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백석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燒酒를 마신다 소주燒酒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출처-백석, 정본 백석 시집-2007년 문학동네 눈이 푹푹 날리면 백석의 시 「나와 나타사와 흰 당나귀」가 생각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라는 표현을 얻기까지 시인은 어떻게 세상을 견디며 살았을까? 이 빛나는 구절은, 그 어떤 미사여구를 동원하기에도 아깝다. 백석의 시는 1987년이 되어서야 우리에게 도착했다. 만약 백석의 시가 더 빨리 도착했다면, 우리
소금밭에 핀 연꽃 /김윤환 세파는 차갑고 엄마아빠는 바쁘다 무거운 가방 충혈된 눈 멈추지 않는 딸국질 연민보다 화가 먼저 생기는 아이들의 소금밭 사랑으로 밥상을 이루고 밥상으로 가족을 이룰 때 월화수목금토일 날마다 찾아오는 무지개빛 천사들 서로의 어깨에 날개를 달아주네 바다가 떠난 소금밭에 천사들 옹기종기 연꽃을 피우고 있네 김윤환 시인의 소금밭에 핀 연꽃은 시화공단이란 상황에서 갯벌 세계의 정한과 가난한 이웃들의 애잔한 심경을 읽게 된다. 밥 한 톨 어디 소금밭 없이 단맛 쓴맛 짠맛의 서러움을 그냥 지나갈 수 있으랴,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시선에 시인의 눈물 같은 편지다. 김윤환 시인은 실천문학에 노동의 시를 발표하면서 시단에 나왔다. 시흥 은강교회에서 사역을 맡고 있으며, 연성지역아동센터 대표로 있다. 어려운 환경에 함몰된 공간과 시간에서 정서적 불안정한 아이들과 성장기를 걷는 천사들에게 치유문화로 다양한 문화프로그램을 통해 아이들의 길 찾기에 분주하다. 차가운 세파에 누구라 할 것 없이 옹망졸망 가슴졸이는 새벽과 늦은 저녁 밤, 고단한 일상들의 허기진 노래는 그래서 더 아프다. 낯선 사람들의 터전에서 바다의 경계를 넘어 연꽃들로 화사한…
공터일기 /최춘희 새벽에 깨어 눈뜨면 문득 사는 것이 지랄 같다 가슴 밑바닥 치고 올라오는 허기 목울대를 때리고 눈부신 꽃대 밀어 올리던 봄날 흔적 없다 갈 데까지 가보자고 하늘까지 넝쿨 뻗던, 푸른 적의 무성한 여름도 가버렸다 찬란한 단풍의 호시절 손 한번 잡아주지 못했다 평생 몸 누일 집 한 칸 마련하지 못한 아비 어서도 곁방살이 떠돈다는 풍문이다 날이 새면 집 지으리라 다짐한다는 히말라야 전설 속 어리석은 새처럼 노숙의 한평생 낙엽으로 발에 차인다 당겨 쓴 카드빚과 마이너스 통장의 막막함이 목줄을 당기고 산더미처럼 쌓여가는 세금 고지서 꽉 막힌 벽이 되어 막아서는 비상구 없는 하루의 시작이다 뿔뿔이 흩어진 황금빛 날들 기억도 희미한 채 녹슬어가고 먹구름의 공습 시작 된다 컨테이너 박스가 철거되고 곧 혹독한 유형(流刑)의 겨울이 올 것이다 -2012년 시와 경계 겨울호에서 최춘희 시인은 중년의 여류시인으로 삶을 잘 그려내는 시로 많은 울림을 준다. 공터일기는 절망의 노래가 아니다. 아무리 혹독한 겨울이 오더라도 살아나겠다는 의지가 반어법처럼 이 시에 깔려 있다. 얼음장 쩡쩡 우는 산골에도 봄을 기다려 언 땅에 묻혀 숨을 고르는 꽃이 있다. 언 땅에 뿌리를
사람을 쬐다 /유홍준 사람이란 그렇다 사람은 사람을 쬐어야지만 산다 독거가 어려운 것은 바로 이 때문, 사람이 사람을 쬘 수 없기 때문 그래서 오랫동안 사람을 쬐지 않으면 그 사람의 손등에 검버섯이 핀다 얼굴에 저승꽃이 핀다 -중략- 냄새가 난다, 삭아 허름한 대문간에 다 늙은 할머니 한 사람 지팡이 내려놓고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 바라보고 있다 깊고 먼 눈빛으로 사람을 쬐고 있다 시와반시 창간 20주년 기념 앤솔로지 「할퀸 데를 또 할퀴는 방식」/시와반시 孤獨死라는 것이 있다. 고독사는 주로 노인층에서 흔하게 발견되는데 오랫동안 곁에서 돌보는 사람도 없이 고독하게 죽는 사건이다. 이른 봄 양지바른 앞마당에 앉아 맑은 햇볕을 쬐듯이, 아니 추운 겨울날 난롯가에 앉아 두 손 내밀어 난롯불을 쬐듯이 ‘사람을 쬐다’니?(이런 발견이 시 읽는 재미를 더한다.) ‘사람을 쬐’지 못하면 사람 몸에도 ‘습기가 차고 곰팡이가 핀다’. ‘냄새가 나고 삭는다’. ‘사람을 쬐’지 못해 홀로 외롭게 쓸쓸하게 죽어가는 노인들. 이 시 속의 할머니도 살기 위해,
똥지게 /심호택 우리 어머니 나를 가르치며 잘못 가르친 것 한 가지 일꾼에게 궂은 일 시켜놓고 봐라 공부 안 하면 어떻게 되나 저렇게 된다 똥지게 진다 -시집 <하늘밥도둑> 창작과비평, 1993 오랜 유교적 전통의 영향으로 직업에 귀천이 뚜렷한 우리다. 유교 종주국인 중국도 우리보다는 열려있는 사회다. 모든 종교나 사상이 이 나라에 들어오게 되면 깊어진다는 좋은 면도 있겠으나 그 깊음이 자칫 교조로 빠지기도 한다. 서당엘 다녔던 시인이 불문학을 전공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시인이 삶을 바라보던 깊디깊은 눈빛을 느낄 수 있어 참으로 소중하다. /조길성 시인
밥상 앞에서 /이가림 밥알 한 톨이 내 목구멍에 들어오기까지는 적어도 60만 명의 손을 거쳐야 한다고 한다 내 앞에 놓인 고봉밥 한 그릇, 작은 라마 사원의 궁륭처럼 거룩하다 날마다 부질없이 남들이 땀 흘려 쌓아놓은 사원을 세 채씩 허물고 또 허물고 있으니 이 탕감할 수 없는 죄값을 어찌 갚을꼬! 인간은 누구나 우주를 가지고 있다. 오직 자신만의 우주이다. 그러니까 일개 한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속에는 그만의 소중하고 거대한 우주가 담겨있으니 아무리 못난 사람이더라도 우습게 볼 일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우주는 섬과 같아서 그 우주 단독으로는 존재 의미가 별로 없다는 것도 무시할 일은 아니다. 우주와 우주가 몇 겹으로 겹치고 엇갈리고 만나야 우주는 우주답게 확장하며 그 가치를 발휘한다. 밥 한 끼 먹으면서 밥알 한 톨에 묻은 수많은 우주를 생각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사람은 제아무리 뛰어난 능력이 있다 하더라도 저 혼자 힘으로는 살아남을 수가 없다. 내가 세상에 존재하기 위해서는 보이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이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딸기 /박홍점 딸기는 그냥 맨몸으로 산다 중심에 씨방 만들어 씨를 가두지도 않고 흩어져 있는 씨까지도 달다 터지지 않고 어떻게 여기까지 왔을까 그러나 한번쯤 쨈을 만들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딸기의 붉고 여린 표면은 일종의 전략이라는 것을 딸기를 매만지는 손은 때로 경건해 보이기도 하다 열을 가해도 잘 풀어지지 않고 국자로 꾹꾹 눌러도 뱉어낸 수면 속에서 이리저리 빠져나간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더욱 완강하고 질기다 꽃처럼 달콤했던 모습 다 허물어져도 쉽게 헐어버릴 수 없는 심지 하나 뼈의 단단함으로 숨기고 있었구나, 견디고 있었구나 맨몸으로 살아가는 오랜 습성은 딸기의 중심이다 박홍점 시인과 만난 것이 90년대이니 시력이 필자와 20년이 되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는데 그와 시로 만나고 있으니 오래도록 만날 일이다. 고향을 등지고 타향에서 노래했던 세월이 녹록치 않다. 문학사상으로 등단을 하고 지역문학을 떠난 시점에서 그의 시적 진술은 세상과 다시 한바탕 깊은 사연을 만들고 있었다. 내면을 가볍게 드러내지 않고 딸기 속 은유에 잠긴 인생들이 오버랩 된 순간 잔치는 다시 시작 된다. 맨몸으로 살아가는 순간들이 찡한 가슴을 안고 한 중심의 원을 그리는…
노을강에서 재즈를 듣다 /허림 그대와 헤어지고 나서 강가에서 나는 서성거렸다 물결의 악보 위로 조곡 같은 바람이 흘러왔다 물과 물 뒤섞이는 소리 발끝에 젖고 눈빛이 저녁 햇살이 잠시 붉어졌다 강물 따라 흘러가는 노래는 조금은 슬프리라 …중략… 동화속의 전설에서 나는 사랑에 귀가 멀고 눈이 멀었지만 나는 노을강가에서 그대의 이름을 부르며 흘러갈 것이다 바다까지 흘러가 섬이 될 것이다 그대는 이 강을 따라 떠났고 물결처럼 남은 사랑만이 내 가슴에 와 뒤척인다 은밀하게 상처 속에 남아있는 고독은 미루나무 숲 그늘아래 서성이게 하리라 밤새의 울음이 적막하게 둥글어지고 나는 나무의 저쪽에서 또는 물의 안쪽에서 들려오는 메아리를 듣는다 내 사랑은 아직도 강가를 서성인다 시집<노을 강에서 재즈를 듣다> 황금알 / 2008 오랫동안 강가를 서성여 본 사람은 안다.강이, 그 물결들이 조곤조곤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속삭이고 또 수용하는지. 이제 그만 엉덩이를 털고 일어서는 소맷자락을 붙잡고 발목을 잡아 주저앉히는지…. 꿈을 키우기도 혹은 쓸쓸히 꿈을 접기도 사랑을 맞을 때 혹은 보낼 때도 함께 있기에 강만큼 적
바닥 /박성우 괜찮아, 바닥을 보여줘도 괜찮아 나도 그대에게 바닥을 보여줄게, 악수 우린 그렇게 서로의 바닥을 위로하고 위로받았던가 그대의 바닥과 나의 바닥, 손바닥 괜찮아, 처음엔 다 서툴고 떨려 처음이 아니어서 능숙해도 괜찮아 그대와 나는 그렇게 서로의 바닥을 핥았던가 아, 달콤한 바닥이여, 혓바닥 괜찮아, 냄새가 나면 좀 어때 그대 바닥을 내밀어 봐, 냄새나는 바닥을 내가 닦아줄게 그대와 내가 마주앉아 씻어주던 바닥, 발바닥 그래, 우리 몸엔 세 개의 바닥이 있지 손바닥과 혓바닥과 발바닥, 이 세 바닥을 죄 보여주고 감쌀 수 있다면 그건 사랑이겠지, 언젠가 바닥을 쳐도 좋을 사랑이겠지 바닥이란 가장 낮은 곳을 이르는 말이다. 그래서 아무 꾸밈없이 적나라한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우리 몸에 세 개의 바닥이 있다고 했다. 서로를 위로할 수 있는 ‘손바닥’, 달콤한 바닥인 ‘혓바닥’, 냄새나는 바닥인 ‘발바닥’. 바닥을 보이고 닦아주고 핥을 수 있다면 ‘사랑’이라고 했다. “바닥을 쳐도 좋을 사랑”, 그대여, 우리 그렇게 한 세상 건너가고…
겨울 메아리 /김수복 죽고 다시 사는 일이란 아침에서 저녁으로 건너가는, 이 나무에게서 저 나무에게로 건너가는, 나의 슬픔에서 너의 슬픔으로 건너가는, 너에게서 나에게로 나에게서 너에게로 죽음에서 이승으로 건너오는 일인 걸 새벽 눈발을 맞으며 새벽 산허리에 감기는, 훨훨, 죽음을 넘나드는 눈발이 되어 한 며칠 눈사람이 되어 깊이 잠드는 일인 걸 -시집, 『외박』, 창비, 2012 한겨울 눈사람을 본다. 지상의 온도만큼 산다. 하늘이 빚어 낸 사라짐이 예비된 하얀 삶, 그래, 죽고 다시 사는 일이란 아침에서 저녁으로,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건너가는 일, 슬픔이 나에게서 그에게로 건너가는 일인지도 몰라, 시간은 그대로인데 목숨만이 겨울에서 봄으로 건너간다. 새로운 한 해가 왔다고 하나 물로 왔으니 물로 돌아가는 저 눈사람처럼 우리도 지난해의 마지막 눈발을 새해의 첫 메아리로 삼아 하얀 눈밭에 자신을 감추고 깊이 잠든 눈사람처럼 다시 사라지기 위해 잠시 깨어 살아져 가는지도 모를 일이다. 시간이라는 물레에 하얗고 추운 생애(生涯)가 메아리로 감기는 것을 본다. /김윤환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