집 /기형도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 집에 갇혔네 삶 속에서 떠나거나 남는 일은 끊임없는 순환을 거듭한다. 인간에게 있어 만남과 이별은 서로 뗄 수 없는 “관계” 속에 있다. 사람은 하나의 “집”과도 같은 존재다. 누군가에게 깃들 수 있다는 일만으로도 삶이 풍요로워지는 존재. 어느 순간 “집”에 홀로 남겨졌을 때 엄습해 오는 상실감은 “공포”로 남기도 한다. 사람과 “사랑”을 잃었을 때, “더듬거리”며 찾는 “밤”과 “눈물”과 “촛불”은 존재의 이유이기도 했을 것이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어떤 존재의 의미로 남고 있는 것일까?/권오영 시인
생선종이 /신효석 향 싸던 종이는 향내가 나고 생선 싼 종이는 생선비린내 난다고, 하더라도 때론 생선비린내 종이를 맑은 강에 종일 띄우고 싶습니다. 맑은 물 머금은 종이에 석양도 잠시 머물면 좋겠습니다. - <슬픈 근대>(심지, 2011)에서 좋은 냄새 나는 사람과 어울리고 싶은 마음이야 인지상정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인생이라는 것이 비린생선을 싼 종이처럼 비루하니 못내 서글플 따름입니다. 이 시에서 가장 맛 나는 대목은 ‘때론’입니다. 설사, 설령 우리 삶이 그렇다하더라도 어느 한때 맑은 강에 몸 푹 담그고 새롭게 태어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민호 시인
뼈 /박광배 치골과 치골이 딱, 딱 부딪힐 때 아하, 나에게도 뼈가 있었구나. 그렇지, 너도 뼈가 있구나. 이 뼈도 그나마 재수 좋으면 흙더미에 흩어져 굴러 댕길 거다. 새들이사 늘 지저귀겠고 해야 그렇게 비추겠고 비 눈 우박이사 오게 생기면 오고 안 올거면 안 오겠지 뼈와 뼈가 으르렁거리며 의사소통 한다. 사람한테 뼈가 있었구나. -박광배 시집 『나는 둥그런 게 좋다』/시인학교 ‘난 둥그런 게 좋다’고 어울렁더울렁 살다보면 사람 좋다는 평은 받을 것이다. 부조리한 세상에 뚜렷한 각을 세우지 못하고 살다보니 과연 내게 뼈대가 있는가?라는 의문이 들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치골과 치골이 부딪힐 때’ 나에게도 뼈대가 있었구나 문득 깨달았을 것이다. 새는 새들 방식으로 세상에 대고 소리를 지르고 비와 눈, 우박도 제 역할을 하고 태양도 그렇게 제 할 일을 다 하는데 사람인 나와 넌 대체 뭐하는 자들이란 말인가? 세상이 온통 비상식과 부조리와 부도덕 범벅인데 사람이라는 명칭을 단 사람들은 도대체 뭣들하고 있는가? 뼈대가 있는 사람으로서 사람답게 살지 못하는 세상에 대고 사람인 난 어떤 방식으로 저항하고 있는가? /성향숙…
똑 바른 길 /쟈끄 프레베르 거리에서마다 해마다 속 좁은 얼굴을 한 노인들이 아이들에게 그 길을 가리키고 있다 철근 콘크리트 같은 단호한 몸짓으로 -쟈끄 프레베르시집 <붉은 말/도서출판 청하 1986> 우리나라로 치면 중학교 정도를 겨우 졸업한 학력으로 프랑스 시문학사상 최고의 베스트셀러를 기록한 시인이다. 이브 몽탕이 불러 유명해진 『고엽』의 작사자이기도 하다. 풍자와 해학으로 일관하며 날카로운 비판의식을 놓치지 않았다. 우리는 과연 어느 길을 가리킬 수 있을까 혹시 그 길이 잘못된 길은 아닐까 나는 과연 내 살아온 됨됨이가 아이들에게 함부로 길을 가리켜줄 만큼의 깜냥이 되는가. 골똘히 생각을 해본다. 속 좁은 노인네 소리는 듣지 말고 살아야할 것이다. /조길성시인
어떤 기다림 /고우란 팔순 난 할머니는 콩새의 눈알 같이 작은 콩꽃씨를 텃밭에다 심으시고 헤살헤살 웃으셨다 선한 바람 잘 들라고 잡초를 뽑아 놓고 헤살헤살 웃으셨다 이빨 빠진 구멍으로 헤살헤살 웃으셨다 텃밭에 처박혀 있던 땅꼬마 콩꽃씨께서 실눈 뜨고 일어나 두리번거리다 세 달 박이 어린 젖니를 내밀어 연두 꽃대를 세워 놓고 신비한 주문을 외워 콩새 한 마리 카수 시켰다 가는 귀 먹은 할머니 귀에 --계간 리토피아 2013년 겨울호에서 시인의 상상력이란 게 상상을 초월한다고 말하면 조금은 우스울지도 모르겠다. 시적 상상력이란 것이 얼마나 기가 막힌 것인지 시를 읽다 보면 알게 된다. 인생을 다 살아버린 팔순 할머니가 할 수 있는 일이 꼭 콩꽃씨 하나 텃밭에 심는 일은 아닐 것이다. 자연에 대한 친화가 왜 노년기에 와서 더 심각해지는지도 우리는 그저 짐작만 할 뿐이다. 생명에 대한 경이로운 아름다움이 돋보인다. 콩꽃씨 싹이 터 꽃대를 세우더니 가는 귀 먹은 할머니를 위해 콩새 한 마리 불러서 노래를 들려주고 있다. 콩꽃과 콩새와 할머니가 한 폭의 그림으로 다가오면서 슬그머니 웃게 한다. 이렇게 해서 생명은 생명끼리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면서 더불어 탄생과 소멸을
/전오 희뿌연 황사 속에 감춰진 세상 계절은 숨 가쁘게 봄을 준비한다 마른 가지의 수맥 위로 세상을 향해 일어서는 생명 신비롭다 힘차다 어느새 목련 꽃망울의 아기 솜털이 귀를 세운다 봄이 오는 길목에 따뜻한 숲 바람이 인다. 어느덧 겨울에서 봄으로 옮겨가고 있다. 며칠 전, 가로수로 심어놓은 은행나무를 보았다. 도시의 매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무는 아기 손처럼 아기자기한 새싹을 틔우고 있었다. 봄은 생명의 신비를 느낄 수 있는 계절이다. 죽은 듯 땅속에 묻혀 있던 모든 생명체들이 봄이 오면 고개를 내민다. 동면을 하던 곰에서부터 야생화까지, 봄은 만물이 소생하는 계절이다. 봄은 희망의 계절이다. 지금 힘든 과정을 겪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봄은 희망으로 다가온다. 봄이 왔지만 힘겨운 시간들을 보내고 있는 모든 이에게 희망이 싹트기를 바라본다. /박병두 시인·수원영화예술협회장…
연하장 /박용하 아무래도 시가 좋겠어 바람이라면 더 좋고 나무와 길이라면 아무래도 노래가 좋겠어 누가 꼭 듣지 않아도 빗방울이라면 좋고 진눈깨비라면 더 좋은 아무래도 사람이 좋겠어 저 나무 아래를 걸어 이 길로 드는 하늘이라면 더 좋고 염소라면 제비꽃이라면 좋은 것은 아무래도 자연이 제일 좋겠어 --박용하 시집 『견자見者』(열림원, 2007) 한 해가 지나갔네요. 오래 전 설레는 마음으로 연하장을 썼던 기억이 있습니다. 지금은 이메일을 지나 문자를 지나 SNS로 많은 인사를 하지요. 그러면서 손의 감촉도 점점 잊혀져가는 듯. 생각을 하고 주위를 둘러보고 그 사람을 생각하는 시간이 줄어듭니다. 간편해질수록 우리 사이는 점점 딱딱해지지 않았나 생각해 봤어요. 시를 읽고 산책을 하고 꽃과 나무를 보고 더불어 사람을 생각하는 그런 여유로움이 되기를 빌어봅니다. /유현아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