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절초 /양문규 환한 하늘이 꽃을 내리는가 천둥 번개 울다 간 천태산 여여산방 소담하게 꽃이 열린다 햇살, 햇살이 가장 환장하게 빛날 때 저 스스로 꽃을 던져 몸을 내려놓는 그 꽃무늬를 핥고 빠는 벌과 나비 툇마루에 웅크리고 앉아 가만 들여다보는데 미루나무 이파리 우수수 허공을 날며 돌아갈 곳이 어딘가 묻는다 -문예지 『리토피아』 2012년 겨울호 우리는 더러 풍경화의 하얀 여백에 묻히고 싶을 때가 있다. 천태산 아래 ‘여여산방(如如山房)’이라는 자기만의 방(房)을 가지고 있는 시인이 한적한 마당에 핀 구절초를 만나고 있다. 시인과 시간의 풍경이 꽃과 나비처럼 한 공간에 펼쳐져 있다. 툇마루에 웅크리고 앉아 마치 오려 놓은 우주를 가만히 들여다보는 시인의 등에 언뜻 시간의 그늘이 비친다. 보일 듯 말 듯한 생애의 문양(紋樣)이 미루나무 이파리에 묻어 어디론가 날아가는 것을 본다. 시인이 옮겨놓은 구절초 풍경은 여여산방 마당에 맴도는 시간과 생명의 따듯하고도 상쾌한 긴장감을 느끼게 해 준다. 하늘과 시인과 구절초가 하나로 만나는 시간의 툇마루에서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곳이 어디인지 어렴풋이 보이는 듯하다.
눈밭에 서있는 나무 /김후란 밤새 눈이 내린 그 이튿날 눈밭에 발을 담근 겨울나무들 여럿이서 혼자서 세상을 응시하는 철학자 되어 장엄한 침묵 속에 서있다 모차르트의 ‘구도자의 저녁기도’가 흐르고 추운 겨울나무에겐 길게 흘러내린 그림자뿐 말없이 내게 기댄 그림자처럼 시와시 /2012/ 가을호/ 푸른사상사 적막한 풍경을 앞에 두고 서있는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 고요히 창 앞에 서서 눈밭에 발을 담그고 서있는 나무를 바라보는 이의 내면 풍경은 어떤 것일까. 봄날의 눈부신 새싹들, 여름날의 출렁임, 가을의 만추가 다 지난 다음 고요한 흰 빛 위에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고 서있는 나무들은 침묵하는 철학자의 모습이겠다. 그것을 발견한 시인의 눈도 이미 세상의 연연하던 것들로부터 마음을 놓아 보내고 ‘구도자의 저녁기도’를 올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최기순 시인
가지치기 /김왕노 가지치기는 아버지의 오랜 버릇이었다. 가지로 갈 양분을 열매로 보내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 가지치기뿐이라는 것을 아버지 말씀하셨다. 아버지 가지치기 하던 전지 가위 아버지 돌아가신 후로 새파랗던 날마저 벌겋게 녹슬어 있다. 벗어 놓은 장갑도 삭은 채 그대로 있다. 아버지가 가버린 것에 대해 합세해 항의하듯 아버지 가신 후 작은 열매만 맺는 배나무도 무성해진 잎만 철마다 대놓고 내 눈앞에다가 흔들어 대는 것이다. 나도 아버지가 들고 세월의 웃자란 가지나 쓸데없는 가지를 신나게 전지하고 싶던 튼튼한 전지 가위 하나 아버지 가신 후 나마저 녹슬어 버려 날마다 후회로만 푸르러 가는 것이다. 시인은 포항 출생으로 매일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문단에 나왔다. 이 땅의 아버지라는 이름은 크고 슬프다. 그것은 과거회귀로 삶을 성찰케 하거나 암울한 시절들을 끊임없이 그리워하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고 해가 바뀌면서 육체와 정신의 그믐은 타락하기도 하고 기능대로 역설적인 방향을 잡기가 어렵다. 시인의 진술처럼 열매를 가져다주는 아버지의 마음처럼 늘 새로운 마술을 보여주기도 하고 전위시켜주기도 한다. 또 기다림의 자세와 미학은 늘상 반복되는 나무들의 단상만 아니더
꿈꾸는 식물 /김윤이 침을 흘렸다 아이는 붉은 벽돌을 갈았다 아이는 그 사이에 낀 이끼를 긁었다 아이는 밥상을 차렸다 아이는 손바닥만한 그늘 안에서 놀았다 아이는 문은 밖에서 잠겼다 아이는 땅따먹기를 했다 아이는 넓어졌다 아이는 이파리의 뒤척임을 말하지 않았다 아이는 창가 햇빛이 눈부셨다 아이는 목이 말랐다 아이는 개미를 손가락으로 눌러 죽였다 아이는 누구도 물을 주지 않았다 아이는 문고리를 핥았다 아이는 점점 베란다를 기어올랐다 아이는 혼자 자랐다 - 출처 ‘흑발 소녀의 누드 속에는’ 창비시선 (2011년) “당신에게는 어떤 방에 대한 기억이 있나요?” 나지막이 묻는 것 같다. 과거형 시제가 자꾸 현재로 읽힌다. 지금 이 순간에도 혼자 밥 먹고 혼자 아프고 혼자 뒤척이면서 방바닥을 기어 다니는 개미를 장난감 삼아 노는 아이가 있을 것이다. 아이를 노인으로 바꾸어 읽어도, 다른 고유명사로 바꾸어 읽어도 전혀 무리가 없다. 너무나 순해서 아니 세상이 너무 어두워서 혹은 다른 방법이 없어서 밖에서 잠근 문, 다행인 것은 그 안에서도 시계는 째깍거리고 위태로움 속에서도 살아있는 것들은 성장을 멈추지 않는 다는 것, 어떤…
아침 릴레이 /다니카와 슌타로 캄차카의 젊은이가 기린 꿈을 꾸고 있을 때 멕시코의 아가씨는 아침 안개 속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뉴욕의 소녀가 미소 지으며 잠을 뒤척일 때 로마의 소년은 기둥 끝을 물들이는 아침 햇살에 윙크한다 이 지구에서는 언제나 어딘가에서 아침이 시작되고 있다 우리들은 아침을 릴레이하는 것이다 경도(經度)에서 경도로 말하자면 교대로 지구를 지킨다 자기 전에 잠깐 귀 기울여보면 어딘가 먼 곳에서 알람시계가 울리고 있다 그것은 당신이 보낸 아침을 누군가가 잘 받았다는 증거인 것이다 출처-김응교 옮김 다니카와 슌타로 시선집 이십억 광년의 고독-2009년 문학과지성사 캄차카의 젊은이가 “기린 꿈을 꾸고 있을 때”, 멕시코의 한 아가씨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고, “뉴욕의 소녀”가 “잠을 뒤척”이고 있을 때, “로마의 소년”은 “아침 햇살에 윙크”한다. 이 거대한 지구의 아침은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바통을 이어주고 있다. 그러나 아침은 어떤 이에게는 달콤한 시작이지만, 어떤 이에게는 간신히 눈을…
산길 /김완하 뻐꾹새 소리 따라 걷는다 산 속 들어도 뻐꾹새 보이지 않고 소리만 환하게 산을 울린다 뻐국새는 나무 위에서 우는 게 아니다 내 속에서 울고 있다 숲으로 한참 걸었는데도 소리만 울창하다 뻐국새 어디에 있는 걸까 산 속 깊이 들어갈수록 소리만 더욱 울울창창하다 소리는 다만 산으로 나를 끌어당길 뿐, 뻐꾹새 좀체 몸을 보이지 않는다 - 김완하 시선집 『어둠만이 빛을 지킨다』 천년의시작(2008) 인생은 소리에 취해 살다가 문득 소리의 보이지 않는 실체를 발견할 때 허무와 겸손을 배우게 된다. 뻐꾸기 소리 따라 들어 산길에 뻐꾸기는 없고 소리만 있다는 것, 뻐꾸기가 나무위에서 우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서 울었다는 것, 세상은 실체보다 소리로만 웅성거리는데 우리는 그저 소리만 쫓아 보이지 않는 뻐꾸기를 향해 산길을 들어선 것은 아닐까? 소리는 우리를 끌어당길 뿐 형태가 없다. 우리가 만나고자 하는 뻐꾸기는 어쩌면 내 안에서 울고 있는지 모른다. 산길에서 만나야 하는 것은 나무 위에서 우는 뻐꾸기가 아니라 내 안에서 울고 있는 진짜 ‘나’인지도 모를 일이다. 시인이 노래하는 산길에서 소리만 따라 오르기만 했던 인생 그 발길 멈추고 내
미안하다 얘들아 /김명기 기다리는 누군가가 오지 않는 연립주택 계단 노란 원추리 닮은 계집아이 셋 마른 라면을 부숴 먹으며 앉아 있다. 학원 갔다 오는 길이냐고 심심한 말을 붙였더니 우리는 가난해서 공부방 다닌다며 깔깔대고 웃는다. 단단한 벽 위에 제 몸을 밀어 넣지 못해 기어이 구부러지는 못 같은 그 말, 큰소리로 웃을 일인가 싶어 유독 크게 웃는 아이에게 네가 셋 중 제일 예쁘다 했더니 입꼬리를 살짝 말아 올리며 한사코 친구들이 더 예쁘다고 손짓을 한다. -중략- 참으로 면구스러운 순간. 수없이 나누고 편 가르는 세상에서 가난해 학원도 못 다니는 이 아이들 그렇게 갈라진 사람들을 엮어 공평무사한 책 한 권 만들며 한나절 놀고 있는 것이다. 출처 - 김명기 시집 『북평 장날 만난 체 게바라』- 2009년 문학의 전당 “가난해서 공부방 다닌다며 깔깔대고 웃는” 노란 원추리 닮은 아이들. “달리기는 셋 중 자기가 제일이라는” 부분이 가슴을 친다. 어른들의 기준과는 동떨어진, 각자 잘 하는 것 고루 나눠 가진 “공평무사한” 시선이 우리를 “면구”스럽게 만든다. 하긴 아이들에게…
향수 /김순덕 어린 날 여름밤은 앞뜰 뒤뜰에 반딧불이 반짝반짝 으슥한 숲에서는 풀벌레 노래하는 소리 이웃집 할아버지 메마른 기침소리가 지금은 왜 그리운 것일까 교직에 몸담았던 시인이 립스틱 짙게 바르고 창백한 여인의 숨소리를 내며 어느 날 문단에 빛과 그림자를 주었다. 강원출생인 시인이 산과 계곡의 물들만 바라본 순수한 마음들이 세속과 견디는 일들은 유년의 회상들로 시작된다. 스르르 눈을 감고 있다 보면 내게 불쑥 내미는 따뜻한 향수와 같은 시다. 삶도 사랑도 없다면 메마른 사람들의 생명선은 끊어진다. 기억 속 기침소리가 문 밖 어디선가 기다려줄 것만 같은 현실은 이내 지나가고 받아들여야 하는 운명에서 제각각 그저 삶 따로 사랑 따로 황량한 사회에서 이겨내야 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 낯선 땅에서 만나는 이들마다 흥겨운 것은 시인의 정신사유만큼이나 정직하고 착한 인정과 신뢰 때문이다. 어제 만났던 시간이 오늘 더 헤어질 수 없는 옷자락으로 밤은 깊어가고, 아침을 기다리고 싶지 않은 시인의 숨결이 어제나 오늘이나 울림과 떨림, 그렇게 지울 수 없다. /박병두 시인
못 꿈 /맹문재 양 발바닥은 못투성이 어떤 못은 발등까지 올라와 있었다 나는 손가락을 못뽑이 삼아 이를 잡듯 하나씩 뽑기 시작했다 손댈 때마다 겨울바람을 맞는 얼굴처럼 따가와도 수박을 먹는 것처럼 시원했다 뽑아놓은 못마다 피가 묻어 있었지만 물린 모기를 잡았을 때처럼 후련했다 피를 무서워하지 않다니, 나는 보리밭으로부터 멀어져 있구나 보리밭 끝에서 뻐꾸기 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는 못을 계속 뽑았다 어느덧 손은 피범벅이고 얼굴에도 피가 묻었다 맨발로 못을 밟고 온 나를 맨손으로 못을 뽑고 있는 나를 누가 무시할 수 있겠는가 나는 맨발로 걷기 시작했다 ―맹문재 시집, 『사과를 내밀다』(실천문학사, 2012) 지금 우리는 마치 설산(雪山)을 오르는 산악가처럼 날카로운 아이젠 몇 개씩 내 발에 박고 인생을 오르는 것은 아닐까? 내 발바닥이 못 투성이라면 내 발길에 밟혔던 풀들과 꽃들과 벌레, 그 길에서 만난 모든 생명들에게 얼마나 미안한가. 인생은 오직 내 발의 튼튼함으로 가는 줄 알았다. 나도 모르게 찌르고 상처 내며 걸어온 길, 피 흘리며 걸어온 길 그 피의 발자국을 돌아본다. 내 발에 묻은 피를 닦으며 마침내 내 발에 박힌 야생의 삶, 탐욕의 못들 하나씩 하나씩
雅調아조 /이옥(李鈺) 四更起梳頭(사경기소두) : 새벽 두 시쯤 일어나 머리 빗고 五更候公姥 (오경후공모) : 네 시에 어른들께 문안드렸지요 誓將歸家後(서장귀가후) : 친정집에 가기만 하면 不食眠日午(불식면일오) : 아무것도 먹지 않고 대낮까지 늦잠 잘 거예요 출처: 이옥문집. 한시미학산책(정민 지음 솔 출판사 1996) 등 참고 이옥은 문체반정(文體反正)에 걸려 억압받고 불우하게 지냈다. 그러나 이단적인 문학을 적극적으로 밀고 나가 박지원과 정약용에 필적할 만한 성취에 이른 사람이다. 유기론적 사상을 가졌으며 성현의 도리나 고문(古文)의 규범을 벗어나 현실을 직접 경험하고 인식해야 진실에 이른다고 했다. 얼마나 시집살이가 고되고 힘들었으면 며느리들이 다리 뻗고 늘어지게 자고 싶었을까. 시인은 세상을 비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아름다운 눈길로 바라보고 있다. 진정한 조선 선비의 숨결이 느껴져 슬며시 웃음이 돈다. /조길성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