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 하이킹 /김현탁 낮달이 훤히 떠 있으면 얼마나 좋으랴 굽은 등이 보이면 어쩌랴 비껴가는 바람 속에 숨어 있는 저 함성을 햇살과 구름 나목들이 열병식을 하며 맞는 굴렁쇠의 힘찬 발돋움 장딴지에 물이 흐르고 발목이 부르터도 심장 가득 섞인 검은 분말이 산 그림자 골짜기로 날아가 버리고 패랭이꽃 민들레꽃 냉이꽃이 춤추는 곳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풀씨들의 합창 三輪동이 四輪동이 다 떠나고 지구촌을 푸르름의 궁전으로 만드는 아아, 大地를 만끽하는 굴렁쇠의 노래여 경기문학인협회 김현탁 소설가의 자전거하이킹을 다뤄본다. 우리는 갈수록 문명의 발전 속도가 빨라지는 가속도의 시대에 살고 있다. 휴대폰의 데이터 이동 속도와 열차의 운행속도는 빨라지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속도에 탐닉하느라 놓치는 것들도 많다. 봄에 꽃비가 내리는지, 들녘에 코스모스가 피어오르는지…. 우리와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들의 모습을 놓치고 있는 것이다. 자동차와 달리 자전거는 우리 스스로 운동에너지를 일으켜 움직이는 도구이므로, 동물적인 운송수단이다. 게다가 속도도 빠르지 않으므로 자연의 모습에 눈과 귀를 열어놓을 수도 있다. 자전거를 타고 대지를 만끽하는 굴렁쇠의 노래를 연주해 보자.
내가 언제 /이시영 시인이란, 그가 진정한 시인이라면 우주의 사업에 동참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내가 언제 나의 입김으로 더운 꽃 한 송이 피워낸 적 있는가 내가 언제 나의 눈물로 이슬 한 방울 지상에 내린 적 있는가 내가 언제 나의 손길로 광원(曠原)을 거쳐서 내게 달려온 고독한 바람의 잔등을 잠재운 적 있는가 쓰다듬은 적 있는가 -이시영 시선집 <긴 노래, 짧은 시/창작과 비평 2009> 시인이 아니어도 누구나 한 번쯤은 우주적인 꿈을 품어 본 적 있을 것이다. 광대무변한 우주를 떠올리며 무한한 상상을 펼치다 보면 문득 나를 발견하고 그 작고도 초라한 모습에 눈물 흘려 본 적 있을 것이다. 그 지점에서 시인은 우리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있다. 우리들의 한숨이 떠돌다 들판을 달려와 머물 때 그 바람의 잔등을 쓰다듬어 주고 있다. 어쩌면 진정한 우주의 사업이야말로 화성탐사선을 쏘아올리고 우주의 신비를 밝히는 일보다도 내 이웃의 고단한 잔등을 쓰다듬어 주는 데 있지 않을까. /조길성 시인
만월 /배영옥 어머니는 먼 남쪽으로 밥 지으러 가서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식은 아랫목은 다시 데워지지 않았다 식구들끼리 달라붙어 서로 몸 뒤채며 체온을 나눠 가지다가 문득, 달그락달그락 그릇 씻는 소리에 문 열고 마당 내다보니 차고 맑은 우물 속 어린 동생에게 밥 한 술 떠먹이고 싶은 고봉밥그릇이 떠 있었다 -- 배영옥, 「뭇별이 총총」, 실천문학 2011 세월의 작은 마디가 또 훌쩍 지나간다. 해가 짧아지고 밤이 길어졌다. 동쪽이 서서히 밝아진다. 새들의 방문이 늦어졌다. 석양은 서둘러 창가로 내려앉는다. 어두워진 귀갓길, 달이 환하게 웃고 있다. 종이같이 얇고 창백한 달은 아직 모자란 조각을 모으고 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환하게 밝혀주는 달빛에 지친 몸을 쬐인다. 자꾸만 동그랗게 굽어지는 몸을 힘겹게 펼쳐내며 마른 손으로 찌개도 끓이고 나물도 무쳐서 한 상 차려놓으시고, 아랫목에 밥 묻어둔 채 깜박깜박 졸음에 겨워하시던 어머니. 무딘 손끝으로 전화번호 꾹꾹 눌러 언제 오냐고 보채시던 어머니. 빈자리, 데워지지 않는 자리 달빛으로 내려와 꼭꼭 여며주시는 손길이 그리운, 시리고 맑은 가을이다. /이명희시인
생각 떠다니는 길 /김윤옥 오랜 기억 품고 장안문으로 향한다. 때 묻고 구김살 진 잡념들 버무려 벗은 신발 배낭에 접어 들고 자갈 깐 건강 둘레길에 발바닥 내맡긴다. 아프다고 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쉬는데 좌측 옆 라인길, 전기자전거가 끌어 주는 생태 복지 길 신호정지선 추돌사고 당했던, 아픈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아! 이 길! 퍼뜩 자동차 없다는 착한 생각! 염려로 찍힌 발자국 위로, 사랑하는 사람 서로 토닥이며 그건, 수원사람 뿜어내는 정겨움 생각 떠다니는 길은 함께 어우러져 내일 향해 웃음 짓는다 얼마 전부터 국토 곳곳에는 생태길이 들어서고 있다. 제주도 올레길과 지리산과 북한산의 둘레길을 비롯해 도심 곳곳에서도 생태길이 조성되었다. 춥지도 덥지도 않고 높고 푸른 하늘 가을은 걷기에 좋은 계절이다. 수원 장안문 둘레길은 가족, 연인, 아니면 홀로 걷기에 좋은 길이다. 화서문과 장안문을 거쳐 방화수류정까지 이어진 길은 화성성곽 길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이다. 자연과 역사, 문화가 살아 있는 수원화성의 아름다운 길을 걸으며 가을을 만끽해 보자.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 회원이기한 시인은 요양원을 운영하고 있다. /박병두시인
꽃 /송찬호 꽃은 검은 옷을 입고 있다 그 옷은 대지大地로 만들어 입은 것이다 그 옷을 완성하기까지 꽃은 누구에게도 그것을 보여주지 않았다 꽃의 그 옷은 아주 작은 것이다 거대한 대지의 한 조각을 꽃의 겨드랑이에 잎으로 이어 붙이듯이…… 꽃은 발밑에 붉은 구두를 살짝 내려놓는다 -송찬호 시집 ‘10년 동안의 빈 의자’ / 문학과 지성사 꽃은 식물에게 있어 가장 아름다운 시기이다. 사람에게 꽃의 시절은 언제일까. 누구는 결혼이라 하고, 누구는 오래 기다린 꿈이 이루어질 때라 하고, 누구는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시절이라고도 할 것이다. 그런데 꽃은 활짝 피는 그 순간 이미 검은 옷을 입고 있다. 이것은 씨앗에 관한 이야기며 죽음에 관한 이야기며 다시 꽃을 피우기 위한 탄생에 관한 이야기다. 모든 생명체의 순환이 그러하듯 우리가 예쁘다고 탄성을 지르는 순간 이미 죽음은 우리 곁에 와 있는 것이다. 씨앗이 다 여물기도 전에 시들은 붉은 구두를 신고 먼 길을 떠나려하는 것이다. 그러니 꽃이 시든다고 속절없이 꽃이 진다고 슬퍼할 일이 아니다. 꽃이 남긴 씨앗을 기억하며 다시 꽃피는 봄을 기다리자. /이미산 시인
관계 /손병호 뿌리가 꽃 사는 세상을 알기나 할 것인가 꽃이 뿌리 사는 세상을 생각이나 할 것인가 뿌리나 꽃이나 그저 제 사는 세상 서로가 서로를 모르는 듯이 없는 듯이 그냥 그렇게 제 나름대로 사는 것이기는 하겠지만 그러나 어느 쪽도 서로가 서로를 영 모르고 사는 것 또한 아닐거라… -동인시집 <겨레와 시/도서출판 정경 1995> 지금은 이 나라에 살지 않는 선배의 시를 다시 음미해 본다. 시인은 다시 이 나라에 돌아오지 않겠노라 울분을 토하며 떠나갔다. 시는 지리멸렬해서 시를 살고자 하는 시인보다는 시를 입고 퍼포먼스 하는 이들이 승하다. 이 시는 시의 본연을 보여주는 시라 생각된다. 시 앞에 엄숙해지 기가 참 오랜만이다. /조길성 시인
즈음 /권정일 누구나 즈음이 있고 그 즈음에서 서성거리는 자발적 고립이 있고 우리는 외로움을 가졌잖아 가지마 아무도 그립지 않은 것은 사치야 고운 음색으로 리듬 있게 흩날리며 반성 없이 꽃 피울 수 없어 느리게 자라 황홀하게 벌레 먹고 싶은 황금비를 쏟아내는 히말라야시다였잖니? 수천 개의 황금 종을 타종하며 내 심장의 즈음을 맴돌고 있는 노래를 어떻게 불러야 할까 허락 없이 짧게 나눈 이별처럼 허락 없이 길게 남은 키스처럼 아직 체온 같은 인상착의 누가 자꾸 눈물방울을 돌리고 있는 것 같다 쪼개진 눈물 같다 시다림과 간절함과 쓸쓸함이 헤어지는 시간 - - 계간 『시에』 2013년 봄호 시인이 발견한 서정의 타임머신 ‘즈음’은 영혼 없이는 갈 수 없는 카이로스의 시간이다. 외로움의 유전자를 가진 인간에게는 누구나 그 ‘즈음’이 있고 그 즈음에서 서성거리는 자발적인 고립이 있다. 그래서 우리들의 심장 안에는 그리움의 어느 절정에서 울리는 황금종이 있고 그 종소리가 노래로 울려 퍼지는 것이 시의 기다림 즉, ‘시다림’이다. 그러나 그 기다림은 허락 없이 짧게 나눈 이별이거나 허락 없이 길게 남은 키스
외가 /유형진 솜사탕 기계에서 설탕 실이 풀어져 나무 막대에 모이듯 손주, 증손주들이 외할머니 집 툇마루에 모인다. ‘달리아’와 ‘백일홍’과 ‘맨드라미’가 성한 계절. ‘토실’, ‘토돌’이란 이름의 붉은 눈 흰토기들이 함께한 가족 캠프에 가겟집에서 사온 아이스크림은 소복한 외할머니 흰 머리카락. 손주, 증손주들 다 떠난 여름밤의 툇마루엔 음력 칠월 보름달 혼자 월식을 하고 솜사탕은 너무 금방 녹는다. -유형진 시집 『가벼운 마음의 소유자들』/민음사 핵가족화 이후 모계사회로 가는 것일까? 요즘은 친가보다는 외가를 중심으로 뭉치는 경우가 많다. 우리 아이들도 지역적으로 가까워서 그런지 고모보다는 이모와, 삼촌보다는 외삼촌과 훨씬 친밀하다. 왠지 친가 쪽 모임은 윤활유가 덜 쳐진 바퀴처럼 삐거덕거린다. 매끄럽지도 유쾌해 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꼭 참석할 때 아니면 친가 모임을 회피하는 경우가 많다. 자주 못 봐 어색한 면이 있겠지만 어쩜 나의 책임소재일지 모른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난 외가에 대한 기억이 없다. 어머니의 무심함으로 당연히 외할아버지에 대한 기
퀵 서비스 /장경린 봄이 오면 제비들을 보내드리겠습니다 씀바귀가 자라면 입맛을 돌려드리겠습니다 비 내리는 밤이면 벌정 난 고양이를 담장 위에 덤으로 얹어드리겠습니다 아기들은 산모 자궁까지 직접 배달해드리겠습니다 자신이 타인처럼 느껴진다면 언제든지 상품권으로 교환해드리겠습니다 꽁치를 구우면 꽁치 타는 냄새를 노을이 물들면 망둥이가 뛰노는 안면도를 보내드리겠습니다 돌아가신 이들의 혼백은 가나다순으로 잘 정돈해두겠습니다 가을이 오면 제비들을 데리러 오겠습니다 쌀쌀해지면 코감기를 빌려드리겠습니다 -- 장경린, 『토종닭 연구소 』문학과 지성사 2005 지루하고 긴 장마가 끝난 뒤 여름은 혹독하게 뜨거웠다. 바삭바삭 마른 햇살은 대지를 달구고 사람들은 폭염 속을 간신히 지나왔다. 지구가 뜨거워지고 있다느니 그저 지구별의 기온 변화로 약간의 온도가 높아졌다가 다시 냉각기로 간다느니…. 올해는 북극의 빙하가 60%나 증가했단다. 먼 동토의 나라 그린란드 순박한 농부는 그랬다. 기후는 오래 전부터 그렇게 변화했었다고. 아무튼 우리 곁의 계절은 어김없이 또 옷을 갈아입었다. 길이 자동차로 붐빈다. 어디론가 달려가는 것들이 인사를 대신하거나 미리 안부 인사를 건네는
강남 간 제비야 /김용대 물이 다 같이 어울려 살아야 할 이 땅에서 욕심 많은 우리들은 이기적 유전자를 앞세워 지배해왔지. 너희들을 위시한 모두의 허락을 받기는커녕 양해도 구하지 않고 우리 중심으로 마음대로 개발했구나. 그로인해 북극 얼음이 30년 전에 비해 반이 줄어들도록 자연을 파괴하여 질서를 어질러 놓고도 성이 차지 않았다. 자연의 순리에 따라 사는 너희들에게 몹쓸 죄를 이었구나. 하지만 어쩌겠니. 손가락을 내밀면 힘껏 입을 벌리고 짹짹거리던 귀여운 네 새끼들이 오늘따라 더욱 보고 싶은걸. 너희들이 보고 싶어 이처럼 애태우는데 언제 우리 곁에 다시 오려느냐. 강남 간 제비야! 경기수필가협회 회장을 맡고 있는 김용대 수필가의 짧은 산문을 만나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해마다 찾아오던 제비를 이제는 보기 힘들어졌다. 집마다 처마 밑에 둥지를 틀고 새끼를 낳아 키우던 제비는 이제 희귀동물이 되었다. 기와집 같은 주택이 사라지고 아파트가 우후죽순 들어서면서 제비가 집을 짓고 살기가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현상은 시골에서도 마찬가지라 한다. 시골 농가의 농약 사용이 증가해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올 줄 모르는 것이다. 인간 중심이 아닌 자연 중심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