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진 안녕 보고 싶었어 아니 안고 싶었어 아니 키스하고 싶었어 아니… 그 다음 말은… 안해도 알겠지… 폭풍우가 스치고 지나갔어 세 살 된 아이는 기차를 처음 만난 세계처럼 소리 지르지 온다! 보고 싶었어! 재수 없는 년 답답하게 그거였어? 메가박스 속에 집어넣고 싶어 마음대로 유영할 수 있을까 날개 달린 한 마리 붉은 등대 붉은 복싱 글러브가 닭을 잃고 거위를 키운다 -송진 시집 『시체분류법』/지혜 =================================================================== 레일 같은 평행선 관계가 있다. 안녕하고 싶은데 안녕할 수 없고 보고 싶은데 볼 수 없고 안고 싶은데 안을 수 없고 키스하고 싶은데 키스할 수 없는, 은빛 선로처럼 끝내 만날 수 없는 안타까운 운명. 인간들의 능력은 위대(?)하여 그런 미묘하고 애틋하고 복잡한 관계도 잘 만들며 살아간다. 무심한 척 속앓이도 하며 살아가다 불쑥 내뱉는 말, ‘재수 없는 년. 그거였냐’고? 마치 다 알아버린 것처럼 욕설을 퍼부으며 스스로를 위로하는 것이다. 필름처럼 ‘메가박스 속’…
/김정환 이제는 너를 향한 절규 아니라 이제는 목전의 전율의 획일적 이빨 아니라 이제는 울부짖는 환호하는 발산 아니라 웃는 죽음의 입 아니라 해방 아니라 너는 네가 아니라 내 고막에 묻은 작년 매미 울음의 전면적, 거울 아니라 나의 몸 드러낼 뿐 아니라, 연주가 작곡뿐 아니라 음악의 몸일 때 피아노를 치지 않고 피아노가 치는 것보다 더 들어와 있는 내 귀로 들어오지 않고 내 귀가 들어오는 것보다 더 들어와 있는 너는 나의 연주다. 민주주의여. -- 김정환, 『거푸집 연주』 창비시선 2013 =============================================================== 광장에 사람들이 삼삼오오 대오를 이뤄 결국 커다란 물결을 만든다. 마음은 그렇지 않을 테지만 그들은 소풍 나오듯 서너 살 될까 말까한 아이를 데리고 광장으로 나왔다. 아무것도 모르는 계집아이는 눈앞에 앉아 있는 아빠에게 눈을 맞추며 웃는다. 우리는 사는 동안 곁을 바라봐줄 여유가 없다. 누군가 시리고 시린 강물로 뛰어 들던, 높은 빌딩에서 지구의 표면으로 추락을 하던 부서지는 사람들을 눈여겨 바라봐줄 틈이 없다. 틈이 없다는 건 결국 그 틈의 양면이 만나서…
/이면우 동짓날 저녁 십오층 북쪽 베란다 캄캄한 데서 담뱃불 반짝 같은 동 삼층 북창 드르륵 열리고 조금 있다가 또 반짝 군청색 하늘 속 별들 한꺼번에 반짝반짝 -- 이면우 시집 『아무도 울지 않는 밤은 없다』(창비, 2001) ====================================== 겨울이 한창입니다. 어느 누군가에게는 편하게 겨울을 즐기고 풍요로운 날들이 될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대부분의 가장들은 하루의 노곤을 풀기에 추운 날들입니다. 방에서 당연하게 담배를 태우던 아버지를 기억합니다. 지금 그러면 간이 배 밖으로 나왔다 한다지요. 하루의 노곤을 태우려 가장들의 불빛이 깜박거립니다. 추운 겨울밤 베란다 창문을 보다보면 종종 반짝거림을 봅니다. 그들은 그렇게 서로 침묵의 교신을 하며 하루를 풀겠지요. 서로에게 위안을 보내면서요. 그들의 반짝거림을 위로하면서 우리도 불편을 잠깐 외면해보면 어떨까요. 안녕을 기원하면서 말입니다.…
/양승본 일주일에 하루쯤 도시를 몇 개의 지역으로 나누어 차(車) 없는 거리를 만들었으면 좋겠다. 아이들과 손을 잡고 거리를 걸으면서 매연(煤煙) 없는 맑은 공기를 마시고 싶다. 오고가는 사람들과 따스한 미소로 인사를 나누고 여유(餘裕)가 넘쳐나는 거리에서 콧노래를 부르며 편안(便安)한 시간을 누렸으면 좋겠다. 거리에 차가 없는 날은 하늘은 더 높고 맑아서 자연의 순수(純粹)가 사람들의 마음속마다 행복의 수(繡)를 놓아줄 거야. 최근 서울시는 보행인구가 많은 중구 명동 관광특구와 이태원 세계음식문화거리, 구의강변로, 성북구 역사문화지구 등 5개 지역을 ‘보행환경개선지구’로 지정했다.이 지역들은 교통량이 많아 보행자 교통사고 발생 위험이 높았는데, 보행자를 우선하는 안전한 도로가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자동차는 인간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졌지만 어느덧 인간을 위협하는 것이 되었다. 다행히 최근에는 여러 시·도들에서 자동차 없는 거리를 늘려가고 있다. 자동차 없는 거리에서는 오고가는 사람들과 따스한 미소로 인사를 나누고, 자연의 순수가 사람들의 마음 속마다 행복의 수를 놓아줄 것이다.…
/정희성 그에게 시간을 선물했네 나에게 남겨진 모든 시간을 심장이 멎은 뒤에도 두근대며 흘러갈 그 시간을 친구가 눈감던 날 나 문득 두려움 느꼈네 이 사랑 영원할 수 있을까 그에게 시간을 선물했네 나 죽은 뒤에도 끝없이 흐를 여울진 그리움의 시간을 --시집 <그리운 나무>(2013, 창비)에서 그가 누구일까 궁금합니다. 뉘기에 소중한 시간을 모두 선물했을까. 선물은 내가 가진 일부를 기꺼이 나누어 주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받는 이가 기뻐할 것을 미리 짐작하며 나 또한 먼저 즐거워합니다. 그런데 시인이 선물한 시간의 꾸러미를 펼쳐보니 거기엔 ‘문득 두려움’이 가득합니다. 서둘러 선물 상자를 덮어야 했습니다. 보지 말아야 할 삶의 끝자락을 본 것 같아 서늘합니다. 그는 시간을 만들고 우리더러 시간을 살아보라 내어준 당사자가 분명합니다. ‘사랑’을 의심하게 만든 당사자입니다. 그러면서 가혹하게 우리가 받친 목숨을 속절없이 거두어갈 심산입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니 서러워할 일은 아무 것도 없을 듯합니다. 본래 시간은 우리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시간을 ‘선물했다’는…
/김수영 어둠 속에서도 불빛 속에서도 변치 않는 사랑을 배웠다 너로 해서 그러나 너의 얼굴은 어둠에서 불빛으로 넘어가는 그 찰나에 꺼졌다 살아났다 너의 얼굴은 그만큼 불안하다 번개처럼 번개처럼 금이 간 너의 얼굴은 -- 『김수영 전집 1-시』(민음사, 1981)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의 숫자는 몇 개나 될까요? 꺼내도 꺼내도 튀어나오는 낱말들 중 한 단어를 생각합니다. 누군가에게 한 번은 꼭 해주고 싶은 단어 ‘사랑’이지요. 우리는 사랑에 환호하고 사랑에 실망하고 사랑에 속으며 사랑에 행복하고 사랑에 기회를 구하지요. 사랑은 그만큼 위대하며 그만큼 위태롭습니다. 그 사랑이 누구에게 향하는 사랑이던 말이지요. 50년이 지났어도 시인의 사랑은 위대합니다. 혁명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친 시인의 말과 시인의 시가 그리운 나날입니다.…
/박가을 질긴 웃음이다 빗줄기를 넘나들며 가슴 속에 비수를 숨겨 두었다 허탈한 비애 젖은 외투도 숨을 멈췄다 잠깐, 빗속을 거닐던 가슴이 불타올랐다 여름은 서러움에 목 놓아 웃는 거다 볕은 뚝뚝 땀방울로 얼룩져 소스라치게 불던 바람이다 뭇 사내도 바람 따라 스치며 떠난 여름이다. 창백하다. 계절을 나타내는 말들인 ‘봄, 여름, 가을, 겨울’은 순우리말이다. 봄은 ‘보다, 바라봄’을, 가을은 ‘갈다’를, 겨울은 ‘겨우살이’를 뜻한다. 그리고 여름은 ‘열리다, 열림’을 뜻하며, 여름이 되면 제법 꼴을 갖춘 제각각의 곡식들이 사람 손을 바쁘게 하기도 하고, 하늘 아래 어디서도 주고받는 마음만 있으면 연명 못할 일이 없는 계절이다. 그런데 이 시에서 여름은 허탈함과 서러움, 창백함의 계절이다. 풍요와 결실의 계절인 가을에도 배고픔에 시달리는 이들이 있듯이, 여름에도 외롭고 쓸쓸한 이들이 있게 마련인데, 기왕이면 주고받는 마음으로 가득한 여름을 만끽하는 게 어떨까.…
/김우영 검대적세(持劒對賊勢)! 칼 뽑은 기세로 우선 관념뿐인 시간과 공간을 벤다 화성행궁 앞 아직 물러가지 않는 어둠과 그대의 이름, 내 이름, 무수한 기억들 전생과 후생이라는 경계도 끊어버린다 이어 깨우침과 죽음이라는 허상조차도 단칼에 벨 날을 위해 아하하하! 오늘 새벽 서늘한 칼날 세워 조천세(朝天勢)! 오직 푸른 눈뜨고 서 있으리라 김우영 시인은 수원시인협회 회장과 화성연구회 활동하고 있어서 누구보다 수원의 역사와 문화에 밝다. 이 시는 전통의 맥을 이어 검무를 펼치는 무예 24기 단원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장용영은 조선 시대 정조대왕의 친위부대였는데, 오늘날 수원화성에 가면 장용영 군사들이 펼치는 무예24기 특별공연을 볼 수 있다. 무예 24기는 조선 정조 때 정예군이 익혔던 24가지 기예로 당시 발간된 무예훈련교범인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에 그림과 함께 정리돼 있다. 수원문화재단은 관광객들을 위해 월요일을 제외한 매일 11시와 3시 화성행궁 신풍루 앞에서 무예24기 가운데 지상무예를 중심으로 시범공연을 펼치고 있으니, 많은 관람을 바란다.…
/李白이백 花間一壺酒 (화간일호주) 꽃 넝쿨사이에 술 한 동이 獨酌無相親 (독작무상친) 따라주는 친구도 없이 홀로 마시네 擧盃邀明月 (거배요명월) 잔 들어 밝은 달에게도 권하니 對影成三人 (대영성삼인) 그림자까지 세 사람 되었구나 月旣不解飮 (월기불해음) 달이야 술 마실 줄 모르거늘 影徒隨我身 (영도수아신) 그림자만 부질없이 날 따라 다닌다 暫伴月將影 (잠반월장영) 잠시 달과 그림자 벗되어 노니나니 行樂須及春 (행락수급춘) 이 봄이 가기 전에 즐겨나 볼까 我歌月排徊 (아가월배회) 내 노래 소리에 밝은 달 서성이고 我舞影凌亂 (아무영능란) 내 춤 그림자 어지러워 일렁인다 醒時同交歡 (성시동교환) 취하기 전 우리 함께 즐거움 나눴지만 醉後各分散 (취후각분산) 취한 후엔 각기 흩어져 헤어질지니 永結無情遊 (영결무정유) 주고받은 정 없어도 맺은 인연 영원하여 相期邈雲漢 (상기막운한) 아득한 은하수에서 다시 보겠네 -출처 이백시선(민음사/이병한 역주 1975), 이백시선(문이재/신하윤 편저 2002)등 참고 꽃그늘 아래 술 한 동이가 잘 익어 향기로운데 달까지 밝아 그림자 또렷이 눈을 떠온다. 술과 달의 시인 이태백이다. 웬만한 지경에선 홀로 마시다 홀로 술자리를…
/이미산 기억된다는 것 열 손가락 동시에 폈다 오므리는 것 우연히 살아나는 미세한 진동 같은 것 충만으로 달려가는 귀향 같은 것 마음 둘둘 에워싸는 철부지 풍경 같은 것 책의 행간에 누워 있는 오래된 애인처럼 꽃무늬 몸빼 바지에 대롱대롱 매달리는 한 눈길처럼 내 안의 깊은 숲속 종일 햇빛 쪽으로 따라 도는 기억된다는 것 안녕, 누군가 손끝 살짝 건드려 준다면 화르르 삭은 뼈로 깨어나는 눈먼 기다림 같은 것 -- 이미산 시집 『아홉시뉴스가 있는 풍경』/한국문연 미모사는 손끝만 닿아도 잎을 황급히 오므리는 성질을 가졌다. 풍선처럼 차 오른 달뜬 감정, 애인의 손끝만 닿아도 살 떨리는 오르가즘. 격해지는 감정을 삭이며 은근히 움켜쥐는 주먹. 어떤 이유에선지 항상 벗어나지 못하는 긴장 상태. 아니 약간의 방심도 허락하지 않는 그 어떤 포즈도 미모사의 감정을 모르므로 단정하지 못하겠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기억된다는 것’이다. 열거한 모든 것은 유전적이든 상처의 재생이든 무의식적이든 기억의 작용들이다. 기억은 하나의 단서를 잡고 표면장력처럼 응집한다. 시인도 자신 안의 무의식을 깨워 미모사처럼 기억을 움켜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