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계신 곳은 어떠십니까. 제가 머무는 산기슭에는 비가 내립니다. 빗소리는 그윽합니다. 라디오 볼륨을 높여도 빗소리는 멀어지지 않습니다. 음악과 빗소리는 서로를 밀어내지 않고 안과 밖에서 차분합니다. 아침상을 물리고 길을 나섭니다. 우산으로 비를 가리며 산길을 걷습니다. 가려지는 것보다 가려지지 않는 것들이 많습니다. 생각해 보면 늘 그랬습니다. 가리고 싶어도 끝내 가릴 수 없는 것들, 아랫배에 그어진 수술자국 같은 것들, 지금은 잊어버리고 없는 흑백사진 속 아버지의 눈물 같은 것들, 빗길을 걸어 숲에 들면 가려질 수 있을까요. 잣나무 숲길을 걷습니다. 우산으로 비를 가리며 걷습니다. 여전히 가려지는 것보다 가려지지 않는 것들이 많습니다. 숲길을 따라 양치식물이 군락을 이뤘습니다. 군데군데 산딸기가 익어갑니다. 숲에서 익어가는 산딸기..
대학생 박성민이 청와대 청년비서관이 되었다고 해서 잠시 소란이 있었다. 청와대 국민청원이나 고려대 재학생이 개설했다는 박탈감닷컴 따위를 보면, 대학 졸업도 않고 취업 노력도 없는데 9급 공무원 시험이나 행정고시 등 공정한 경쟁도 치르지 않고 단박에 1급 공무원이 될 수 있느냐 하는 시기와 불만이 대부분이다. 각설하고, 일각의 대학 졸업 운운에 대해서만 생각해보기로 한다. 11년 전 한 학생이 대학을 그만둔다며 자퇴를 했다. 고려대학교 경영학과 3학년 김예슬은 2010년 3월 10일 고려대 정문에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 라는 제목의 대자보를 붙이고 ‘오늘 저는 대학을 그만둡니다. 진리도 우정도 정의도 없는 죽은 대학이기에’라고 쓴 팻말을 들고 시위를 했다. 김예슬은 고등학생이던 2005년부터 대학생나눔문화에서 고전을 배..
‘유소작위’(有所作爲:할 수 있는 일을 나서서 적극적으로 수행하며 성과를 취득하고 그에 걸맞게 밖으로 영향력을 드러낸다). 지난달 7일 중국의 대입 수능인 가오카오(高考)에서 출제된 논술 제목이다. 2012년 취임한 시진핑 국가 주석의 팽창적 대외전략을 상징하는 단어다. 중국은 1일 공산당(중공) 창당 100주년을 맞았다. 1921년 창당,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한 중국은 현재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초강대국으로 부상했다. 중국은 창당 100주년을 전후해 공산당의 업적을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전방위에 걸쳐 애국심을 고취시키고 있다. “공산당이 없으면 신중국도 없다(沒有共産黨, 就沒有新中國)”는 문구는 중국 전역에서 쉽게 볼 수 있다. 내년 당 대회에서 3연임을 노리고 있는 시진핑 주석은 창당 100주년 기념 연설을 통해 “외부 세력이..
우리 반 아이들은 다음 주 월요일부터 매일 등교한다. 교육부에서 2학기부터 전면 등교를 하겠다고 발표했는데 학교 규모가 작은 편에 속하는 우리 학교는 한 달 먼저 등교를 시작하기로 했다. 1년 4개월 만에 아이들이 매일 학교에 올 수 있게 되었다. 드디어 아이들을 매일 보려나 기대하던 찰나에 옆 학교에서 확진자 수가 갑자기 늘었다. 다시 전면 온라인 수업으로 넘어가는 거 아니냐는 이야기까지 나왔지만 다행스럽게 위기가 넘어갔다. 우리 반 아이들은 언제나 매일 학교에 오고 싶어 했다. 거리 두기 때문에 교실에서 별다르게 재밌는 활동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왜 학교가 재밌냐고 묻자, “뭘 하든 학교에 가는 게 낫죠.”라고 말하곤 했었다. 교육부에서 실시한 등교 관련 설문조사를 봐도 고등학생은 등교를 원하는 학생이 26퍼센트에 머무르는 반면 초등..
학기가 끝나고 성적을 입력하면서 젊은 친구들에 대한 교육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다행스럽게도 이번 ‘임시 교편’ 과정에서 좋은 학생들을 만났다. 한 번도 출석에 빠지지들 않았고 과제를 거른 적도 없으며 비대면 수업이지만 학습 태도들도 좋았다. 모두들 훌륭한 점수를 받기에 충분했다. 과제 명은 ‘올리버 스톤의 영화로 본 미국 현대사 1954~1974’이다. 올리버 스톤 감독이 변방의 한국에서 자신의 영화가 역사 공부에 쓰이고 있음을 알아줬으면 좋겠다. 영화감독으로서 나름 자부심을 느낄 만한 일일 것이다. 그런데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영화 중 ‘플래툰’과 ‘7월 4일생’ 그리고 ‘하늘과 땅’은 베트남전쟁사와 그와 연관된 미국 국내사를 들여다보는 데 있어 최적의 텍스트다. 특히 ‘플래툰’은 미군에 의한 미라이양민학살사건을 그리고 있고 이..
나는 고개 들어 3층 학원을 바라본다. 둘째 아들이 공부하고 있는 학원이다. 학원의 불빛이 아직은 밝다. 아들이 학원을 마치고 내려오려면 10분쯤 남았다. 나는 항상 10분 정도는 여유 있게 도착한다. 학원 끝나고 아들이 내려오면 바로 픽업해서 집에 데려가려는 셈이다. 피곤한 아들을 단 1분이라도 빨리 집에 데려가 쉬게 하고 싶은 욕심이다. 나는 핸드폰을 켜서 김윤아의 ‘길’이라는 노래를 듣는다. ‘세상 어딘가 저 길 가장 구석에 갈 길을 잃은 나를 찾아야만 해.’ 노래 가사가 요즘 나의 처지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아 즐겨 듣는 노래가 되었다. 그때 신호를 받고 탑차가 들어온다. 아마도 생선이나 야채를 배달하는 것 같은 냉동 탑차다. 익숙하고 묘한 동질감을 갖게 만드는 차다. 그동안 관찰해보니 탑차의 주인은 나와 같은 학부모였다. 학원에서 나오는 그 딸..
코로나19 영향으로 일자리를 잃고 생활고에 시달리는 국민들이 늘어났다. 기업의 신입채용 계획이 대폭 축소되거나 취소되고 채용 규모도 줄었다. 수요가 급증한 배달업 등 일부 직종을 제외한 재취업도 어렵다. 특히 상대적으로 취업문이 좁은 여성들은 더 가혹한 취업난에 시달리고 있다. 남편의 실직 등으로 가정 형편이 기울면서 재취업을 원하는 경력단절 여성들의 경우, 원하는 일자리를 얻기는 더욱 지난하다. 여성 비정규직 취업도 어려워지고 있다. 통계청이 낸 ‘2020년 8월 경제활동인구조사 근로형태별 부가조사’를 보면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는 409만1000명으로 전년도 8월보다 3만5000명 감소했다. 남성 노동자는 333만5000명으로 전년도 8월보다 2만1000명 감소했다. 그러나 코로나19 발생 후 비정규직 중 파견, 용역 노동자 혹은 가사 도우미, 배..
사막을 건너 멕시코 장벽을 넘으려던 여자의 심장이 멈췄다 맨발은 더 이상 모래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선인장이 가시를 견디고 있다 독수리들이 그녀의 마지막을 견디고 있다 뒤늦게 도착한 국경수비대가 흩어진 소지품을 챙긴다 발을 떠난 신발이 국경을 바라보며 저만치 엎어져 있다 인적이 드문 밀입국로, 성공하기 제일 어려운 루트, 사막과 더위와 가난과 희망, 어느 것이 더 무모했을까 국경수비대는 흐트러진 몸을 담요로 덮어주고 옷깃을 여민다 경고문이 적힌 소용없는 팻말들, 사람들 사이에서 사라진 말들, 그녀의 마지막 길에 거수경례를 한다 국경을 넘으려는 자동차들이 줄을 지어 서 있다, 없는 트렁크 속의 마리화나, 없는 고가의 물건들, 국경을 넘으려는 사람들은 지은 죄가 없어도 액자 속에서 얼어버린 파도 소리가 들린다 심장의 파도 소리가 들린다..
《조국의 시간》이 출간 4주 만에 40만부를 돌파했다고 한다. 현재 출판 시장 여건을 고려할 때 경이로운 기록이라 할 수 있다. ‘조국 뉘우스’(전상훈)에 따르면 지난 2019년 8월 조국교수가 법무부장관으로 지명되던 무렵부터 약 4주간 신문과 방송에서 내보낸 조국관련 ‘의혹기사’는 무려 130만 건이 넘었다. 《조국의 시간》을 읽으면서, 사나운 사냥개로 전락한 한국 언론의 실상에 새삼 몸서리쳤다. 검찰이 정보를 흘리면 대다수 언론이 거국적으로 ‘단독’보를 양산하고, 야당이 메가톤급 확성기가 되어 소음을 굉음으로 키운다. 의도한대로 여론이 형성되면 검찰은 수사를 확대하고 정보를 또 언론에 흘린다. 이것이 검찰-언론-국힘당 삼각편대의 진보인사 죽이기 알고리즘이다. 핵심 고리가 언론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윤석열사태’ 전까지만 해도..
한국토지주택공사(LH) 전·현직 직원들이 부동산개발 회사를 따로 설립해 그들만의 ‘부동산 투기’ 왕국을 도모한 정황이 밝혀져 충격을 던져주고 있다. 정부 합동특별수사본부(특수본)는 LH 전·현직 직원들과 그 친척·지인 등 수십 명이 부동산개발 회사를 별도로 차려 조직적으로 투기한 정황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또 공인중개사와 결탁해 투기를 꾀한 정황을 확인했다고 공개했다. 이와 관련, 경기남부경찰청은 LH 직원 등을 부패방지법 위반 혐의로 입건해 조사하고 있다. 해당 직원들은 친척·지인 등과 함께 부동산개발 회사를 운영하는 과정에서 내부 정보를 활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달 말 기준으로 특수본이 내·수사를 했거나 진행 중인 대상은 총 765건, 3356명으로 집계됐다. 신분별로 보면 고위공직자 113명, 공무원 287명, 공공기관 직원 1..