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해진다는 것 /고운기 오래된 내 바지는 내 엉덩이를 잘 알고 있다 오래된 내 칫솔은 내 입 안을 잘 알고 있다 오래된 내 구두는 내 발가락을 잘 알고 있다 오래된 내 빗은 내 머리카락을 잘 알고 있다 오래된 내 귀가길은 내 발자국 소리를 잘 알고 있다 오래된 아내는 내 숨소리를 잘 알고 있다 그렇게 오래된 것들 속에 나는 나를 맡기고 산다 바지도 칫솔도 구두도 빗도 익숙해지다 바꾼다 발자국 소리도 숨소리도 익숙해지다 멈춘다 -고운기 시집 ‘나는 이 거리의 문법을 모른다’ / 창작과 비평사 그렇게 바꾸고 멈추는 것들 속에 나는 나를 맡기고 산다. 새롭다거나 낯선 거리는 얼마만큼 시간이 흐르면 익숙해진다. 처음으로 디뎌본 길, 처음으로 맛본 음식, 처음으로 느껴본 감정…. 사람들과 사물들도 마찬가지다. 오래되면 될수록 시간의 연륜이 배어 나오는 장롱처럼 시간은 언제나 기억할 준비가 되어 있다. “나를 맡긴다”는 것은 온전히 시간을 견딘다는 것이다. 기억 속에서 기억하는 “나”는 언제나 새롭다. “새로운” 나는 언제나 “오래”된 “
겨울동화 /은결 금빛날개 금나비, 촉수 도르르 말고, 알몸으로 오므렸습니다. 금세 어는점이 되었습니다. 날개에 금이 가고, 금가루, 눈이 머는 동안, 소주 한잔과 끓는점을 생각했습니다. 벌써부터 몸은 빠알간 인두로 달아오릅니다. 내친김에 수신 안테나를 외계로 뻗어봅니다. 모락모락 알들이 부화하고 있습니다. 스크럼 짤 날을 꿈꿉니다. 결빙되는 동안, 바람 술술 넘나드는 장롱 속 수의 한 벌, 적도의 직사광선, 혹은 금빛날개 반사광이 반짝, 빛났습니다. 大 반란, 굶기로 했습니다. 분자와 분자 사이에서 두두두 교신이 오고 갔습니다. 지방질이 분해되고 뼛속으로 피가 돌기 시작합니다. 말렸던 촉수가 풀려 방향을 잡습니다. 조그맣고 뾰족하고 풋내 나는 연두에게로. 곧 물이 오를 것입니다. 은결 시인은 시와 의식으로 문단에 나왔다. 교단에 서있거나 황무지 벌판에 서있거나, 소리 없이 세월 건너 살아온 생의 숙련만큼 삶도 맑고 깨끗한 푸른 시인이다. 아흔아홉의 노모와 동행하면서 가슴에 남긴 건 모녀성의 그리움과 울림! 효녀라고 했더니 불효녀라 답한다. 문단자리에 시인이 보이지 않으면 아픈 건 아닌지 불안감이 든다. 수의 한 벌과 마주친 단상이 어제 오늘
팔정사 백일홍 /최정례 꿈속의 또 꿈속만 같은 눈썹에 불이 붙은 그를 만난 날 그 눈길 받아내지 못하고 흔들리다 잠 깬 날 찬 강물로 달려가 풍덩 몸 던지고 싶던 날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사람들은 울고 있었다 징징징 징소리가 들렸다 절에 오르는 이가 있었다 절에 올라 무조건 빌어보려는 이가 있었다 벡일홍 꽃잎이 벌어지고 있었다 팔정사 단청 끝이 타고 있었다 꽃밭으로 가 치마폭을 흔들며 늦가을까지 환할까 어쩔가를 묻는 이가 있었다 최정례시집 <내 귓속의 장대나무 숲/민음사, 1994> 날은 춥고 세상이 각박할수록 우리는 더욱더 사랑을 꿈꾸어야 하지 않을까. 살아가노라면 누구나 한 번은 머릿속에서 벅찬 환희로 울어대는 징소리를 경험해 보았을 것이다. 눈이 부셔 똑바로 바라보지도 못하고 얼굴 붉히던 날들이 있었을 것이다. 가슴 두근거리다 못해 심장이 터질 듯해서 강물에라도 뛰어들고 팠던 옛날이 있을 것이다. 새해에는 그렇게 기쁜 날들로 가득하기를 빌고 싶다. /조길성 시인
사람꽃 /고형렬 복숭아 꽃빛이 너무 아름답기로서니 사람꽃 아이만큼은 아름답지 않다네 모란꽃이 그토록 아름답다고는 해도 사람꽃 처녀만큼은 아름답지가 못하네 모두 할아버지들이 되어서 바라보게, 저 사람꽃만큼 아름다운 것이 있는가 뭇 나비가 아무리 아름답다고 하여도 잉어가 아름답다고 암만 쳐다보아도 아무런들 사람만큼은 되지 않는다네 사람만큼은 갖고 싶어지진 않는다네 -고형렬 시집 ‘성에꽃 눈부처’ / 창작과 비평사 아름다운 것을 보면 “꽃같다”, 또는 “꽃처럼”이라는 비유를 쓴다. 그만큼 꽃은 아름다움의 대명사로 불리는 데 있어 일반화 되어 있다. 모든 꽃들은 저마다 생김새도 다르고 향기와 빛깔도 다르다. 다르지만 같은 것이 있다. 저마다 지니고 있는 “향기”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피어나는 꽃보다 아름다운 인간적인 향기. 사람이 사람에게 주는 격려와 칭찬, 위로와 용기, 사람만이 풍길 수 있는 향기다. 사람이기 때문에 “갖고”싶은 향기다.
실어증에 걸린 남자 /정치산 그가 쓰러져 말을 잃었다. 팔다리를 펼 때마다 소리만 친다. 아에이오우, 아에이오우. 통증이 올 때마다, 아에이오우, 아에이오우. 그가 할 수 있는 말은 오직, 아에이오우, 아에이오우다. 달아난 친구를 기다린다. 사라진 돈을 기다린다. 그가 나타나면 할 말이 있다. 돈이 돌아오면 살 것도 같다. 하늘이 무너질 때마다, 아에이오우, 아에이오우. 땅이 꺼질 때마다, 아에이오우, 아에이오우. 말이 아니어도 사람들 다 알아듣는다. -계간 리토피아 가을호에서 사람이 우주의 주인이라는 말은 인격이 가장 고귀하다는 말이기도 할 것이다. 봉건주의가 무너지면서 인간의 가치는 이전과는 판이하게 상승되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런데 현대를 살아가면서 이건 정말 아닌데, 라는 탄식을 금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물질이나 자본의 논리에 힘없는 개인이 무지막지하게 무너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보다 복잡해지고 다양해진 현대사회에서 살아남으려면 그야말로 전투적인 정신무장이 필요해 보인다. 대부분의 경우 법 없이도 살아갈 수 있을 만큼 착한 사람들이 이겨낼 수 없는 상처를 받는 일이 흔하다. 정말 착해서일까, 아니면 너무 나약해서일까, 그도 아니면 세상이
하모니카 /김지유 나는 땅의 불, 그대는 하늘의 얼음, 깊은 안개가 품은 하룻밤 날 위해 이불 펴고 귓불 가득 바람 불어넣던 그대는 하늘 몰래 내려온 초승달, 입술 녹여 음악을 만들던 관능의 하모니카 헐떡헐떡 얼음에서 불씨가 깜박이고 불꽃 속 얼음이 숨통을 이어붙이는 백발의 새벽, 한 자락 소스라침이 꺼낸 심장 가득 꽂히는 얼음비늘, 마른 나뭇가지처럼 부러지는 내 외마디 비명에 움찔, 화상 입은 등 돌려 휘청휘청 어둔 계단 오르는 그대는 눈물 많은 하늘의 여자, 이 몸은 척박한 땅의 사내 아랫입술과 윗입술 사이에 하모니카를 끼워 물고 숨을 불어넣으면 아름다운 음악소리가 난다. 하늘이라는 윗입술과 땅이라는 아랫입술이 벌이는 거대한 허공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세상의 모든 숨소리들. 대지의 여성과 하늘의 상징인 남성의 결합으로 인류는 증가한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내는 어떤 소리도 하모니의 파동이다. ‘땅의 불’과 ‘하늘의 얼음’이라는 극한이 만나도 지평선 끝에선 음악이 흘러나온다. ‘외마디 비명’일지라도 세상의 모든 소리를 음악으로 치환하는 시인의 세계를 엿보게 된다. 그러고 보니 세상은 관능의…
사람의 꽃 /진순분 광교산 오솔길에서 가끔씩 만나는 얼굴 뇌졸중 젊은 아내를 부축하며 걷는 남편 명치 끝 애이불비(哀而不悲)는 먼 산으로 비껴놓고 순례를 하듯 주춤주춤 가는 길 느리지만 따뜻한 차 한 잔 먹여주며 미소 지을 때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활짝 피는 사람의 꽃 당도할 산봉우리는 아직 멀고도 험한데 사랑은 주고 또 주어도 모자라서 안타까운 저 마음 웅숭깊은 곳 숭고한 꽃이 핀다. 시인은 신춘문예와 문학예술을 통해 시단에 나왔다. 시조시학상을 수상하였고, 시낭송가로 활동하고 있다. 살아가면서 슬프면서도 슬프지 않다고 말하며 사는 일들이 관조적인 시선만은 아닐 것이다. 산을 오르며 해 뜨는 아침과 저녁놀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생의 종착역을 향한 인생길만은 아니다. 소리 없이 죽어가는 세포, 흔적 없이 빠지는 머리카락, 생의 이면은 차갑고 아프다. 사람이 지닌 삶과 역량은 늘 다르다. 다른 빛과 색의 역량이 다르고 조화로운 삶의 결집된 에너지가 다를 것이다. 시인은 꽃을 통해서, 시간을 통해서, 죽어가는 것들을 미학으로 풀어내기도 하고 따뜻한 세상의 웅비를 호소하기도 한다. 세상이란 답은 없지만 시인은 인내로 배려하고 자신보다는 늘 타인을 그리워하는 사람이다
눈 뜨는 아침/한혜영 따끈따끈한 알 하나를 이불 속에서 만져보네 삼백육십오알, 알 낳는 암탉 과거는 시간을 먹어 치우고 시간은 나를 먹어치우고 나는 나를 먹어치우고 그 힘으로 따끈따끈한 또 하루 시간을 낳았네 생명이란 참으로 애틋하구나 가만히 알 품고 있으면 톡톡톡 끊임없이 부리질 하는 소리 아아, 난 살아 있는 거야 마주 쪼아보는 생각의 부리 피묻은 날개를 추스르며 껍질을 빠져나오네 대견스러워라 하루는 이제 온전히 내 것이야 이부자리를 정리하면서 날개를 파닥여보네 오늘은 날 수 있을까? 오늘은… 시집- 태평양을 다리는 세탁소/ 천년의 시작/ 2002 1월, 누구나 자신의 품속에서 따뜻한 꿈 하나를 낳고 싶은 계절이다. 지난해 우리가 까먹은 365개의 알이 ‘시간’이라는 타래를 통해 나에게 온 ‘생명’이라는 알이었듯이, 그 알은 여전히 시간이라는 유전자를 타고 우리에게 던져진 꿈의 원형이다. 세상의 모든 꿈은 피 묻은 날개 밑에 감추어 있다. 꿈이 부화하기까지는 어두움과 웅크림의 기다림도 함께 품어야 하리라. 알속에 갇힌 우리의 꿈이 마침내 새들처럼 태양을 맴돌 때까지 엄동(嚴冬)의 계절, 캄캄한 시간을
안개, 그 사랑 법 /홍일표 모를 것이다 못 박을 수 없고, 그물로 멈추게 할 수 없는 내밀한 흐름, 눈부신 보행을 허공에 떠다니는 금빛 은어 떼의 나직한 연가를 상처 깊은 우리의 거리를 붕대로 동여매는 오늘밤 모를 것이다 어루만지는 손끝에서 피어나는 꽃망울을 가로수와 가로수의 거리를 지우는 그리하여 마을 전체를 치마폭에 감싸안는 눈물겨운 모성을 모를 것이다 우리네 골목길의 흉흉한 냄새와 온기 없는 손과 손을 적시며 흐르는 빛 고운 숨결을 그 은밀한 속삭임도 모를 것이다 시집- 안개, 그 사랑법/ 심상사/ 1991 슬픈 손의 위안 같은 촉촉한 감촉으로 모든 사물들의 남루해진 뿌리를 가려 잠시 쉬게 하고 돌이킬 수 없도록 치명적이고 리얼해 상처 깊은 우리의 거리를 붕대로 동여매 치유와 몽환의 세계로 들어 올려주는 대지의 희고 엷은 소맷자락, 우매한 이성들은 모른다고 치자. 무슨 상관이겠는가.이른 봄날 아침 ‘금빛 은어 떼의 나직한 연가’에 아직 수줍음 많은 소년들이 꿈을 키우고 더는 물러설 곳 없는 막막하고 주눅 든 마음들 포근하게 품어주는 모성에 누군들 잠시 얼굴을 묻지 않겠는가.스스로 생성하고 소멸하는 그 손끝에서 물기 머금은 꽃망울이
열린 감옥 /김나영 지구의 한켠에서 종신형을 살고 있다 세상의 모든 경전(經典)은 나를 비껴 지나갔다. 파래서 너무 파래서 팡! 쏴 갈기고 싶은 하늘 아래 나는 치명적으로 젊고 건강하다. 출처- 『왼손의 쓸모』 / 206년 천년의 시작 가을 하늘이 너무 파래서 지천에 봄꽃 만발해서 신록이 미치도록 푸르러서 슬펐던 적이 있다. 제도가 한 개인한테 부과한 페르소나에 충실해서 살다보면 스스로 감옥에 갇히게 된다. 신년에 한 친구는 사람의 기억이란 지워지지 않는다며 죽은 뒤에 어떤 사람으로 기억될 것인가를 염두에 두고 잘 살아야겠다는 각오 아닌 각오를 문자로 보내왔다. 헉! 죽은 뒤까지 감옥에 갇혀야 하는구나. 덜컥! 고로 상상 속에서만 “치명적으로 젊고 건강하고” 자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